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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선언 30주년 ②] 6·29선언 30주년, 그날의 주역들 어디있나

등록 2017.06.29 08:02:00수정 2017.07.04 09: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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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영환 기자 =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제29주기 이한열 동판 제막식에서 당시 총학생회장이던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가 발언을 하고 있다. 2016.06.09. 20hwan@newsis.com

【서울=뉴시스】이영환 기자 = 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열린 제29주기 이한열 동판 제막식에서 당시 총학생회장이던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가 발언을 하고 있다. 2016.06.09.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김지훈 기자 = 1987년 6월29일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표위원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6·29선언을 발표한 지 30주년을 맞았다.

 6·29선언은 6·10민주항쟁을 계기로 정점을 찍은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더이상 거스르지 못한 군부 집권층이 사실상 항복을 선언한 역사적 사건이다.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특별선언을 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통해 수용 의사를 밝히는 형태를 취했으나, 당시 노태우 대표위원이 전두환 대통령을 설득한 것인지, 아니면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대표위원을 설득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린다.

 6월항쟁은 전국 각지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여기에 이른바 '넥타이부대'까지 가세하면서 들불처럼 타올랐다. 그해 6월26일에는 전국 37개 도시에서 100만여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여기에 도화선이 된 사건이 이한열 열사 사망 사건이다.

 그해 5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군부독재를 향한 국민적 반감이 거세던 와중에 6월9일 연세대 정문 앞에서 벌어졌던 시위에 참가했던 경영학과 2학년생 이한열군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고 쓰러지는 사건까지 발생한 것이다.

 결국 6·29선언은 10·27 국민투표로 이어져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고, 12월16일 제13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결과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36.6%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야권에서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 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후보 간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4파전이 벌어졌던 탓이다.

 민주화 투쟁의 양대산맥이었던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 간 단일화에 대한 기대가 컸으나 당권을 놓고 접점을 찾는 데 실패하면서 단일화는 끝내 무산됐다. 그 결과 민주화투쟁으로 얻은 첫 직선제 대선에서 군부출신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현재 전두환 전 대통령은 86세의 고령에도 회고록을 펴낼 정도로 정정하다. 군부정권의 탄압을 받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제14대)과 김대중 전 대통령(제15대)은 고인이 됐다. 김종필 당시 후보는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와 국무총리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정치 원로로 남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제13대)은 천식 등의 지병으로 병원을 오가고 있다.

 6월항쟁 당시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인사 중에 정치권에 발을 들인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은 '386'에서 '486'으로 불렸다가 최근에는 '86세대'로 불린다.
 
 임종석 전 의원은 한양대 86학번으로 1989년에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3기 의장을 맡았다. 당시 '임수경 방북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문재인정부 초대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은 연세대 총학생회장, 같은 당 이인영 의원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이 의원은 전대협 초대 의장을 맡이고 했다.

 이밖에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86세대의 맏형급으로 분류된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서울대 83학번으로 6월항쟁 때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중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김상곤 교육부장관 후보자는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6월항쟁 당시에는 한신대 교수로 재직하며 '6월항쟁 교수선언'에 참여했다.
 
 역사의 변천에 따라 당시 집회를 주도했던 이들이 정부의 핵심이 되고, 집회를 방어한 측에 섰던 이들은 역사의 뒤안길에 서 있다. 이도 역시 우리의 근현대사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의 역사도 가늠할 수 없다는 게 당연한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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