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서울 15℃
[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⑩새 단장 박지원·황진이 묘 부근 문종묘도 '깔끔'
10. 고려의 찬란한 문화황금기 연 문종(文宗)의 경릉(景陵) 개성 남대문 앞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가면 고려 도성을 둘러싼 개성성의 옛 숭인문(동대문) 자리가 나온다. 여기서 계속 동쪽의 장풍군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라 2km 쯤 가면 북쪽으로 ‘황토고개’라 불리는 언덕이 나오고, 이 언덕 아래에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⑨북, 2016년 고려 덕종·정종 능 발굴 발표
9. 덕종(고려 9대 왕)과 정종(고려 10대 왕)의 무덤인 숙릉(肅陵)과 주릉(周陵) 2016년 북한 고고학계는 개성시 해선리 북쪽에 있는 ‘해선리 1릉’과 ‘해선리 2릉’을 발굴하고, 이 무덤이 각각 고려 9대 덕종(德宗)과 10대 정종(靖宗)의 무덤이라고 발표했다. 덕종의 능호는 숙릉(肅陵)이고, 정종의 능호는 주릉(周陵)인데, 『고려사』와
[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⑧수차례 도굴 ‘선릉’은 현종의 무덤일까
8회 ‘사생아’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현종의 선릉(宣陵) 송악산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내려 온 작은 봉우리가 만수산(萬壽山)이다.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에 등장하는 산이다. 훗날 조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은 세를 규합하며 정몽주에게 ‘하여가’를 통해 자신의 의중을 드러낸다. 조선 건국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
[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⑦사촌사이 5대 경종·6대 성종 능도 인접
7회 – 부자간 선위(禪位) 못한 고려 6대 경종의 영릉(榮陵)과 6대 성종의 강릉(康陵) 2003년 2월 23일 11시쯤, 개성 시내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흐르는 사천강과 평양-개성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버스가 도착했다. 판문까지는 4km가 채 안 되는 곳이다. 서쪽으로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진봉산(310m)이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
[사진으로 보는 고려왕릉] ⑥광종이 묻힌 헌릉, 원형 사라져 초라
6회. 왕권 강화에 성공한 광종이 묻힌 헌릉(憲陵) 개성 시내를 빠져나와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를 타고 10km쯤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빠져나와 2km 정도 더 가면 왼쪽으로 낮은 산줄기가 나온다. 이곳에 고려 4대 광종(光宗)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직할시 삼거리동이다. 광종은 925년(태조 8) 태조 왕건의 아들로 태어
[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⑤'닮은 꼴' 조선·고려 정종, 왕릉 보존상태는 판이
5회. 서경(西京) 천도 시도하다 좌절한 정종의 무덤 안릉(安陵) 혜종이 945년 사망하자 그해 9월에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이자 혜종의 이복동생인 왕요(王堯)가 왕위에 올랐다. 고려 3대 임금 정종(定宗)이다. 그러나 그는 949년 재위 4년만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종은 동생 왕소(王昭)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④ 2019년 마침내 혜종의 무덤을 찾다
4회. 두 이복동생에게 밀려 단명한 고려 2대 혜종의 무덤 순릉(順陵) 순릉(順陵)은 고려 2대 군주인 혜종((惠宗·914∼945)과 의화왕후의 합장묘다. 고려사(高麗史) 945년(혜종 2년) 음력 9월 15일자 기록에는 “(혜종이) 9월 중광전(重光殿)에서 승하하자 송악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를 순릉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
[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③고려 왕건이 잠든 무덤에 들어가다
3회 – 조선과 북녘에서 ‘특별대우’ 받은 고려 태조 현릉(顯陵) 2003년 2월 23일 3시경, 1994년 북한이 대대적으로 개건해 새로 조성한 왕건의 무덤인 현릉(顯陵)에 도착했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고려 궁궐(만월대) 서쪽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 남쪽 기슭에 있다. 현릉은 태조 왕건이 죽은 943년 5월에 만들어졌으며, 첫째 왕후인 신
[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②풍수따라 초기 4대왕릉 동서남북 고루 배치
고려는 태조 왕건부터 왕권 강화로 고려의 기틀을 마련한 4대 광종(光宗)까지 초기 4대왕 중 태조는 서쪽에, 혜종은 동쪽에, 정종은 남쪽에, 광종은 북쪽에 분산해 안장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배치라고 판단된다. 사방에 초기 왕릉을 각각 배치해 그들을 신격화하는 동시에 도성을 보호하려는 풍수적 관념이 적용된 것이다. 고려시대는
北 개성 고려왕릉 40여기 능주도 모른다
1. 연재를 시작하며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