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100주년]④출가했으나 승려 신분으로 투쟁한 운암 김성숙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해 본다.
【서울=뉴시스】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운암(雲巖) 김성숙(1898~1969)선생은 조선의열단의 '이론가'이자 선전부장으로 의열단 강령을 고쳐쓰고, 조선인들을 의열단원으로 인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또 의열단의 후신으로 평가받는 조선의용대에서도 핵심 요원으로 활동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요직을 역임하면서 좌우 통합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항일독립지사다.
선생은 1908년 철산 유지들이 세운 대한독립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열 세살이 되던 1910년, 국권상실 후 대한독립학교가 폐교되자 당시 반일 분위기에 따라 선생의 아버지는 일본인이 설립한 학교에 아들을 보내지 않았다.
이후 선생은 1916년 독립군에 가담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갔으나 일본 헌병에 구금돼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 길로 경기도 용문사에서 풍곡신원(楓谷信元) 선사를 만나 출가했다.
출가한 선생은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월초(月初) 스님으로부터 성숙(星淑)이란 법명을 받고, 그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인 손병희와 만해 한용운을 만났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승려인 이순재·김석로·강완수 등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일반 대중에게 살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선생은 동료들과 "파리강화회의에서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하였음으로 조선도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의 격문을 조선독립임시사무소 명의로 작성해, 경기도 양주군 진접읍(지금의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와 진벌리 등 부근 민가에 배포했다.
또 봉선사 스님들과 함께 지역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했다. 부평리와 진벌리 일대에서는 1000여 명의 주민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거했다. 1차 시위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됐지만, 재차 항거에 나섰다. 선생은 3·1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1920년 출소해 봉선사로 잠시 되돌아갔으나 곧이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승려 신분으로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조선무산자동맹, 조선노동공제회에 참석하고, 그곳에서 충북 괴산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의 진상을 서울의 본회 및 각 지방의 지회에 알리는 등 적극적인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했다.
1923년 일제경찰의 탄압이 심해지자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에 건너간 선생은 북경 민국대학(民國大學)에 입학해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고려유학생회를 조직해 그 회장으로 일했다.
또 장건상·양명·김봉환·이낙구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을 발간해 사회운동단체의 종파적 분열을 반대하는 운동을 폈으며, 신채호·유우근 등의 추천으로 의열단에 가담해 선전부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1926년이 되자 대부분의 의열단원은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많이 입교했고, 군사간부 만큼이나 이론가·조직가로서의 정치간부도 필요했다. 선생은 국민당의 원조를 얻어 중산대학으로 전학, 북경 시절과 달리 공개적으로 의열단 간부의 신분으로 혁명운동을 펼쳐나갔다.
【서울=뉴시스】조선의용대 성립기념 사진. 조선 의용대는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 등이 일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만든 독립운동부대다. 이후 조선의용대원 일부는 조선의용군으로, 다른 일부는 한국광복군에 합류했다. 2019.06.19. (사진=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email protected]
같은 해 6월에는 조직확대 차원에서 조선혁명청년연맹을 개편하고 기관지 '혁명행동'(革命行動)을 발행했다. 의열단 선전부장으로서, '혁명행동'의 주필로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 갔다.
그해 12월에 열린 의열단 총회에서는 의열단 체제를 '혁명정당'으로 개편하는 논의가 이뤄진다. 의열단 내에서 좌파를 형성하던 선생은 '정치단체로의 전환'이라는 명제를 제기하면서 의열단 조직체제의 개편을 추진했다.
이때 선생은 "이제는 의열단이 지난날처럼 암살과 파괴에만 치중해서는 안 되고 정치 단체로 탈바꿈해 독립투쟁을 이끌 간부들을 훈련해 나가자"고 주장했다.
단원들의 동의를 거쳐 12월 의열단이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을 추진하고, 의열단 체제의 개편과 함께 의열단 강령도 새로 제정하게 된다. 의열단 강령은 선생이 작성한다.
그러면서 선생은 의열활동도 전개한다. 1926년 12월8일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열사를 위해 폭탄 3개와 권총 7정, 실탄 490발을 웨이하이웨이(威海衛)까지 한봉근과 함께 옮기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1927년 중산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광둥인민폭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상해로 돌아와 중국 문화총동맹과 작가연맹 등에 가담해 신문화운동과 반제국동맹의 간부 등으로 활동하면서 19로군의 쑹후(松滬) 항일전쟁에도 가담했다.
1936년 중국 각지의 동지들을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으며, 다음해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동맹·조선민족혁명당 등 3개 단체를 통합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다.
1938년에는 후베이성 한커우(漢口)로 이동해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이 됐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했으며, 이 때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취임했다.
선생은 임시정부에서 외무부의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으로 임시정부의 대열강 외교활동 및 외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기도 했다.
또 임시정부 내에는 새로 대한민국 잠행관제가 실시됨과 함께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설치됐고 총무·편집·발행의 3과가 함께 선전위원회로 설치돼 대한민국에 관한 일체의 선전 사업과 각종 선전 지도를 총괄해 행하도록 했다.
【서울=뉴시스】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은 1945년 광복을 맞아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2진에 포함돼 개인 자격으로 그해 12월 환국했다.
1946년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사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일원이 됐으나 좌우대립의 격화로 의장단을 사퇴하고 여운형과 같이 좌우합작을 지지했다.
1947년 여운형과 같이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뽑혔다. 또 장건상과 행동을 같이 해 당내 우파세력을 형성하고 극좌노선을 배격했으나, 창당 2개월 만에 당수인 여운형이 피살돼 당세가 크게 후퇴했다.
결국 남북협상을 전후해 좌파의 인사들은 월북하고, 이승만 정권에 백안시되던 당을 그해 12월 해체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서울에 남았으며, 1·4후퇴 때 비로소 부산으로 피신했으나 부역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1955년 조봉암·서상일 등 혁신계의 지도급 인사들과 접촉해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에 관계했으며, 이로 인해 이른바 근로인민당재건사건과 진보당사건으로 큰 탄압을 받았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사회대중당을 창당하고 총무위원이 됐으며, 다음해 통일사회당으로 통합되자 정치위원이 됐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이른바 통일사회당사건으로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66년 재야통합야당인 신민당 창당에 참여해 운영위원을 거쳐 지도위원이 됐다.
1969년 4월12일 서거했으며, 장례는 사회장으로 거행됐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장곡리에 있다가 2004년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으로 이장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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