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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백년과 여성]②유관순은 누구…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민족 열사'

어린 시절 활발하고 적극적인 '대장' 성격
소꿉친구 "여자인데도 커서 대장 된다고"
이화학당 장학생 편입 후 독립 활동 참여
고종 황제 서거 후 5인 결사대 조직 나서
3·1운동 이후 고향 돌아가 만세운동 주도
체포 후 7년 중형 언도…옥살이 끝에 순국

등록 2019.03.01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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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제공

【서울=뉴시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제공

【서울=뉴시스】김지은 기자 = 유관순(1902~1920)은 3·1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꼽힌다. 비폭력주의의 만세 운동을 펼친 인물로서 우리 민족에겐 민주주의와 자유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유관순은 1902년 양력 12월16일 충청남도 목천에서 태어났다.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쓰는 가운데 일본은 '탈아론(脫亞論)'을 내세워 아시아 침략의 야망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한반도를 두고 러시아와 대립하던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어 '조선 지배' 의지를 표명한 해가 바로 유관순이 태어난 1902년이다.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에서 3남2녀의 둘째 딸로 자란 유관순은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다. 누가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쳐 성경을 외운 것과, 공부에 재능을 보여 이화학당에 장학생으로 들어간 일화는 유명하다.

유관순은 동무들과 놀 때 대장을 자처했고 부모의 말에 순종했다. 하지만 비단 어른의 말이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면 한사코 듣지 않는 뚜렷한 주관을 갖추고 있었다. 유관순의 소꿉친구 고(故) 남동순 열사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여자인데도 커서 대장이 되겠다고 했다. 뭘 하면 열심히 하고 안하면 딱 안하는 성격"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16년 지령리 교회의 샤프 선교사 추천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했으며 1918년 고등과로 진급한 유관순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이화학당 학생들이 오후 3시께 꾸준히 가져왔던 조국 독립 기도회에 활발히 참여했다. 또 학생단체 '이문회(以文會)'의 일원으로 토론 활동을 하며 회의 조직력과 발언법 등에 대해서도 교육을 받았다.

고종 황제가 서거한 1919년 1월22일, 국민들이 흐느껴 울고 선배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유관순 역시 친한 동기들과 '5인 결사대'를 조직한다. 이들은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몸에 태극기를 지니고 다녔다.
【서울=뉴시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제공

【서울=뉴시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제공

1919년 3월1일. 이화학당 교문 앞에는 몰려나온 학생들과 프라이 이화학당 교장이 대치했다. 거리에 뛰어나가 만세를 외치기 위해 교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하는 학생들을 교장은 "연약한 학생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며 막아섰다. 완강하게 두 팔을 벌린 교장과 맞서던 학생들은 밀치고 당기며 몸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프라이 교장의 방어선은 거센 물결 앞에서 절로 허물어졌다. 학생들은 서로 팔을 끌고 등을 타며 담을 넘었고 만세를 외치는 대열 속으로 파고들었다. 멈출 수 없는 군중의 행진 속에 유관순도 함께 하고 있었다.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지게 부르며 유관순의 마음 속에 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가 본격적으로 태동했다.

대한독립 운동에 눈을 뜬 유관순은 3월5일 학생단 시위에 참석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됐고 3월13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만세 운동의 소식을 고향 사람들에게 전하고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충남 천안시 아우내 장터(병천시장)에서 벌일 운동 계획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유관순은 독립선언서를 구하기 위해 미리 서울까지 다녀왔으며 아픈 사촌 언니 몫까지 떠맡아 홀로 시위 연락을 담당했다.

후에 박인덕 이화학당 선생은 자서전을 통해 "유관순은 고향 마을 사람들과 주변 지역 사람들을 분기시키고,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장날 시위운동을 조직했다. 독립운동을 하자는 전갈을 전하기 위해 몇 십리 길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며 영웅적 역할을 증언하기도 했다.

4월1일(음력 3월1일) 병천시장에서 열린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서 유관순은 군중을 이끌며 만세 운동을 주동했다. 하지만 이날 일제 헌병의 총칼에 부모를 잃고 체포돼 징역 7년의 중형을 선고받게 된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재판장에서도 당당하게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밝힌 유관순에게 법정모독죄를 씌워 더 중형을 선고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서울=뉴시스】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기록표 사진(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서울=뉴시스】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기록표 사진(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하지만 유관순은 고등법원 상고조차 홀로 하지 않았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 출간한 책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 유관순'에 따르면 그는 주위 사람들의 설득에도 "삼천리 강산이 어디면 감옥이 아니겠느냐"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유관순은 서울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수감됐다. 가로 세로 1m의 방에서 머물다 지하감방의 취조실에서 취조를 받고 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학대 속에서도 유관순은 수시로 만세를 외치며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독립선언서의 공약을 따랐다.

3·1운동이 1주년을 맞는 1920년 3월1일에는 감옥 안에서도 수감자들을 이끌어 함께 만세를 불렀고, 이에 3000여명의 수감자들이 호응해 바깥까지 그 소리가 퍼져나갔다.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 경찰까지 출동했다. 유관순은 이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을 당했다.

유관순의 형기는 영친왕 결혼에 따른 특별사면령으로 절반인 1년6개월로 감형됐다. 그러나 유관순은 감옥 안에서 지속적으로 받아온 학대와 영양실조로 인해 이화학당의 월터 선생과 오빠 유우석이 면회를 갔을 때 얼굴이 퉁퉁 붓고 전신이 퍼렇게 멍이 들 만큼 병이 들었다.

결국 유관순은 쇠창살 사이로 새어들어오던 빛을 온 몸으로 맞아보지 못하고 1920년 9월28일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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