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기획특집

[최초로 본 한국영화 100년] ①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 원형 추적기

배우 김도산 연출 신파극 '의리적 구토'에 삽입 상영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서 연쇄극 형태로 개봉 조선인 감독이 연출·조선인 배우가 연기 필름 유실로 원형에 대한 추측만 무성 권선징악적 주제, 식민지 치하 민중들 가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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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개관한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묘동 단성사 영화역사관에서 열린 개관식에서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사업회 공동위원장인 이장호(오른쪽) 감독 등 참석자들이 역사관을 둘러보고 있다. 단성사는 1907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이다. 한국인이 제작한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를 상영한 곳이기도 하다. 2016년 영안모자 계열사인 자일개발이 인수해 이름을 단성골드빌딩으로 바꿨다. 지하 공간에 1개 상영관과 영화역사관을 조성, 학생들의 교육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2019.10.23.chocrystal@newsis.com

※ 뉴시스는 2019년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아 [최초로 본 한국영화 100년]을 특별기획했다.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의 원형 추적기를 시작으로 △ 최초의 영화스타 변사 △ 최초의 총천연색 영화 △ 최초의 국제영화제 수상작 등 최초의 기록들을 심도 있게 추적해 한국영화 100년사를 실감있게 재구성할 것이다.

【서울=뉴시스】남정현 기자 = 오는 10월27일은 1919년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상연된지 딱 100년 되는 날이다. 한국영화 100주년의 기점이 된 영화지만 영화를 본 사람은 없다. 아니, 생존해 있지 않다.

"'의리적 구토'는 한국 최초의 영화지만 필름 원본도 없을 뿐더러 이 영화를 본 사람도 현재 없다. 내용과 줄거리만으로는 재연이 어려워 퍼포먼스를 보여줄 예정이다."(이장호 한국영화100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그래서 더 보고 싶은 '의리적 구토'는 신극좌 김도산의 연쇄극이다. 연쇄극은 '키노드라마'(kino drama)라고도 불리며, 당시 한국에서는 '활동사진'이라고 불렸다. 무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야외장면이나 활극 장면을 영화로 찍어 연극 중 무대 위 스크린에 삽입한 형식을 말한다. 연극이 기존의 예술을 종합한 종합예술이라면 연쇄극은 새로운 매체인 영화까지 무대에 도입한 새로운 종합예술(총체예술)로서 확대연극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연쇄극으로 제작되기 앞서 당시 유명 극장이었던 우미관에서 신파극으로 공연됐다. 신파극은 일본에서 처음 발생한 연극의 한 사조로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서도 활발히 공연됐다. 가부키와 구분하기 위해 '신파'로 명명됐고, 상투적이며 과장된 연기를 신파라고 불렀다. 1919년 7월4일부터 7월12일까지 신파극으로 절찬리에 공연됐다. 그러던 중 단성사 전속 변사였던 김덕경이 일본 세토나이카이극단의 연쇄극에서 영감을 얻어 김도산에게 연쇄극으로 바꾸어 보도록 권유했다.

◇ 단성사 사주 박승필, 신문 통해 대대적 홍보
1919년 10월8일, 매일신보에 기사 하나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단성사주 박승필이 오륙천원의 많은 돈을 들여서 우리 조선에서는 처음 되는 활동사진 연쇄극을 영사한다. 처음 박을 것은 '의리적 구토'라는 각본을 박을 것인데 장소는 명월관 지점, 청량리 홍릉 부근, 장충단, 한강철교 등이더라."

'의리적 구토'의 촬영 장소는 명월관, 한강 철교, 장충단, 홍릉 등지였으며, 모두 연극 무대로는 만들 수 없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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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남정현 기자='의리적 구토' 매일신보 기사 (사진=한국영상자료원) 2019.10.24 nam_jh@newsis.com
12일 뒤인 10월20일에 '의리적 구토'의 광고 기사가 다시 실렸다. 단성사 사주 박승필의 광고였다. 김덕경의 권유를 받은 김도산은 단성사 사주 박승필과 상의하는데, 박승필은 영화에 관심이 있어 이미 단성사를 영화 상영에 불편함이 없도록 개수까지 마쳐 놓은 상태였다. 박승필은 김도산의 제의에 5000원을 투자했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조선의 활동 연쇄극이 없어서 항상 유감히 역이던 바 한번 신파 활동사진을 경성의 제일 좋은 명승지에서 박혀 흥행할 작정으로 본인이 5천원의 거액을 내어 본월 상순부터 경선 내 좋은 곳에서 촬영하고 오는 27일부터 본 단성사에서 봉절개관을 하고 대대적으로 상장하오니 우리 애활가 제씨는 한번 보실 만한 것이올시다."

매일신보는 10월26일에 '조선활극 촬영 단성사에서 영사한다'라는 기사를 또 다시 낸다.

"근래 활동사진이 조선에 많이 나와 애극가의 환영을 비상히 받어오나 첫째, 오날날까지 조선인 배우의 활동사진은 아주 없어서 유감 중에 그를 경영코져하나 돈이 많이 드는 까닭에 엄두를 내지 못하던 바 이번 단성사주 박승필씨가 오쳔여원의 거액을 내여 신파 신극좌김도산 일행을 다리고 경성 내외의 경치 좋은 장소를 따라가며 다리와 물이며 기차 전차 자동차까지 이용하여 연극을 한 것을 처처히 박인 것. 이 네 가지나 되는 예제인바 그외 경성 전시가의 경치를 박여 실사를 한다"

"촬영장소
한강철교, 장충단, 청량리, 영미교, 남대문 정차장, 독도(뚝섬), 전곶
교(살곶교), 전차, 기차, 자동차, 노량진, 공원,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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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남정현 기자=1934년 당시 단성사 모습 (사진=영안모자 제공) 2019.10.24 nam_jh@newsis.com
신문 내용을 정리하자면, '의리적 구토'는 조선인 배우가 출연하는 최초의 활동사진(연쇄극)인데 경성 내외의 경치 좋은 장소를 기차 전차 자동차까지 이용해 실사화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은 선명하고 미려할뿐더러 서양 사진에 뒤지지 않을 만하다는 단평까지 언급하면서 촬영 장소까지 소개했다.

◇ 단성사, '의리적 구토'로 날아 올라
1907년 문을 연 단성사가 회생의 기운을 얻은 때는 1918년. 광무대의 소리꾼이자 당대의 '흥행사'였던 박승필이 단성사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곧장 수하에 있던 사람을 일본에 보내 촬영술을 배우게 하고 영사기를 들여온다. 이후 김도산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만들게 된다.

박승필이 일본으로 보내 촬영술을 공부하게 한 직원은 조선 최초의 촬영기사가 되는 이필우다. 그가 귀국할 때 들여온 촬영기자재는 '의리적 구토'에 투입됐으며, 김도산 또한 영사기를 구입하기 위해 오사카로 건너갔을 때 2주간 영사 기술을 익혔다.

연쇄극 '의리적 구토'에는 약 1000피트의 필름이 삽입돼 연극 중간에 상영됐다. 각본과 연출은 김도산이 맡았다. 다만 기술적 숙련도을 요구하는 촬영과 편집 부문은 일본인 미야카와 하야노스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단성사와 영화공급 계약을 체결했던 일본 영화사 덴카츠에 소속된 촬영기사였다.

영화에는 김도산을 포함해 윤혁, 이경환, 김영덕이 출연했다. 김영덕은 여장남자로 '계모'를 연기하는데, 이는 당시 일반적인 일이었다. 한국영화사에서 최초의 여배우는 '월하의 맹서'(1923)에 출연한 이월화다.

요금은 특등석 1원 50전, 1등석 1원, 2등석 60전, 3등석 40전이었으며, 군인과 학생은 반액이었다. 당시 일반적인 관람료보다 매우 비싼 가격이었지만, 1개월 장기 공연을 할 만큼 흥행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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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남정현 기자='의리적 구토'를 연출한 배우 겸 감독 김도산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2019.10.24 nam_jh@newsis.com
관객들은 경성 시내 장면이 나오는 첫 장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등 반응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미국, 프랑스, 일본 영화가 극장가를 지배하다시피한 상황에서 최초의 한국 영화를 접한 관객들의 마음은 감개무량 그 자체였다.

'의리적 구토'는 조선인 배우가 등장하는 조선의 영화라는 사실만으로 큰 화제가 됐고 그만큼 대성공을 거뒀다. 이에 고무된 박승필은 단성사 안에 촬영 전담 부서를 세웠고, 김도산의 차기작들인 '시우정'(1919), '형사고심'(1919), '의적'(1920) 등 연쇄극 작품의 제작을 잇달아 지원하며 초기 형태의 영화 제작 시스템을 확립한다.

바야흐로 엄연한 극의 형태를 갖춘 최초의 조선 영화의 탄생이었다. 민족 자본 주도의 영화 제작 시스템이 형성됐다는 점에서 '의리적 구토'가 첫 선을 보인 1919년 10월27일(영화의 날)이 한국영화사의 원년이 된 것이다.

◇ 조선 민중들, 영화 보며 일제 항거 의지 불태워
한국영상자료원은 이 작품의 영문명을 'Fight for Justice'로 해석한다. 요즘 말로 풀면 '정의를 위한 싸움' 정도가 된다.

영화는 간악한 '계모'(김영덕) 밑에서 오로지 가문의 체통을 위하여 갖은 수모를 참아오던 '송산/마쓰야마'(김도산)의 이야기를 그린다. 마침내 계모 일파의 흉계가 아버지의 재산을 가로채고 가문을 더럽힐 지경에 이르자, 의형제인 '죽산/다케야마'(이경환)와 '매초/우메쿠사'(윤혁)와 더불어 응보의 칼을 뽑는다는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전한다.

"송산은 본시 부유한 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모친을 잃고 계모 슬하에서 불우하게 자라난 몸이었다. 집안이 워낙 부유하고 보니, 재산을 탐내는 계모의 간계로 말미암아 가정에는 항상 재산을 둘러싼 알력이 있었다. '송산'은 이리하여 새 뜻을 품되 이 추잡한 가정을 떠나 좀 더 참된 일을 하다가 죽으려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 우연히 뜻을 같이 하는 '죽산'과 '매초'를 만나 의형제를 맺고 정의를 위해 싸울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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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남정현 기자=1910년 무렵의 남대문 거리 (사진=서울역사편찬원 제공) 2019.10.25 nam_jh@newsis.com
한편, 계모의 흉계는 날로 극심해 가서 드디어는 송산을 제거하려는 음모까지 모의하게 된다. 송산의 신변이 위태로와짐을 알게 된 의동생 죽산과 매초가 격분해서 정의의 칼을 들려 하지만, 송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이를 말린다. 송산인들 어찌 고민이 없을까마는, 그는 오직 가문과의 부친의 위신을 생각해서 모든 것을 꾹 참고 견디자는 것이었다. 그러자니 자면 마음이 울적하고 괴로운 송산은 매일을 술타령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송산의 은인자중(隱忍自重)도 보람이 없이 드디어 최후의 날이 오고야 만다. 계모 일당의 발악이 극도에 올라 송산의 가문이 위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게 되자, 송산은 죽산과 매초의 독촉도 있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정의의 칼을 드는 것이었다"(안종화 '한국영화측면비사')

전체적인 서사는 여느 신파극의 경우처럼 활극을 가미해 가정의 이야기를 다뤘다. 활극은 싸움, 도망, 모험 따위를 주로 하여 연출한 연극을 말한다.

'의리적 구토'가 공개된 해는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해였다. 영화가 개봉할 당시에도 3ㆍ1 운동 정신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리라. 조선 민중들은 집을 장악한 계모를 응징하는 송산을 보며, 국권을 빼앗긴 자신들의 처지를 송산에게 감정을 이입했을 것이다.

김도산은 '의리적 구토' 개봉 2년 뒤 1921년 7월26일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에 늑막염으로 세상을 뜬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영화를 통해 일제에 항거하고자 했던 그의 정신은 당시 조선의 관객에게 큰 여운을 남겼으리라.

◇ 호각 소리로 연극과 활동사진 간 교묘히 전환시켜
연극연출가 박진(1905~1974)이 '한국연극사 1기(1902~1930)'를 통해 밝힌 '의리적 구토' 공연관람 회고담은 연쇄극의 공연형식을 알려주는 중요한 고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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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남정현 기자=1919~2019 한국영화 100년 (사진=한국영화1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2019.10.24 nam_jh@newsis.com
"필자가 소년시절에 단성사에서 본 연쇄극, 숲이 있고 양옥집 현관이 있는 정원에서 청년과 악한이 싸우다가 도망을 하는 것을, 청년이 쫓아가는 데서 '호루룩하고 호각을 부니까' 불이 꺼지고 천장에서 어둠가운데 흰 포장이 내려와 무대의 3분의1정도 넓이로 중앙에 매어달리더라"

"(그후) 좌우에서 배우들이 백포장 뒤로 숨으니까 '다시 호루룩하고 호각소리가 나자', 2층 영사실에서 터르르하자 빛이 비치는데 사진이 나와서 악한이 산으로 기어올라가고 뒤미처서 청년이 따라 가며 막 뒤에서 말을 주고 받고 이렇게 한참 험한 산비탈에서 실갱이를 한다. 이윽고 악한이 잡히자 당황한 악한이 품에서 단도를 꺼내 청년을 찌르려 하는 위기가 (닥친다)"

"(그러자) 별안간 호각소리가 또 나더니 순식간에 포장이 올라가고 불이 켜지니까 무대는 현관이 없어지고 숲속이 되었는데 거기서 지금 방금 사진에서 빼든 악한의 칼이 청년을 찌르려 한다. 이래서 한바탕 다찌마와리(액션)가 벌어지고 객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진다."

연극과 활동사진을 구분짓는 장치는 호각 소리였다.

무대에서 영화로의 장면 전환은 호르라기 소리를 신호로 조명이 아웃되면서 무대 중앙에 영화를 비춰주는 옥양목 스크린이 내려오고 영화장면이 영사된다. 이때 영사장면에 출연한 배우는 백포장 뒤로 숨어서 영화의 장면에 맞춰 대사를 한다. 영화에서 무대로의 장면 전환 역시 호르라기 소리를 신호로 조명이 아웃되면서 무대 중앙에 영화를 비춰주는 백포장이 올라 가고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면 영화와 연극의 장면전환이 이뤄진다.

언론인이자 수필가인 조풍연(1914~1991)이 '개화기의 서울 풍속도'에서 서술한 내용도 이와 겹친다. 조풍연의 기록은 박진의 회고담과 비슷한데, 카메라의 기능 또한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무대에서 연극이 벌어지다가 등장인물이 급히 퇴장한다. 함께 연극하던 배우가 뒤따라간다. 이때 호루라기 소리가 나며 무대 위에서 옥양목(무명) 스크린이 내려오고 거기에 활동사진이 비친다. 방금 무대에서 본 배우들이 활동사진에서 연기한다. 쫓는 자가 대기시켰던 자동차를 타고 쫓는다. 추적 또 추적! 자동차가 5리 밖에서 달려온다. 카메라는 고정돼 있고 자동차가 스크린 전면까지 와서 비켜질 때까지 약 5분. 그 다음 장면은 추적하는 자동차가 보이기 시작해 그것도 스크린에서 사라지기까지 5분 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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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남정현 기자=박진(왼쪽), 조풍연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2019.10.25 nam_jh@newsis.com
"이렇게 자동차와 자동차가 쫓기고 쫓고 하다가 마침내 뒤차가 앞 차를 바짝 몰아 두 사람이 격투를 시작할 때 다시 호루라기 소리가 나며 옥양목 스크린이 위로 밀려 올라가면 무대에 바로 영화장면이 이어져 실제로 배우들이 격투를 한다. 희한하기란 말할 수 없었다. 연극과 영화 다시 연극으로 또 영화로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 소위 연쇄극, 필자가 본 연쇄극은 '의리적 구토'인데 이것이 한국 최초로 영화촬영기를 쓴 필름이었다."

화면사이즈는 항상 '풀숏'(전신)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무대의 행위가 영화에서 또는 반대로 영화의 행위가 무대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전체 장면의 사이즈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박진은 영사기의 위치를 관객석 쪽 2층 영사실로 회고한다. 무대 삼분의 일 넓이의 스크린을 채우려면 무대와 영사기의 거리가 어느정도 요구됐을 터. 스크린의 뒤 쪽에 영사기를 설치하기에는 당시 극장 공간의 무대 깊이가 짧아 불가능하였을 것이고, 결국 객석이나 영사실에서 필름을 영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연쇄극의 특징은 조풍연의 기록처럼 카메라 위치가 고정됐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즉, 피사체의 등퇴장은 프레임인과 아웃으로 이루워졌다. 따라서 연쇄극에서 편집작업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 '의리적 구토' 개봉일, '영화의 날'로 지정
'의리적 구토' 이후 약 3년간 연쇄극 붐이 일어났다. '혁신단'의 임성구, '조선문예단'의 이기세, '취성좌'의 김소랑 등 신파극단이 조선의 연쇄극 시대를 이끌었다. 이 시기는 연쇄극이 유행했을 뿐만 아니라, 기록영화·극영화가 출현하고, 계몽영화·상업영화 제작 또한 연속적이고 점진적으로 진행됐다.

'의리적 구토'의 개봉일인 10월27일이 영화의 날로 제정된 것은 1966년이다. 1963년 4월27일 안종화의 '한국영화측면비사'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한국영화인협회(영협) 소속 영화인들이 '의리적 구토'의 공개일인 '1918년 10월20일'을 '영화의 날'로 제정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후 1966년 1월25일 영협 소속의 연화계 원로들이 '의리적 구토'의 공개일을 '영화의 날'로 지정해 줄 것을 공보부에 요청했다. 이에 공보부는 정확한 공개일이 1919년 10월 27일임을 확인하고 '영화의 날'을 제정했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국가 기념일'로 치러졌다.

영화 제목이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가 아니라 '의리적 구투'(義理的 仇鬪)라는 주장도 공존한다. 일각에서는 영화가 한국 최초의 영화가 맞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의리적 구토'가 당시 억압받는 조선의 민중들에게 희망의 횃불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도움말 주신 분=동국대 영화영상학과 정재형 교수,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한상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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