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기획특집

[최초로 본 한국영화 100년]②근대 매체가 낳은 新 연예인 '변사'

1910~1930년대 가장 활발...해설자·스토리텔러·공연자 스타 서상호 마지막 변사 신출옹...1960년대 이후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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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영화 '청춘의 십자로' 변사 공연 재연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2019.11.08 photo@newsis.com

※ 뉴시스는 2019년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아 [최초로 본 한국영화 100년]을 특별기획했다.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의 원형 추적기를 시작으로 △ 최초의 영화스타 변사 △ 최초의 총천연색 영화 △ 최초의 국제영화제 수상작 등 최초의 기록들을 심도 있게 추적해 한국영화 100년사를 실감있게 재구성할 것이다.

【서울=뉴시스】남정현 기자 = 변사는 조선 최초의 '연예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장은 연극과 영화, 기생의 무용, 창, 사당패 놀이 등을 대중들이 종합적으로 즐길 수 있는 '연예의 장'이었으며, 변사는 영화라는 근대적 매체가 낳은 새로운 형식의 연예인이었다.

실제로 무성영화 변사는 무성영화 상영에 현장성, 일회성, 관람성을 창출했다. 변사와 악사를 동반했던 현장성과 그 생동감은 무성영화 공연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자적인 관람 경험이었다. 이번 기획에서는 변사의 역할을 살펴보고, 변사가 조선 최초의 연예인으로서 어떠한 위상을 지녔는지, 변사의 쇠퇴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본다.

◇변사의 기원-일본 변사와 한국 변사의 차이점

변사는 한국(1899~1940)과 일본(1896~1939)의 무성영화 시기의 영화 해설자다.

변사는 전설(前說)로써 영화 상영이 있기 전 영화 상영의 전체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주고, 영화 상영이 시작되면 악사가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흉내내거나 영화의 내용을 설명해줬다.

또한 대포소리와 같은 효과적인 의성어를 들려줌으로써 청중의 영화 이해와 감상을 도왔다. 당시 '활동사진 해설가', '화면 해설가', '달변가', '변인(辯人)' 등으로 불렸다.

변사는 무성영화 시기에 한국과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다. 물론 영화가 상영되는 과정에서 육성으로 해설을 담당하는 무성영화의 내래이터(Narrator)는 초기 영화시기에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 영화에서도 공통적으로 등장했던 보편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변사와 서구 무성영화의 내래이터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내레이터가 초기 영화의 짧은 시기(1908~1912)에 한정돼 있었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의 변사, 특히 일본과 한국의 변사는 영화가 도입된 직후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무성영화 시기 전반에 걸쳐 존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만의 독특한 영화미학과 영화산업, 문화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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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영화 '청춘의 십자로' 변사 공연 재연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2019.11.08 photo@newsis.com

그동안 조선의 변사가 일본변사에서 유래했다는 정의가 보편화돼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동안 알려졌던 유래와 달리, 일본의 변사가 일본의 전통극에 뿌리를 둔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변사는 우리의 전통극에 뿌리를 뒀다.

우리 전통극은 청각이미지와 시각이미지가 결합된 종합적 이미지의 예술이었다. 관객이 극으로 들어가 연기자와 어울리는 마당놀이라는 점은 우리 전통극만의 특징이다. 조선변사는 관객과 어울리는 동시에 관객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다. 통역자와 해설자, 그리고 비평가의 기능까지 수행했다.

일본의 변사는 극이나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흐름을 파악하여 설명해주는 해설자의 역할에 국한한다. 이와 달리 조선의 변사는 언변으로서 무성영화의 전체 내러티브를 이끌고 가는 '이야기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의 변사가 일본의 가부키 해설자로서 변사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변사의 자유로운 행태는 판소리나 탈춤 등의 우리 문화전통을 계승했다는 증거기도 하다. 일본의 변사들이 유성영화의 도입이후 급격하게 사라졌지만, 조선의 변사들은 유성영화 도입 이후에도 상당기간 인기를 누렸고 여전히 활동했다는 자료들을 통해 그 기능상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변사의 등장-통역자와 해설자로서의 변사

2009년 출간된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논문 '조선변사의 연원과 의의'(이정배)에 따르면 변사의 역할을 '통역자와 해설자', '스티러텔러'라고 설명했다. 변사들은 왕실에서도 활동했는데, 왕실이 변사를 필요로 했던 이유는 영화에 대한 설명과 통역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저께 밤 오후 여덟시 중명전에서 활동사진을 열어 황제폐하, 황태자전하와 태자비 그리고 영친왕 저하와 황귀비께서 관람에 임하셨는데 '전무과 기사 원희정' 씨의 설명으로 빙활(氷滑), 군함의 수병이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하는 모습, 다양한 사람들의 풍경, 해수욕장의 광경 등 20여종을 모두 관람하셨는데 전쟁영화는 하나도 없었다."(만세보, 1907.12)

위의 글은 궁내에서 무성영화를 상영했는데 고종황제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원희정'이라는 사람이 영화의 내용을 설명했다는 기사이다.

원희정의 경우, 직업적인 변사는 아니었지만 활동사진(연쇄극)의 내용을 파악하고 설명했다고 한다. 당시 영화는 장면 전환에 대한 영상적 연구가 미진했고 기술적으로 50~100초 정도의 필름을 여러 편 상영했기 때문에 장면간의 연속성을 찾아보기는 매우 어려웠다. 또한 필름을 갈아 끼우는 간극과 필름 상호간의 관계성을 만들어주기 위해 반드시 해설자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해설자의 존재는 다른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변사에 관한 기사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08년 '황성신문'에서였다. 이 기사에서 송병준은 관인구락부에 회동한 애국부인회의 활동사진 상영에 변사 정운복 한석진 김상연 삼씨를 불러줄 것을 내부에 요청했다.

"애국부인회에서 오늘부터 관인구락부에 모여서 일본에 유학하시는 황태자전하의 활동사진을 거행한다는 것은 이미 보도했었다. 어제 오후 한 시에 내무대신 송병준(宋秉畯) 씨가 변사 정운복(鄭雲復) 한석진(韓錫振) 김상연(金祥演) 세 사람을 내부로 초청하여 활동사진 대한 연설 방침을 협의하였다"(황성신문, 1908.06.24)

위의 기록으로 볼 때, 이 당시 조선에서 이미 여러 명의 변사가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 세 명을 초청하는데 사전 준비를 협의하려는 것으로 보아서 단순히 흥밋거리로 변사를 활용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기사는 영화를 분석하고 설명할 내용을 검토하는 작업이 영화 상영에 앞선 비평작업임을 암시한다.

당시 조선의 상황으로 볼 때 변사의 출현은 통역과 연관이 있다. 대부분 초창기 유입된 영화가 미국이나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였기 때문이다. 영화를 가지고 황실에 들어온 변사들은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설명과 영화 내용에 대한 설명을 동시에 해야 했다. 단순히 통역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 전반적인 이해가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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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영화 '청춘의 십자로' 변사 공연 재연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2019.11.08 photo@newsis.com
총독부 활동사진을 태람(전략) 이왕가에서는 수년간 상중이신 때문에 사용치 않으셨던 인정전을 오래간만에 화려하게 꾸미시고 배관자는 귀빈으로 이우공 전하 기타 윤 자작 민 자작 이하의 친척 일동이며 또 부인석에는 여관과 및 이왕 직원 가족 등 약 백 명이 배관하였는데 사진영사 기계는 최근 총독부에서 사드린 절대 방화(防火)의 안전품으로 사용하고 영화설명에 대하여 총독부로부터 전중 통역관과 이왕직으로부터 박 사무관이 통역을 하여 드렸는데 영화중에 경마대회 같은 것은 삼일 전에 촬영한 새 사진이며 이왕가로부터 애마(흐흐) 세 머리가 출장하였고 또 명고옥성은 연전에 이왕 전하께서 내지(일본)에 여행할 때 체재하옵시던 인연이 계시던 이궁(離宮)이신 때문에 흥미가 깊으셔서 사진을 비추일 때 누누이 질문이 계셔서 만족히 어람을 하셨더라."(매일신보, 1921.05.31)

위의 기사를 보면 영화를 감상할 때 왕실의 통역관이 영화 내용을 통역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총독부에서 파견한 통역관과 왕실의 통역관이 왕실의 영화관람에 배석해 왕이 영화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토리텔러를 넘어 공연자로서의 변사

왕실에서 변사의 필요성과는 달리 대중에게 변사의 필요성은 조선인들의 기호 때문에 비롯됐다. 당시 조선의 대중은 판소리를 통해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가 결합된 형식의 내러티브에 익숙했다.

변사의 역할은 이러한 형식에 딱 들어맞았다. 당초 변사의 주요임무는 등장인물의 대화 내용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영상이 제시하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여 설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변사에게 단지 스토리텔링의 능력만을 요구했던 관객들은 점차 변사에게 연극적 요소를 더하기를 원했다. 관객은 변사에게 등장인물에 맞는 다양한 음색을 구사하기를 원했고 음성에 사실성이 첨가되기를 원했다. 마치 눈을 감고 있으면 변사의 소리가 영화를 모두 보여주는 듯한 생생한 연기를 원했던 것이다.

"활동사진이라 하는 이름이 조선 지방에 수입된지가 불과 십여 년이라 미미한 일개 쇼부분에 지나지 못하더니 요사이 수삼 년에 이르러는 시세를 좇아 활동사진도 점점 발전되어 경성 내에도 오륙 처의 활동사진관이 생기었고 그로 좇아 사진 설명하는 변사도 비로소 생기게 되었음이 시세의 자연한 일이라 이에 조선인의 변사에도 '김덕경'이라 하는 사람이 신기록을 지었도다. 김 군은 소학교로부터 중학정도까지 지내어 상당한 학식이 있을 뿐 아니라 본래의 사령이 좋은 사람으로 이십일 세부터 각 활동사진관으로 다니며 설명의 직책을 맡아 유창한 어조로 혹은 높였다 내렸다 연약한 아녀자의 음성도 지으며 혹은 웅장한 대자부의 호통도 능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록 그림이 비추이지만은 실제의 연극을 보는 듯 또는 현장에서 그 광경을 직접으로 당한 것같이 감염이 되니 이는 김덕경의 특이한 작이가 아니면 능치 못할 일이라."(매일신보, 1914.06.09)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당시 영화계의 상황과 변사의 역할에 대해 알 수 있다. 조선에 영화가 들어온 지 십년 정도 됐는데 처음에는 단순한 볼거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기사가 나갈 당시에는 5, 6개의 극장이 생기고 따라서 설명하는 변사도 생기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그중에 학식도 갖추었고 내용에 따라 적절한 음성을 구사할 줄 아는 '김덕경'이라는 사람이 인기가 좋았다고 짚고 있다. 그의 인기는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을 파악하고 유창한 어조로 음성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면서 여성과 남성의 음색을 구사하기 때문에 실제로 연극을 보는 듯하고 그 광경을 직접 당하는 것과 같은 현장감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변사에 대한 욕구와 평가는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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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우리나라에 영화 문화가 들어온 초창기인 1912년에 개관한 우미관은 1918년 단성사가 활동사진 전용관이 되기 전까지 경성 유일의 조선인 극장이었다. 2층 벽돌 건물에 수용인원만 1000명일 만큼 큰 극장으로 광복 때까지 조선극장, 단성사와 더불어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관이다. (사진=서울시 제공) 2019.11.08 nam_jh@newsis.com

"육 년 전 경성 내에 활동사진관으로는 처음 설치되었던 고등연예관에서 처음으로 사진 설명하는 변사로 고빙되어 일어와 조선말로 물 흐르듯이 설명하는 사람은 아마 '서상호'가 첫째라 일컬으리로다. 본래는 부산 사람으로 칠팔 세부터 일본말의 소양이 있더니 (중략) 금은 제이대정관에 주임변사로 설명하는데 말은 유창하나 간혹 관객의 ○ 대하여 불경한 어조가 있는 것은 탄복치 아니 할 것이라. 우미관 활동사진에 마침 있던 변사 '리한경'(李漢景)도 여러 해 설명의 근고를 담다가 요사이는 평양가무기좌(歌舞伎座) 환등사진부에서 주임변사로 있어 여러 관객의 다대한 환영을 받는 중이라 하니 서상호와 리한경은 막상막하 하는 조선환등계에 웅변가로 지목을 받을 만 하겠도다."(매일신보, 1914.06.11)

'매일신보'는 유망한 예술인 100명을 소개하면서 98번째에는 변사 김덕경을, 그리고 100번째로 변사 서상호를 소개한다. 서상호가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일본어와 우리말이 모두 능숙했고 연극배우의 경험도 있어 유창하게 설명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불경한 어조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불경한 어조는 관객을 모독하는 이야기나 해설 도중에 욕이나 저속한 말을 섞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서상호의 품성과도 관련이 있으나 무엇보다 관객들이 저속한 말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껴 긍정적 반응을 보였던 것과 관계가 깊다. 변사의 언술태도와 방식은 대중여론에 직결됐는데 중요성을 감지하지 못한 변사들이 자신들의 언술을 가볍게 여겨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 조선 최초 연예인으로서의 변사

변사는 숨은 영화 해설자였기보다 무성영화 상영의 중심에 있었던 공연자로서 대중 연예인, 즉 근대적인 엔터테이너였다. 우리나라에서 변사는 근대적인 형식의 스타덤을 배경으로 대중 연예가 형성되는 기원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근대적 산물로서 영화 매체와 스타덤은 일찍이 공생 관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최초의 스타덤에 오른 연예인은 '변사'였다.

변사들은 영화 해설뿐만 아니라 연극 해설, 연극 공연, 그리고 다음 장에서 살펴볼 막간의 쇼 등을 모두 망라하는 종합 연예인이었다. 무성영화 상영시 동반됐던 소리 중에서도 특히 변사의 해설은 무성영화 필름에 결코 부수적이거나 이차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변사는 무성영화 상영을 주도적으로 연출했던 핵심적 존재였다.

변사들의 활동 장은 극장이었다. 1900년대 말부터 생기기 시작했던 실내 극장이나 이전의 야외 가설무대는 처음에 모두 뚜렷한 장르의 구분 개념 없이 각종 공연물과 무성영화를 구경거리로 제공했던 혼종적인 공간이었다. 무성영화는 오늘날처럼 기계적인 작동만으로 완성되는 발성영화와 달리 변사의 해설과 음악 반주, 효과음 등의 공연적 요소가 함께 있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실제 진행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변사는 말 그대로 무성영화를 '공연'했다.

변사는 점차 영화의 내러티브 중심에 서게 됐다. 영화의 내용이나 극장 시설이나 분위기를 따라 관객이 몰리는 것이 아니라 변사가 누구냐에 따라 영화의 흥행이 좌우될 정도였다. 극장은 유명한 변사를 영입하려고 경쟁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극장의 전 시스템에서 변사가 차지하는 위치가 제일 커졌다.

한창 때는 정말 대스타였다. 영화가 끝나면 고관대작들이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변사를 인력거로 납치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영화 한 편을 해설하면 쌀 세 가마 값을 벌 정도로 수입도 좋았다고 한다. 또 그중에 미모의 변사들은 영화에 주인공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대중 스타로서, 가십의 중심에 놓이기도 했으며 기생이나 신파극 배우와 달리 신문 미디어에 오르내렸다.

◇ 대표적인 스타 변사 '서상호'

"단성사 변사들 중에 서상호, 김덕경 군등은 본래부터 이름난 변사들이었으나 근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미적 시적으로 설명하고자 케케 묵은 곰팡 냄새 나는 되지 않은 문자와 말은 다 내어버리고 새로이 새 말을 연구하여서 관객에게 큰 환영을 받는 모양이다."(매일신보, 1919.10.02)

실제로 1913년 당시 우미관의 주임변사였던 서상호는 영화해설의 전문성보다 쇼맨십을 동반한 영화해설과 막간의 쇼로 화제를 모았다. 이를 통해 연예인으로서 변사의 대중적 인지도를 형성하고 확대했다.

특히 인기의 주된 비결이었던 일명 '뿡뿡이춤'은 그가 직접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나팔을 사타구니 사이에 끼고 엉덩이춤을 추거나 탭댄스를 추었던 외설스러운 춤으로 전해진다.

"「스테-지」 뒤에서 악대가 저음으로 무도곡을 불면 객석의 불이 꺼지며 「스테-지」에 오색광망(光芒)이 집중한다 이때 난데없는 자전거라팔소리가 나고 「스테-지」 왼쪽에서 손 하나만이 쑥나오며 그 손에 쥐여진 라팔이 「뿡빵」소리를 낸다. 서울의 명물로 양조장 술배달들이 자전거로 떼를 지어가며 장단을 마추어 「뿡뿡」 소리 내는 것을 기억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나, 이 소리 비슷하게 소리를 내다가는 어느틈에 도라갓는지 오른쪽으로부터 「후룩코-트」에 중산모를 쓴 신사한명이 사차구니에 자전거 라팔을 끼우고 소리를 내며 기상망칙한 춤을 추며나온다. 엉뎅이를 젓는품이 「하와이안땐쓰」 비슷도 하지만 그러다가는 「땝땐스」로 변하기도하며 사변하의 작금 같으면 풍기문란으로 유치장밥을 톡톡히 먹을만한 야비한 춤을 춘다. 서상호가 이춤을 시작하자부터 단연 여성「팬」이 불기시작하야 아지도 못하는 사람에게서 「와이샤쯔」 「넥타이」 양말구두 향수같은 것을 선사받었으며, 나종에는 조선옷을 지어보내는 여성까지 있었다 한다." (유흥태, '은막암영 속에 희비를 좌우하든 당대 인기변사 서상호 일대기')

오늘날 상상하기에도 민망한 뿡뿡이춤은 실제로도 문란했던 서상호의 삶과 결합되면서 많은 지탄을 받았지만, 우리나라 막간극의 효시였음이 분명하다. 이는 변사의 연예적 자질이 당시에는 영화해설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수진에 따르면, 변사 서상호의 쇼맨십 코드는 '익살'과 '외설' 또는 '외설적인 익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미관이 개관된 지 석달이 조금 지나서 서상호의 해설은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사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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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변사 김영환의 '영화일기'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2019.11.08
"우미관 각죵 션명한 샤진외에, 죠션기생의 나뷔츔과, 서샹호의 익살마진 셜명은, 관람쟈의 흥을, 일층 더 도오난듯하고"(매일신보, 1913.03.15)

비교적 중립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이 기사에서 서상호의 '익살마진 셜명'은 그러나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성적인 제스처를 포함하는 것이어서 인기와 함께 사회적 비판을 불러모으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서상호는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그는 1910년대와 20년대 초반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였다가 1925년에 약물중독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한순간에 몰락, 1938년에는 결국 우미관 화장실에서 약물중독으로 사망함으로써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한편, 다양한 영화가 수입되고 조선영화 제작도 늘어나면서 변사의 역할은 전문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영화장르에 따라 전문변사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사극은 김덕경, 문예극에 특출난 서상호, 우정식, 활극은 이병조, 희극에 재주를 보인 최병룡, 연애극에 뛰어난 변사 출신의 감독 김영환 등이 활약했다.

◇ 마지막 변사 '신출' 옹(1928~2015)...역사의 뒤안길로

변사는 유성영화가 등장하고도 한동안 명맥을 유지한다. 이는 당시 변사 자체가 가진 매력과 변사에 대한 대중의 인기를 방증한다고도 할 수 있다. 유성영화는 1920년대 말경 경성 시내에 처음 출현하고, 한국 최초의 유성영화인 '춘향전'은 1935년에 제작 발표됐다. 변사는 1910년대부터 30년대까지 삼십여 년을 무성영화와 함께 하면서 초기영화와 극장 제도의 일부로 존속하였다.

물론 이후 유성영화가 발전하면서 급격하게 퇴조해 오늘날에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해방 직후 일부 흥행업자들이 녹음을 하지 않고 무성영화형태로 영화를 제작하면서 지방의 극장이나 이동영사에는 변사가 있었으나 1960년대 이후에는 사라져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변사 일을 했던 사람들 중에는 '신출' 옹(1928~2015)이 마지막 변사로 불렸다. 2015년 2월에 사망했다.

SBS 예능 프로그램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신출 옹의 제자인 박해수 변사(26)가 몇 차례 등장한 적이 있다. 첫 등장이 최연소 변사라는 타이틀로 14살 때 등장했었다. 신출 옹에게 직접 사사하였다고는 하지만 변사로써의 일은 거의 없고, 가끔 있어도 출연료도 받지 않고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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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마지막 변사 신출 옹(사진=뉴시스 DB) 2019.11.08 photo@newsis.com

변사가 퇴보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일제의 제도적 압박이다. 변사 '정한설'이 영화와 관계없이 공연 도중 독립을 부르짖는 일이 있었다. 이 시기는 1919년 만세사건 이후여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독립을 부르짖는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놀랍게도 1919년의 신문들을 살펴보면 만세사건의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일제는 만세사건 자체를 축소시키려 했고 전국적인 확산을 염려하여 기사화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와 같은 사건이 기사화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변사의 행동이 온당치 못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기사화됐지만 변사가 용기 있게 조선의 독립을 외쳤음을 기사화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우미관 변사 정한설은 마침내 종로서에 구인 시내 장사동 사십 팔번지(市內 長沙洞 四八) 사는 정한설(鄭漢卨 二二)은 이제로부터 삼년 전에 우미관 변사로 무대에 오른 이후, 금일까지 매우 근실히 지나오던 중 지난 오일 구시 반경에 활동사진이 중간에 끝나고 십 분간 휴식을 하게 된 틈을 타서 무대에 나타나, 일반관객을 향하여 긴장한 표정과 흥분된 어조로 주먹에 힘을 주면서 「오늘은 자유를 부르짖는 오늘이요 활동을 기다리는 오늘이라. 우리의 맑고 뜨거운 붉은 피를 온 세상에 뿌리여 세계의 이목을 한번 놀래어서 세계만국으로 하여금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정성을 깨닫게 하자」는 등 활동사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온당치 못한 말을 하였음으로 즉시 입장하였던 경관에게 취체 되어 목하 종로경찰서에 구인 조사 중인데 활동사진 변사로서 언론에 대한 관계로 취체 구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더라."(동아일보, 1920.6.12)

이전에도 변사들이 종종 영화와 관련 없는 설명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는 대개 영상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경우였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변사가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휴식시간에 자신의 독립 의지를 표명한 경우였다. 이후 지방에서도 변사들이 독립 의지를 밝히는 일이 벌어졌고, 일제는 변사에 대한 자격논란을 문제 삼아 변사를 허가제로 변경, 변사검정제도를 실시한다.

제1회 변사시험 응시자를 보면 한국인 변사는 13명인데 일본인 변사는 33명이었다. 여러 가지 까다로운 응시자격조건 때문에 한국인 변사의 지원은 적었고, 그마저도 일본인 경찰 앞에서 구두로 시험을 실시해 상당수가 당황하거나 주눅이 들어 조선의 변사들은 제대로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일각에서는 현대의 성우를 두고 변사와 비슷한 직군이라고 주장한다. 형식적으로 보면 둘 다 사람의 육성으로 내는 직업이라는 점에서는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직업군은 이를 제외하고 전혀 다른 특성의 지닌다. 성우는 녹음실 음향시설이 있는 녹음장비를 통해서 작중 대사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데 그친다. 이에 반해 변사는 별도의 녹음시설이나 장비도 없이 극장에서 직접 대사를 즉석에서 읊거나 연기 몸짓을 보여주는 역할, 해설자, 스토리텔러, 공연자로서 최초의 연예인의 지위를 누린 직업군이다.

<도움말 주신 분=한상언 한상언영화연구소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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