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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년과 여성]③척박한 곳 독립운동 주도…'주체적 여성'의 시작

"핍박 받아 온 여성들, 3·1운동서 참가 드러나"
'일하는 사람 너무 없던' 개성 3·1운동 주도해
서대문형무소에서도 "대한독립 만세" 이끌어
출소 후 여성 애국사상 고취하는 강연회 이어가

등록 2019.02.26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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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권애라 여사 (사진=1968년 5월9일자 동아일보 발췌)

【서울=뉴시스】권애라 여사 (사진=1968년 5월9일자 동아일보 발췌)

【서울=뉴시스】김온유 기자·문광호 수습기자 = 독립운동가로서 권애라의 삶은 한떨기 야생화와 같았다. 그녀는 늘 독립운동의 불모지에서 애국사상이란 꽃을 피워냈다.

그녀가 처음 독립운동을 시작한 곳, 개성도 그랬다.

1897년 개성에서 태어난 그녀는 1917년 봄 이화학당을 졸업해 다시 개성으로 돌아갔다. 충교 예배당에 자리한 유치원에서 교사로 일하기 위해서다.

당시 개성에서는 "경성에서 3·1운동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33인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이었던 오화영 목사는 이미 1919년 2월 개성에 독립선언서를 보내뒀다.

오화영은 "개성에는 일하는 사람이 너무나 없어 선언서도 조금만 보내겠다"고 적었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개성은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기대하기 어려운 도시였다. 실제 오화영이 보낸 독립선언서마저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개성에 독립운동의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어윤희와 권애라다.

어윤희는 1880년생으로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16세에 결혼한 지 3일 만에 동학군으로 참여한 남편이 일본과의 전투에서 사망해 미망인이 됐다.

어윤희는 이후 학업을 마치고 전도사로 활동하면서도 독립운동에 힘써왔다. 그런 그녀가 권애라와 함께 독립선언서 배
포를 도맡고 개성의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서울=뉴시스】3·1운동 당시 모습(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뉴시스】3·1운동 당시 모습(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3월1일. '일하는 사람이 너무도 없어 걱정'이던 개성은 거리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민중으로 가득 찼다.

어윤희와 권애라를 지켜본 개성의 미리흠여학교 학생들은 미리 자퇴서를 학교에 써낸 뒤 시위에 동참했다. 게다가 15세, 16세 학생들로 구성된 소년대는 수천 군중과 함께 일본인들의 집에 걸린 일장기를 찢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에 대한 열망을 쏟아냈다.

권애라는 개성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9개월 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사에서 3·1운동 1주년을 맞이했을 때는 함께 수감됐던 동료들과 '옥사 대한독립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녀는 출소 이후에도 독립을 위한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곳곳에서 애국사상 고취를 위한 강연회를 이어간 것이다. 특히 독립에 대한 마음뿐, 선뜻 행동으로 나서기 어려웠던 당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애국사상에 대한 열변을 토해냈다.

일제 강점이 서슬퍼런 시기에 20대 여성이 나서서 애국사상을 외치는 일은 보기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반도의 희망', '잘 살읍시다' 등의 제목으로 한국 여성들의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노력했다.

권애라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연설에 입석한 종로서 형사 '삼륜이'란 놈이 연사를 멈추라고 소리치지 않겠습니까. 하도 분해서 그러면 노래를 불러도 좋으냐고 물으니 좋다고 해 '박연폭포'와 '난봉가'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청중의 한 청년이 "젊은 여자가 신성한 연단에서 난봉가가 무어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 속이 오죽했을까요. 형사가 말을 하지 말라고 해 조선사람이 조선말로 노래를 부르는데, 따라부르지 못할 망정 왜 훼방이냐고 발을 동동 굴렀죠."

강연회는 중단됐고 권애라는 선동죄로 종로경찰서에서 27일간 구류돼야 했다. 그 이후 '권박연폭포'니 '권난봉이'하는 '명예로운'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22년 1월에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한민족 여성 대표로서 참가했다. 1929년에는 중국 경해여숙대학을 다니며 상해를 중심으로 여성 지위 향상에 힘썼다. 광복운동과 항일운동도 꾸준히 이어갔다.

특히 중국 동삼성 등지에서 지하항일운동을 해오던 그녀는 일본 관동군에 체포돼 1년 이상 고문 취조를 겪기도 했다.

장춘고등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은 그녀는 1945년 광복과 함께 석방됐다.

일하는 사람이 너무 없던 개성을 시작으로 서대문형무소, 중국에서도 애국사상을 피워냈던 권애라는 1973년 7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한떨기 불꽃이던 삶이 '낙화'한 것이다.

김인호 동의대 사학과 교수는 "여성들이 전근대사에서 핍박을 받아왔는데 3·1운동에서 여성 참가가 상당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3·1운동 저변에는 가장 박해받던 여성들이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마음을 조선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낸 것"이라며 "(권애라 여사처럼) 여성이 사람으로 인정받음을 넘어 주체적으로 나서게 된 시기로도 볼 수 있다"고 평했다.

▲참고자료 : 김삼웅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 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권광욱 <권애라와 김시현>, 박용옥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여성운동>, 이병헌 <3·1운동비사>, 이만규 <신문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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