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광장

[3·1운동 백년과 여성]②권애라는 누구…개성서 만세운동 이끈 유관순 선배

1897년 개성 출생…유관순 이화학당 선배
어윤희 등과 함께 개성에서 3·1운동 주도
1920년 3·1운동 1주년 맞아 옥중 만세까지
출소 후 광복 힘쓰며 여성 지위향상도 주력
재차 옥고 치르면서도 항일운동 뜻 안 굽혀
1970년에는 경북 안동서 국회의원 입후보
1973년 77세로 타계…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등록 2019.02.26 06:00:00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블로그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서울=뉴시스】권애라 여사 (사진=1925년10월11일자 동아일보 발췌)

【서울=뉴시스】권애라 여사 (사진=1925년10월11일자 동아일보 발췌)

【서울=뉴시스】김온유 기자 = 1897년 개성에서 태어난 권애라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유관순 열사의 이화학당 선배이기도 하다.

권애라는 21세이던 1917년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개성으로 돌아와 충교 예배당 내 유치원 교사로 근무했다.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19년 3·1운동에 맞춰 감리교파인 어윤희 등과 함께 개성 지역에서 대한독립을 위한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그녀는 독립선언문 80여매를 호수돈여자보통학교에서 어윤희에게 넘겼다. 어윤희는 이 선언문을 다시 주요 인사들에게 나눠줬다. 이에 고무된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독립운동가와 찬송가를 불렀고, 이 행렬에 일반 민중도 억눌러왔던 애국심을 쏟아내며 시위에 동참했다.

이만규 신문조서에 따르면 당시 개성은 "너무나 일하는 사람이 없어 선언서도 조금만 보내겠다"고 할 정도로 만세운동에 대한 열의가 사그라든 곳이었다. 그러나 어윤희와 권애라 등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당당히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 도시의 반열에 들게 됐다.

권애라는 일본 경찰에 의해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녀는 감옥 내에서도 조국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20년에는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감옥 내에서 만세 운동을 펼쳤다.

감옥에서 나온 그녀는 곳곳으로 강연회를 다니며 여성들의 애국사상을 키워냈다.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한민족 여성 대표로 당당히 참석했다. 또 당시 민족대표였던 여운형, 나용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서울=뉴시스】권애라 열사가 경북 안동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당시 선거 포스터 (사진=선거관리위원회 제공)

【서울=뉴시스】권애라 열사가 경북 안동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당시 선거 포스터 (사진=선거관리위원회 제공)

1929년에는 중국 쑤저우 경해여숙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이곳에서 그녀는 상해 지역을 중심으로 광복에 힘썼으며, 동시에 한국 여성 지위 향상에 주력했다. 그뿐만 아니라 봉천과 길림, 흑룡강 등 동삼성 지역에서는 암암리에 지하항일운동을 이어갔다.

그녀는 1942년 다시 일본 관동군 특무대에 체포됐다. 관동군이란 일본의 중국을 침략을 위한 군부대로, 제2차 세계대전 말까지 중국 만주에 배치됐던 육군부대다. 그녀는 이 당시 체포된 이후 1년 이상 비밀 감옥에서 고문을 받는 등 혹독한 옥살이를 견뎌낸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8월15일.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자주 독립을 되찾았다. 권애라 역시 광복으로 비로소 석방됐고 1970년에는 경북 안동에서 국회의원 입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73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권애라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