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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RM '인디고' ①] 인간 김남준의 목적…더 나은 어른 위한 '아카이브'

"그러려면 욕심을 다 버리고, 모든 욕심을 다 버려야 해. 천진무구한 세계로 들어가야지.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렇게 안 되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은 해야지. 그게 인간의 목적이거든."(RM '윤(Yun)'에 삽입된 윤형근 화백 육성(肉聲) 내레이션 중(中)) 예술가의 천진무구한 성품(性品)에서 '영원불변한 예술'이 만들어진다. '한국 단색화의 거목(巨木)'이라 불리는 고(故) 윤형근(1928~2007) 화백의 가치관을 요약하면 이렇다. 글로벌 슈퍼 그룹 '방탄소년단'(BTS) 멤버 RM(28·김남준)이 지난 2일 발매한 솔로 정규 1집 '인디고(Indigo)'는 윤 화백에 대한 헌사이자 그가 가고자 했던 길을 따라가려는 RM의 다짐이다. "그는 말했지 늘, 먼저 사람이 돼라 / 예술 할 생각 말고 놀아 느껴 희로애락"('윤' 중)을 지향점으로 삼은 이유다. "나는 인간이 되고 싶다(I wanna be a human)'고 노래하는 까닭이다. 특히 이번 음반은 RM이 그간 해온 말과 걸어온 행보가 퍼즐처럼 맞춰지며, 그가 애정을 보낸 것들에 대한 진심을 더 톺아보게 만든다. 지난한 근현대사를 뚫고 온 한국 예술가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거 같다"(RM, 미국 뉴욕 타임스(NYT)와 인터뷰 중)던 그는 한 "시커멓게 탄 심장 / 재를 뿌린 그 위에 시를 쓰네 / 사선을 오갔던 생과 / 당신이 마침내 이 땅에 남긴 것들에게 / 나 역시 그저 좀 더 나은 어른이길"('윤')이라고 바란다. 개인 작업실 '알카이브(Rkive)'(RM+아카이브(archive))(인스타그램 계정도 같은 이름)에서 자신이 보고 읽고 느끼고 생각해온 것들을 아카이빙해온 RM은 첫 공식 음반인 이번 앨범을 통해 음악적으로도 아카이빙을 한다. 윤 화백의 성에서 제목을 따온 '윤'을 이번 음반의 첫 트랙으로 삼은 RM은 앞서 빅히트뮤직을 통해 공개한 영상에서 "음악도 그림처럼 사람이 하는 것이라 어떤 삶, 어떤 사유, 어떤 서사,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노래가 좋다' '음악이 좋다'는 것보다 결국 그 노래를 쓰고 부른 사람이 더 중요한 거죠. '인디고'는 그런 저의 의지·사유가 담긴 산물"이라는 얘기다. 윤 화백의 화풍은 표백 처리를 하지 않은 천·마포 등의 위에 물감이 자연스럽게 번지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추사 김정희 등 서화를 고매한 인격의 자연스러운 발현으로 여겼던 옛 선비정신과도 맞물린다는 평을 들었다. 윤 화백의 작품 '청색'을 앨범 커버 속 벽에 걸어 놓은 RM은 이러한 선비 정신을 잇고자 한다.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하는 미국 네오 솔(Soul)의 여왕 에리카 바두(Erykah Badu)가 참여한 점도 그렇다. 앨범 제목을 '인디고'로 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디고'는 청춘을 상징하는 쪽빛, 남색을 뜻한다. 주로 청바지에서 많이 드러나는 색인데 자연스러움이 특징이다. 이전 '모노.'가 가진 흑백과 대조되는 느낌이다. 우리나라 나이로 20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RM은 "저의 모든 음악이 제 솔직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으려고 노력한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이지만, 이번 앨범은 특히 더 김남준 다운 앨범이에요. 또 다른 시작점"이라고 했다. 조혜림 플로 콘텐츠 기획 매니저(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는 "윤형근 화백의 목소리로 시작되는 RM의 '인디고'는 수묵화의 농담에서 색이 번져가는 듯, 수많은 종이 섞인 들꽃처럼 정형화되지 않은 새로운 구성을 보여준다. RM이 존경하는 윤형근 화백은 '작품은 그 사람의 흔적이자 분신'이라 말했다"고 짚었다. RM은 지난 2015년 첫 믹스테이프 'RM', 2018년 두 번째 믹스테이프 '모노.'를 발매했다. 사운드 클라우드에 먼저 공개한 이전 곡들과 달리 정식으로 앨범을 발매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인디고'를 처음 구상한 건 2019년. RM이 그림에 빠지기 시작한 직후다. 그는 방탄소년단 월드 투어 도중인 2018년 미국 시카고미술관에서 리처드 세라·모네·피카소 등 거장들의 작품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 그 후 한국 화가들에 대해 공부했고, 직접 미술관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사실 방탄소년단 래퍼 라인인 RM의 이번 음반은 힙합 색깔이 강하게 묻어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RM은 방탄소년단으로 데뷔하기 전 언더그라운드 힙합 크루 '대남협'(대남조선힙합협동조합)에 속해 있었다. 방탄소년단도 출발은 힙합 아이돌 그룹이었다. 그런데 RM은 자신이 작사·작곡에 참여한 10개 트랙이 실린 이번 음반에서 네오 솔, 힙합, 일렉트로닉, 포크 등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을 아우르는 동시에 국내외 메인·인디스트림을 가로지르는 다양성의 라인업을 완성했다. 인디고라는 색에 대해 저마다 남색, 파랑이라고 생각하는 게 다를 것이라며 이 앨범도 각자 색채의 '그러데이션(gradation)'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RM은 기대했다. '인디고'의 타이틀곡 '들꽃놀이'엔 '낭만고양이'로 유명한 밴드 '체리필터'의 보컬 조유진이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화려하지만 금세 사라져 버리는 '불꽃'이 아닌, 잔잔한 '들꽃'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RM의 바람이 담긴 곡이다. 방탄소년단과 꾸준히 작업해온 '서태지 밴드'의 닥스킴(DOCSKIM)이 프로듀서로 참여해 곡의 멋을 살렸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는 "이번 앨범 수록곡 중 방탄소년단이 해온 음악의 연장선상에 가장 가까운 팝"이라고 들었다. 뮤직비디오는 하늘의 불꽃, 들판의 들꽃 그리고 화려한 공연장의 장면들을 오가며 시네마틱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미국 R&B 솔 듀오 '실크 소닉' 멤버인 앤더슨 팩(Anderson .Paak)이 함께 한 '스틸 라이프(Still Life)'의 제목은 '정물'이란 뜻.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RM은 이 단어에서 '아직도 삶'이라는 의미를 읽었다. 그리고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라는 중의적인 해석을 더했다. 3번 트랙 '올 데이(All Day)'는 RM이 어릴 때부터 '히어로'로 여겨온 힙합그룹 '에픽하이' 멤버 타블로가 힘을 보탰다. 인디 싱어송라이터 김사월이 피처링한 '건망증'은 포크. 이번 앨범 수록곡 중 RM이 가장 먼저 작업했는데 어쿠스틱 기타, 휘파람 그리고 작업실에 있는 책상을 두드리고 청바지를 비비며 또 장난감을 치는 등 언플러그드 소리로만 녹음했다. 영국 싱어송라이터 마할리아(Mahalia)와 한국계 캐나다인 R&B 힙합 뮤지션 폴 블랑코(Paul Blanco)가 함께 한 '클로저(Closer)'의 프로듀싱은 영국 일렉트로닉 듀오 '혼네(HONNE)'가 맡았다. 혼네는 '모노.' 수록곡 '서울(seoul)'에서 호흡을 맞춘 팀이다. 우리가 항상 안고 다니는 스마트폰 너머의 생각과 감정들을 담았다. 밴드 '못'의 리더이자 듀오 '나이트 오프' 멤버인 싱어송라이터 이이언(eAeon)이 함께 한 '체인지(Change) pt.2',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팝 트랙인 '론리(Lonely)', RM과 절친한 싱어송라이터 콜드(Colde)가 힘을 보탠 RM표 시티팝인 '헥틱(Hectic)'도 실렸다. 마지막 트랙은 싱어송라이터 박지윤이 함께 한 '넘버 투(No.2)'다. 과거를 돌아보지 말자고 노래한 곡인데 RM은 그리스 신화의 음유시인으로, 뒤돌아보지 말라는 하데스의 명을 어겨 아내를 영원히 잃고 마는 오르페우스에 비유해 곡을 설명했다. 이 밖에도 이번 앨범엔 빅히트 뮤직 프로듀서 피독(Pdogg), 기타리스트 겸 싱어송라이터 은희영(john eun) 등 RM과 꾸준히 호흡을 맞춰온 이들이 힘을 실었다. 앨범에 실린 곡들은 RM이 어릴 때부터 무슨 음악을 들어왔고, 지금 어떤 이들과 음악·삶을 공유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제의 일을 자꾸 잊어요 / 나 오늘도 잘 모르는데 / 어제의 나를 자꾸 잊어요 / 나 고작 스물여섯인데 / 왜 기억하질 못하냐 해요"('건망증')라고 RM은 노래하는데 그 잊혀진 기억들은 수묵화처럼, 음악에 자연스레 물들어 있다. 그래서 음악적인 것뿐만 아니라 삶의 자장(磁場)까지 느껴진다는 게 이번 음반의 탁월한 점이다. 이를 들은 아미 그리고 청자들은 어릴 적 RM처럼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자신의 삶을 함께 플레이해 나갈 것이다. RM은 "이 곡으로 엄청난 메시지를 전한다는 생각은 안 해요. 제가 어린 시절에 함께한 분들의 노래처럼, 그냥 한 곡쯤은 '당신의 취향'에 맞는 곡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면서 "책갈피에 끼워 놓고 한 번씩 꺼내 보는 은행나무잎처럼 한 번씩 플레이리스트에 있게 되는 곡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소소한 바람'을 가져 본다"고 말했다. 김도헌 평론가는 "에리카 바두, 앤더스 팩, 조유진 등 참여한 뮤지션의 면면이 화려하고 폭이 넓어 음악가로서 흔들릴 수 있는 여지도 있었는데 RM 씨가 자신만의 색깔을 잘 표현해냈다"면서 "황량한 느낌과 동시에 젊은이의 생기가 느껴지는 등 다양하게 고민하는 지점들이 묻어나는 작법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고 했다. 조혜림 매니저도 "이십 대를 마무리하는 RM은 엽렵하게 다양한 장르들을 물들여가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며 음악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과 핍진함을 보여준다"면서 "새로운 변곡점 앞에서 스스로를 채근하지 않고 예술을 향한 진심을 투영하여 장르와 경계를 허문 그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계속해서 삶을 나아갈 것이 분명하다"고 봤다. RM의 솔로 앨범 자체도 다른 아이돌 솔로 앨범 색깔과 다르지만, 관련 활동도 타 아이돌과 차별화된다. 그는 5일 서울 내 200석짜리 공연장에서 소극장 콘서트를 연다. 관객은 추첨을 통해 뽑았고, 장소는 이들에게만 공지한다. 지난 2일 공개된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NPR 뮤직의 인기 프로그램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Tiny Desk Concert)' 공연 영상에선 밴드와 라이브를 들려줬다. 김도헌 평론가는 "RM 씨의 행보는 이번에 함께 한 아티스트들을 보면 답이 나온다. 타블로, 김사월, 박지윤, 이이언 등은 세월이 흘러도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팬들과 소통해온 뮤지션들"이라면서 "이미 방탄소년단 멤버로서 아이돌로는 최고의 활약을 펼친 만큼, 동경해온 아티스트들의 길을 하나씩 걸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이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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