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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년과 여성]③"이화림 서훈 여부, 한국 수준 바로미터 될 것"

사회주의자라서 저평가…훈장 하나 없어
탐탁치 않아 한 김구…저평가 영향 분석도
실제로 김구 '백범일지'에 언급 전혀 없어
학자들, 이화림 재평가 필요성 한 목소리
"윤봉길과 홍커우 공원 같이 갔던 인물"
"이런 사람이 역사책에 한 자도 안 나와"
"이화림이 독립운동가였던 사실 안 변해"

등록 2019.02.27 06:00:00수정 2019.02.27 14: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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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1938년께 중국 중경에서 활동하던 이화림의 모습. (사진=박경철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

【서울=뉴시스】 1938년께 중국 중경에서 활동하던 이화림의 모습. (사진=박경철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투사(鬪士). 이화림(1905~1999)을 수식하는 가장 적확한 단어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투사라 칭하는 건 아니다. 실제 그의 삶이 민족 독립을 위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이화림은 후방에서 독립운동을 지원 사격한 게 아니라 최일선에서 싸웠다. 그는 스스로 투사의 길을 택했고, 자신이 생각한대로 살았다.

그래서 강영심 전 이화여대 교수는 이화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가족이나 결혼과 같은 전통적이고 개인적인 여성의 삶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 독립, 조선 혁명을 위해 일신을 아끼지 않았다."

이화림은 중국 중산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유학생 김창국과 결혼했다. 하지만 독립운동 참여를 놓고 갈등하다가 남편과 갈라섰다. 독립운동을 위해 선택한 이혼이었다.

15살의 나이에 3·1운동에 참여하고, 26살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일념으로 혈혈단신 중국 상해로 건너가 김구와 윤봉길과 이봉창을 만나 거사를 치렀다. 이후 중국 광저우 등에서 민족혁명당 당원으로,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민족 독립과 조선 혁명을 위해 살았다. '시대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시대를 이해하고 그 시대를 뛰어넘는다.' 당시에 찾아보기 힘든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이자 명백한 독립운동가였지만, 그에게 추서된 훈장 하나 없다.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최근 이화림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이화림 선생이 사회주의자로 활동했나. 아니지 않나. 그는 독립을 위해 싸워왔다. 이 선생이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때는 다른 이념이 공존하던 시대였고, 그는 어떤 이념이라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이념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윤봉길과 홍커우 공원을 같이 갔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 역사책에 한 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이거 분명히 문제 있는 거 아닌가."

김지욱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도 같은 말을 한다.

"과거에는 이념이 곧 국가 존립과 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민감했고, 이화림 같은 인물들을 쉬쉬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시대가 끝나지 않았나. 이화림이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화림이 이렇게 저평가 된 데에는 김구의 영향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김구가 '백범 일지'에 이화림에 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고 있어서다. 이화림이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이 김구가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애써 외면한 인물을 추어올리는 게 오랜 시간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거라는 해석이다.
【서울=뉴시스】 말년의 이화림. (사진=박경철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

【서울=뉴시스】 말년의 이화림. (사진=박경철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

사상적인 이유로 김구가 이화림을 탐탁치 않아 했다는 건 이화림이 쓴 책 '이화림 회고록'(2015)에도 잘 나와 있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거사 이후 한인애국단은 일제에 쫓기며 뿔뿔이 흩어진다. 이화림은 중국 광저우로 가 대학을 다니며 의학을 배웠다. 이후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1939년 숨지면서 김구와 이화림이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때 김구가 이화림에게 물었다고 한다. "너 아직도 사회주의 믿느냐. 변함 없느냐." 이화림의 대답은 "믿는다"는 것이었고, 이에 김구는 다시 "우리는 다르다. 그래서 다시는 못 볼 것 같다"고 답했다.

중국어로 쓰인 '이화림 회고록'을 번역한 박경철 충남연구원 지역도시문화연구부 책임연구원은 "이화림을 서훈하느냐 안 하느냐가 우리 사회 수준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왔는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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