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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박생광, 다시보자...교보아트스페이스 '무속'展

등록 2021.02.24 11:18:48수정 2021.02.24 11:3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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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박생광 '창과 무속', 1982.사진=교보아트스페이스 제공. 2021.2.2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생광 '창과 무속', 1982.사진=교보아트스페이스 제공. 2021.2.24.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일명 '무당 그림'으로 유명한 한국화가 故 박생광(1904~1985)의 '무속(巫俗)' 그림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오방색을 사용한 강렬한 색채와 수묵, 채색을 혼합한 독창적 기법으로 한국 화단에 충격을 불러일으킨 거장으로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있어 의미 있게 재해석 돼야 하는 작가로 꼽힌다. 2019년 대구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바 있다.

박생광의 '무당'(1982)은 23일 열린 서울옥션 경매에서 2억2000만원에 낙찰됐다. 신명 나게 굿을 하는 무당의 모습이 역동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게 그려진 작품이다.
 
[서울=뉴시스] 박생광, 탈, 69x69cm, 수묵채색, 1983. 사진=교보아트스페이스 제공. 2021.2.2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생광, 탈, 69x69cm, 수묵채색, 1983. 사진=교보아트스페이스 제공. 2021.2.24. [email protected]


서울 광화문 교보아트스페이스는 24일부터 박생광의 1980년부터 1985년까지의 대표 작품 10점을 선보인다.  이 시기는 작가가 ‘무속'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던 때다.

작가의 말년에 해당하는 1980년대 초반, 민화, 불화, 무속화 등에서 발견한 전통적 이미지를 화폭에 담았다. 오방색을 사용한 강렬한 색채와 수묵, 채색을 혼합한 독창적 기법으로 한국 화단에 새로운 바람과 충격을 불러일으킨 박생광은 생애 말 걸작을 쏟아내며 한국 채색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속 巫俗’의 사전적 뜻은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적 현상을 일컫는 말’ 이지만, 박생광 작가에게 ‘무속'은 한국적인 것을 정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의 중요한 주제였다.

이번 전시는 ‘무속 巫俗’을 독창적으로 표현한 거장의 작품을 통해 지금의 시대를 되짚어 본다는 의미가 있다.

디지털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무속’ 문화는 자칫 미신으로 터부시되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속’ 문화가 절대적인 운명으로 신봉되기도 한다. 종교적 신념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지난 밤 ‘꿈자리’를 말하고, 심심풀이로 오늘의 운세를 보는 등 무속은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교보아트스페이스는 "전염병 팬데믹 이후 불안감이 커져가는 시점에, 약 40년전 한국적 정체성으로 ‘무속’을 읽어낸 박생광 작가의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한국인의 삶에 스며든 ‘무속’과 지금의 시대를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 기간 중,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관련 영상 콘텐츠도 공식 채널을 통해 소개된다. 전시는 4월26일까지. 관람은 무료.
[서울=뉴시스] 박생광 '무속' 1981. 사진=교보아트스페이스 제공. 2021.2.2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박생광 '무속' 1981. 사진=교보아트스페이스 제공. 2021.2.24. [email protected]

무당 그림, ‘색채의 마술사’로 불렸던 박생광은 누구?

호는 내고 (乃古). 경남 진주 출생으로 ‘색채의 마술사’ ‘민족혼의 화가’로 불린다.

진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주농업학교를 다니던 중 일본으로 가서 일본경도시립회화전문학교(京都市立繪畵專門學校)에서 공부했다.'내고'라는 호는 ‘그대로’라는 뜻으로 화가 본인이 중국 고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고향인 진주로 가서 작품 활동을 했고 1963년 경상남도문화상을 수상했다.

1967년 서울로 올라와 홍익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 출강했다. 1974~77년 일본에 머물다 1977년 귀국과 동시에 진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 크게 명성을 얻었다.

1985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85년 파리 그랑팔레 르 살롱전에 특별 초대되었으며, 같은 해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후두암으로 투병하며 영면하기 직전 화첩에 남긴 글은 그의 민족성 짙은 화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예술은 없다. 모든 민족예술은 그 민족의 전통 위에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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