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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셰익스피어, 누가 고리타분하다 하는가…연극 '겨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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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6-01-11 09:56:00  |  수정 2016-12-28 16: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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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올해 400주기를 맞은 영국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여전히 젊고 현대적이었다. 국립극단이 헝가리 연출가 로버트 알폴디(49)와 손잡고 선보인 셰익스피어의 후기 로맨스극 '겨울 이야기'(10일 개막)가 증명한 사실이다.

 러닝타임 150분(인터미션 15분)이 '겨울이야기' 속에서 16년을 훌쩍 뛰어넘은 것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내내 웃음과 환호가 터졌다. 자연스런 용서와 화해로 귀결되는 마지막에는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알폴디의 '겨울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종합선물세트다. '오셀로'의 비극, '로미오와줄리엣'의 애절한 사랑, '한여름밤의 꿈'의 로맨스 판타지가 모두 녹아들어갔다. 그의 후기작답게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알폴디는 이 여유로움에 유머와 속도감, 무대 미학을 더하며 셰익스피어가 현재에 통용되는 재미로 넘치는 작품이라는 걸 상기시킨다.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긴장과 이완을 오가는 부분에서는 현악 위주의 편성을 쓰고, 밝은 부분에서 랩과 모던 팝을 도입한 것도 이런 점을 부각한다.   

 1막에서는 '오셀로' 속 오셀로의 질투 화염이 옮겨온 듯 인물들의 감정히 활활 타올랐다. 시칠리아의 왕 레온테스는 왕비 헤르미오네가 자신의 친구이자 이웃나라 보헤미아의 왕인 폴릭세네스와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한다. 한순간 광기로 휩쓸린 그에게 아내는 물론 충언을 하는 충신도 소용 없다. 아내의 잘못을 까발려주리라 믿었던 신탁(神託)의 판단마저 그녀가 죄없음을 이야기하나 역시 부질 없다.  

 아들은 소동에 놀라 세상과 작별하고 헤르미오네를 감옥에 가둔다. 그녀가 낳은 자신의 자식이지만 폴리세네스의 아이로 착각한 딸을 영토 바깥에 버리도록 명령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헤르미오네마저 죽음을 맞이한다.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후회의 나날을 보낸다.

 2막은 16년을 뛰어넘어 보헤미아 땅에 버려진 레온테스의 딸 '페르디타'가 아름다운 숙녀로 자라난 뒤 이야기다. 페르디타는 폴릭세네스의 아들 플로리젤가 사랑에 빠진다. 페르디타가 비천한 양치기의 딸로만 알고 있는 폴리세네스는 그의 사랑을 결사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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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가 1588년 영국의 인기 작가 로버트 그린의 '판도스토–시간의 승리'를 희곡으로 각색했다.

 원작은 긴 시간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던 주인공 판도스토가 다시 만난 자신의 딸과 사랑에 빠지고, 죄책감으로 죽음을 맞는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플로리젤과 페르디타가 극적으로 맺어지는 전후로 화해와 용서를 통해 이야기를 행복하게 마무리한다.  

 폴릭세네스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바뀐 이유를 묻자 충신 카밀로가 "저는 용기 있게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등 원작의 은유와 운율로 넘치는 대사는 그대로 따왔다. 다만 말투를 현대적으로 풀고, 앙상블 배우들의 엇박자 리액션의 리듬을 블랙 유머처럼 푸는 부분에서는 참 현대적이다. 레온테스의 광기와 격정이 절정으로 치닫는 분위기에서도 배우들이 갓난아이를 보고 기쁨에 차 어쩔줄 모르는 부분을 삽입한 것이 예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셰익스피어 작품이 대중성을 갖췄던 걸 떠오르게 하는 묘수다.

 알폴디가 또 놀라운 것은, 처음 작업하는 한국 배우들의 매력을 단번에 끄집어 낸 점이다. 손상규는 젊은 창작 연극그룹 '양손프로젝트'의 진지하면서도 블랙유머가 일품인 연기가 몸에 밴 배우인데 초반 비극의 주인공인 레온테스가 인간적으로 보이는데 최적화된 눈빛과 말투, 행동을 선보인다.

 카리스마에 살짝 놀아들어간 '허당'을 기막히게 선보이기로 유명한 박완규도 완벽할 것 같지만, 아들 일 앞에서는 빈틈을 보이는 폴릭세네스의 매력을 한껏 드러낸다.

 지난해 최대 화제작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자식을 살리기 위해 목을 매 자결한 단호한 공주의 모습을 보여준 우정원은 남편의 의심에도 꿋꿋하게 결백을 주장하며 자식에 대한 기다림의 사랑을 보여주는 왕비 헤르미오네를 맡아 또 다른 모성을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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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기적의 설계자인 파울리나 역의 김수진과 두 나라의 왕에게 모두 사랑받는 카밀로 역의 이종무의 연기는 정갈하며, 뜻하지 않게 화해의 다리를 놓아주는 좀도둑 아우톨리쿠스의 정현철은 익살스럽다.

 극에서 물이 가진 여러 속성을 중요한 이미지로 사용한다는 점도 눈여결 볼만하다. 세 가지 부분으로 압축되는데, 초반 레온테스가 광기에 미칠 때 무대 한가운데 천장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물은 음습함의 시작이다. 그 다음 물은 포용의 상징으로 작용한다. 죽은 줄 알았던 헤르미오네의 소생으로 작품이 절정에 이를 때 레온테스가 높이 2m 수조의 벽을 망치로 뚫고 물이 무대 위로 터져나오는 순간, 그의 마음의 벽은 물꼬가 터지고 모든 앙금은 떠내려간다.

 마지막 물은 인물들이 서로 서로 품는 기제다. 천장에서 커다란 샤워기의 머리 부분을 닮은 장치의 둥근 둘레 가에서 물이 밑으로 둥글게 쏟아져 나온다. 그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끌어안고 비를 피한다. 원작에서는 레오테스가 좀 더 화해에 대한 직접적인 말을 쏟아내는데 아무런 말 없이 이 장면을 보여주는 알폴디 식 연출은 좀 더 여운을 안긴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보는 내내 마음에 품었던 현실이 과하지 않게 눈앞에서 펼쳐지는 순간 눈물이 자연스럽게 또르르 흐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올해 400주기를 맞아 셰익스피어 작품이 쏟아진다. 국립극단과 알폴디가 한국에서 드물게 공연되는 '겨울이야기'로 좋은 출발을 알렸다. 5년 간 헝가리 국립극장 예술감독으로 재직하며 당시 가장 인기 없던 극단을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곳으로 탈바꿈시킨 명성도 확인했다. 수트를 입은 모던한 무대의 셰익스피어 무대는 많지만, 여기에 억지스럽지 않은 웃음과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녹여낸 무대는 드물다. 입소문이 나면 한국의 젊은 관객들도 동하겠다.

 24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양치기 노인 박윤희, 양치기 아들 유영욱, 안티고누스 김도완, 플로리젤 김동훈, 페르디타 신사랑. 예술감독 김윤철, 번역·통역 우르반 알렉산드라 에스테르, 윤색 이경후, 무대 박동우, 조명 김창기. 2만~5만원, 국립극단.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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