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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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⑳연안파 입국 후 신민당 창당 독자 세력화
20. 연안파와 소련파 사람들 해방 직전 중국 옌안(延安)에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활동하고 있었다. 1938년 김원봉(金元鳳) 주도로 조직된 조선의용대가 충칭(中京) 임시정부와 합작을 선언하자 여기서 이탈해 옌안에서 독자적인 정치, 군사조직을 만든 것이다. 해방되자 이들은 9월 초 근거지인 옌안 나가평(羅家坪)을 출발해 11월에 선양(
[광복 75주년] ⑲ '내우외환' 조선공산당 돌파구로 총파업 단행
19. 간판 내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일제강점기 때 현재 조선호텔이 있는 소공동일대는 ‘하세가와쵸(長谷川町)’라고 불렸다. 제2대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長谷川)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곳에 근택빌딩(조선호텔 앞)이 있었다. 1945년 11월 23일 이 빌딩에 조선공산당 본부 간판이 정식으로 내걸렸다. 1925년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이란 이
[광복 75주년] ⑱남쪽은 대학 통합, 북쪽은 대학 신설 나서
18. 국립서울대학교와 북조선김일성대학 개교 때로는 한 장의 빛바랜 사진이 당시의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1946년 7월 3일 경성대학 이공학부(理工學部) 제1회 졸업식 사진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SCIENCE AND ENGINEERING’이라고 적은 건물 앞에서 찍은 졸업식 사진 속에는 총 69명의 인사가 모여 정면의 카메라를 응시하
[광복 75주년] ⑰소년단도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한 몫
17. 대한소년단과 조선소년단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중앙청) 앞 광장에서 해방 1주년을 기념해 ‘8·15 평화 및 해방1주년시민경축대회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당시 신문들은 미군정 간부들과 각계 인사, 5만 명의 행렬대, 약 30만 명의 일반 관람자가 참가했다고 보도했다. 이 행사의 맨 앞줄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자리 잡았다.
[광복 75주년] ⑯남과 북, 문맹퇴치 운동 나서다
16. 남과 북의 문맹 퇴치 운동과 외국어 교육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문맹(文盲)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인은 ‘까막눈’이라고 불렸다. 1920년대 신문 기사를 보면 “고상한 학문과 해박한 지식은 그만두고라도 조선 글로 편지 한 장 쓰지 못하고 심지어 상점 간판과 정거장 이름 하나 몰라보는 사람이 열의 아홉”이라고 표현할 정도였
[광복 75주년] ⑮남과 북, 해방 이듬해 첫 입법기관 선거
15. 다른 방식으로 실시된 남과 북의 입법기관 선거 격동의 1946년이 끝나가는 12월 12일 정오, 중앙청 제1 회의실에서 미군정의 주요 간부와 57명의 입법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이 거행됐다. 의장으로 선출된 김규식(金奎植)은 개회사에서 입법의원의 사명에 대해 빠른 기간 내에 남북이 통일한 총선거 식으로 확대된 입법의원
[광복 75주년] ⑭동상이몽 좌우합작운동 비극적 종언
14. 서로 다른 의도로 추진된 좌우합작 운동 1946년 5월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정국은 다시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통일임시정부 수립이 무산되고 남북이 분단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해졌다. 좌우 정치 세력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중도 우파를 대표하는 김규식(金奎植)과 중도 좌파를 대표하는 여운형(呂運亨)이
[광복 75주년] ⑬1946년 콜레라가 한반도를 덮치다
13. 해방과 함께 찾아온 전염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국의 모든 학교는 휴교 상태였다. ‘스페인 독감’이 원인이었다. 1918년 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변종이 생겨 9월 이후 전 세계에서 사망자가 3000만 명 넘게 나왔다. 사망자의 70% 이상이 25~35세 사이의 젊은 층이었다. 스페인 독감은 중세의 흑사
[광복 75주년] ⑫남북·좌우 갈려 3.1절 기념식 세곳서 열려
12. 좌우, 남북 분열로 세 곳에서 열린 삼일절과 해방 1주년 기념식 1945년 해방과 함께 한반도에는 정치의 계절이 도래했다. 연합국을 반대하는 시위와 집회는 제한이 가해졌지만, 일제강점기 때 억눌렸던 자유와 자주적 국가건설을 위한 희망이 각종 집회를 통해 분출됐다.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의연금 모집부터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정치집회까지 성격도
[광복 75주년] ⑪1946년 북한, '토지개혁' 격변이 시작되다
11. 북한, 토지개혁 시작으로 급격한 사회개혁 단행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 이 구호는 1946월 3월, 38선 이북 지역을 환희와 분노로 들끓게 했다. 토지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도 무상몰수(無償沒收), 무상분배(無償分配) 방식이었다. 하루아침에 토지를 공짜로 분배받은 대다수 농민은 ‘황홀한 심정’이었지만 졸지에 토지를 빼앗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