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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년과 여성]③"김마리아,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정신적 지주"

"여성독립운동의 금자탑 세운 인물로 평가"
3·1운동 기폭제 2·8독립선언서 국내로 반입
"가부장 사회서 여성이 단체 조직, 큰 의미"

등록 2019.02.2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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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김마리아. (제공=국가보훈처)

【서울=뉴시스】김마리아. (제공=국가보훈처)

【서울=뉴시스】남빛나라 기자 김은비·이창환·윤해리 수습기자 = "당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2등 인간이었다. 그런 시대에 '여성은 2등 인간이 아닌 주체적 인간'이란 생각으로 한국 여성독립운동사에서 기폭제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신 분."(김희선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개인의 영달은 뒤로 하고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 몸을 던진 김마리아(1892~1944). 그는 명망 있는 가문의 막내딸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교육에 힘쓴 인사였고 어머니는 "마리아를 꼭 외국으로 보내 공부시켜라"고 당부할 만큼 생각이 트인 사람이었다.

김 회장은 "김마리아 선생은 독립군자금을 꾸리는 데도 큰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여성독립운동가들을 하나로 조직했다"며 "한국 여성독립운동의 금자탑을 세운 인물이라는 평가가 지나치지 않다"고 말했다.

일본에 유학한 엘리트였던 김마리아는 교사로 조용히 살 수도 있었지만 고문과 투쟁으로 점철된 길을 택한다.
【서울=뉴시스】3·1운동 당시 모습(제공=국사편찬위원회)

【서울=뉴시스】3·1운동 당시 모습(제공=국사편찬위원회)

그는 1919년 재일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적극 참여하고 선언문을 일본 몰래 국내로 반입했다.

김 회장은 "본국을 침략한 일본에서 유학 중인 여학생들이 남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을 외쳤다"며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복판인 동경에서 일본의 조선 유학생들이 최초로 독립선언서를 선포했다"고 밝혔다.

반 교수는 "당시 외국과 국내가 요즘처럼 왕래, 연락이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사람을 파견하거나 편지를 보내며 협력해야 했다"며 "선생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와 여러 사람을 만나 독립선언을 해야 한다는 취지로 설득했다. 직접 선언서를 들고 와서 아주 중요한 고리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일본 경찰이 포위한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던 김마리아는 그해 10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선출된다. 그는 조선 여성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설파했다.

책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저자 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는 "당시 여성들은 독립을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바람에 불을 지핀 게 바로 김마리아 선생"이라며 "그 시대 여성은 모두 선생을 존경하고 그가 하는 일에 따랐다"고 말했다.

이어 "여러 여성단체 중 애국부인회가 가장 규모가 크고 존재감이 두드러져 일제가 두려워할 만했다"며 "선생은 독립은 독립전쟁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독립전쟁에 여자들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나서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를 조직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라고 봤다.
【서울=뉴시스】남빛나라 기자 = 김마리아, 안창호, 차경신. (제공 = 국가보훈처)

【서울=뉴시스】남빛나라 기자 = 김마리아, 안창호, 차경신. (제공 = 국가보훈처)

애국부인회 활동이 배신자에 의해 일본 경찰에 발각돼 김마리아는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20년 5월 사경을 헤매다 병보석으로 출소했지만 이 여파로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독립투사로서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가 된 김철수의 일화를 보면 김마리아가 겪은 고문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 수 있다.

반 교수는 "김마리아 선생은 1923년 상해 국민대표회의에서 한 자리에 오래 앉아있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고 그랬다. 고문의 후유증 때문"이라며 "김철수는 그런 김마리아를 안타까워하며 평생 김마리아 선생의 사진을 탁상 위에 뒀다"고 말했다.

박 전 교수는 "출소 직후 상해로 망명할 당시, 건강이 너무 나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기도 어려운 상태였다"며 "선생은 우뚝 솟은 독립운동가였다. 선생을 망명하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은 임시정부 입장에서 전쟁터에서 만군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김 마리아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조국에 가지 못하고 미국에 머물던 1920년대에도 독립운동을 쉬지 않았다.

박 전 교수는 "'독립을 위해서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일하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열심히 공부해서 경제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실력을 쌓아야 독립을 할 수 있다'고 늘 주장했다"며 "미국에서도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해 국제적 안목을 갖고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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