[리뷰]연극, 시간·공간을 위로하다…'화전가'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 배삼식 작·이성열 연출
코로나19로 5개월여 만에 개막…매진행렬
[서울=뉴시스] 연극 '화전가'. 2020.08.09.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이자 배삼식 작가의 신작인 연극 '화전가'는 시간과 공간을 포용해서 결국 위로한다.
6·25 전쟁 발발 직적인 1950년 4월 어느 화장한 봄날 경북 내륙 반촌. '김씨'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한 집에 모인 9명의 여인들이 환갑잔치 대신 화전놀이를 떠나기로 하는 이야기는 미시사(微視史)다.
독골말매의 "액씨요, 다리덜리 얼매나 말이 마은 줄 아니껴? 그집이 낭팰레라. 뿔이 나가 낭팰레라. 딸은 뭐한데 안 즉 안 보낼꼬. 그래 붙잡고 있는동?" 등 경북 안동 사투리가 넘쳐나는 등 지역색도 뚜렷하다.
그래서 '억지로 꾸며진 특수한 상황'이 아닌, 70년 전 어느 집안에나 있었던 '보편적인 상황'이라는 것이 더 실감난다.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은 그렇게 우리가 긴 시간을 한 공간에서 살아왔음을 거시적으로 통합한다.
배 작가는 시간, 공간을 어떻게 연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지가 몸에 배여 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몸소 겪은 노인들의 이야기였던 '3월의 눈', 대구 지하철 참사 등을 통해 베이비붐 세대를 겪은 부부의 이야기를 풀어낸 '먼 데서 오는 여자', 그간 우리 기억이 미처 머물지 못했던 1945년 해방 직후 만주를 배경으로 한 '1945'가 예다.
'화전가'에서는 2시간20분에 압축된 하루의 시간을 통해 아홉 여성의 삶을 유기적으로 펼쳐 내는 마법 같은 순간을 피어 오르게 한다.
[서울=뉴시스] 연극 '화전가'. 2020.08.09.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배 작가는 이들의 하루를 도려내는 것만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시간의 띠'를 만들어낸다. 특히 삐걱거리는 마루가 수평으로 펼쳐져 있는 공간을 수직으로 분할시키는 비가 쏟아질 때, 금실이와 박실이의 과거 상처가 드러나고 그 시간의 띠는 현재 관객의 마음을 둘러싼다.
연극 중간 중간 먼 하늘에서 아득하게 총소리가 울린다. 관객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그럼에도 '화전가'는 삶을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 또는 열심히 버텨내는 것에 대해 어떤 삶도 감히 고립돼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연극은 시간과 공간의 범주를 넓게 한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도 버텨내고 살아내려는 힘. 그것이 이야기와 관객의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특히 김씨가 아끼던 '납닥생냉이'로 지은 치마와 함께 박실이로부터 환갑선물로 받은 금 쌍가락지를 첫째 며느리 장림댁에게 주는 순간, 객석 곳곳에서는 울음을 훔치는 소리가 들린다. 김씨가 며느리에게 친정에 다녀오라고 하는 순간, 영원한 이별을 우리는 짐작한다.
삶이 비극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알고 있는 가운데, 상대를 절실하게 대하는 모습을 볼 때 누가 그 이야기를 평안하게 감내할 수 있을까.
[서울=뉴시스] 연극 '화전가'. 2020.08.09.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누군가는 '화전가'를 최근 공연계에 유행한 여성서사의 시각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배 작가는 뉴시스와 앞서 만난 자리에서 "의식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주류적인 것으로부터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그 시절을 기억할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특정한 서사로 분류되지 않아도, 작가가 텍스트를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을 때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공유된 역사적 이야기에서 미답의 진리를 길어 올리는 힘을 '화전가'는 갖고 있다.
'화전가'는 실제 화전놀이를 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화전놀이는 삼월 삼짇날 교외나 산 같은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음식을 먹고 꽃을 보며 노는 꽃놀이다. 여성들이 진달래꽃으로 '화전(花煎)'을 지져 먹고 가무를 즐기는 놀이다.
애초 봄에 초연 예정이었던 '화전가'는 코로나19 여파로 5개월여가 지나, 지루한 장마 속에 놓인 한여름이 돼서야 당도했다. 극은 화전놀이를 마친 이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얼마나 아름다웠던 풍경인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김씨를 비롯 아홉 인물들은 밤을 새고 화전놀이를 다녀왔는데 봉아는 "머, 몽롱하이 꿈인동 생신동. 그것도 그대로 좋더라"고 회상한다.
[서울=뉴시스] 연극 '화전가'. 2020.08.09.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무정한 시간이 밤의 재 흩뿌리며 그대의 한낮을 어둡게 물들일 때, 무정의 시간이 밤의 재 흩뿌리며 그대의 한낮을 어둡게 물 들일 때, 사건이 앗아간 그 모든 것을. 나 여기 다시 새기네. 그대를 위하여."
봉아는 이렇게 외친다. "언제 또 우리가 이클 모이 보겠노? 아무도 못 잔다, 오늘은. 자지 마라. 자만 안 된다." 낮에도 밤의 재가 흩뿌려지는 이 때 우리가 연극을 보고 연대하는 이유다.
수평적 무대에 역사의 시간을 녹여낸 박상봉의 무대, 실제 삶의 흔적과 화전놀이의 아름다운 때를 골고루 담아낸 김영진의 의상, 있어야 할 곳에만 슬며시 고개를 드는 박승원의 음악 등 스태프들의 합도 일품이다.
지난 6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했는데, 관객들의 기다림과 기대가 반영된 듯 오는 23일까지 표가 모두 매진됐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객석 띄어 앉기, 열 체크, 문진표 작성 등 방역 지침이 준수된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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