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광장

[5·18 이젠 발포명령자다①]계엄군 총부리에 맞선 열흘 간의 '핏빛 항쟁'

등록 2020.01.01 07:00:00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블로그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5·18 이젠 발포명령자다①]계엄군 총부리에 맞선 열흘 간의 '핏빛 항쟁'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위원회가 5·18 40주기를 맞아 본격 활동에 나선다. 발포명령 등 드러나지 않은 핵심 의혹들이 밝혀질 지 지대한 관심이 쏠린다. 국방부의 헬기사격 인정과 전두환 재판에 이어 지난해 말 옛 광주교도소에서 신원 미상 유해까지 발견되면서 그 어느 해보다 진실 규명의 목소리가 거세다.

이번이야 말로 5·18 집단발포의 실체적 진실을 밝힐 마지막 기회라는 목소리가 높다. 조사위는 역사 왜곡에 대한 마침표를 찍고, 발포명령자를 찾아 책임을 묻는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어야 한다. 1980년 5월 계엄군의 '발포'에 초점을 맞춰 '5월 진실찾기'를 8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광주=뉴시스] 신대희 기자 = 작전명 '화려한 휴가'.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확대를 의결한 신군부는 7공수여단 33·35대대 공수부대원 688명을 광주로 보냈다. 5월18일 7공수 33대대는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인 전남대학교를 봉쇄했다. 계엄 해제를 요구하던 학생들을 군홧발로 짓이겼다. 항의하는 시민에게는 곤봉이 날아들었다.

광주역 광장에 하나 둘 모여 든 시민과 학생들의 발길은 광주의 심장 금남로를 향했다.

신군부의 잔혹함이 드러나기 시작한 같은 날 오후 4시 금남로. 공수부대원들은 시민을 향해 대검·곤봉을 휘둘렀다. 쓰러진 시민을 질질 끌고 가 트럭에 실었다. 이들의 잔혹함은 마치 '살인 면허'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첫 희생자도 나왔다. 청각장애인 김경철(당시 24세)씨가 충장로 제일극장 골목 입구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진압봉으로 머리를 맞아 다음 날 숨졌다. 18일 하루에만 405명이 연행됐다. 이 중 68명이 두부 외상, 타박상, 자상 등을 입었다. 12명은 중태였다.

광주는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신군부는 11공수를 추가 투입했다.
   
'탕!' 5월19일 오후 4시50분, 광주고 앞 도로. 첫 발포였다. 군(軍)이 보호대상인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11공수 63대대 장교가 쏜 M16소총에 김영찬(당시 조대부고 3학년)씨가 중상을 입었다.

이튿날에는 첫 집단발포가 이뤄졌다. 5월20일 오후 11시 광주역 앞에서 자행됐다. 3공수는 '16대대 운전병이 시위대 차량에 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역사를 뒤로 도열한 채 사격했다. 시민 5명(김재화·이북일·김만두·김재수·허봉)이 숨졌다. 부상자는 최소 11명이 넘었다.

시민들은 다음 날 새벽 광주역에서 김재화·허봉 씨의 주검을 발견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10만명 넘는 시민이 전남도청 앞 금남로로 집결했다.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켜달라'고 요구했지만, 끝내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21일엔 발포 수위가 극에 달했다. 오후 1시 정각, 전남도청 건물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11공수 부대원 등이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시작했다.

2시간 넘게 이어진 조준사격에 금남로는 피로 물들었다.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넋을 잃은 시민들은 분노와 공포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신군부의 '계획된 총살'이었다.

도청 앞 집단발포의 정확한 사상자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소 54명이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서울=뉴시스】19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무방비 상태의 시민에게 곤봉을 휘두르며 폭력을 가하는 계엄군의 모습. 정씨는 당시를 "한민족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기억했다. **저작권자 요청으로 회원사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2019.05.18 (제공=정태원씨)

【광주=뉴시스】19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무방비 상태의 시민에게 곤봉을 휘두르며 폭력을 가하는 계엄군의 모습. 정씨는 당시를 "한민족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기억했다. **저작권자 요청으로 회원사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2019.05.18 (제공=정태원씨)

신군부의 만행에 시민들도 "이대로 죽을 순 없다"며 불가피하게 무장에 나섰다. 시민군의 최초 무장 시점은 '도청 발포 이후인 21일 오후 1시30분'. 오후 3시20분에는 시민군이 계엄군의 사격에 응사하면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광주 시내 모든 병원은 총상환자로 넘쳐났다.

계엄군은 작전상 후퇴한 뒤 '광주 봉쇄→내부 교란→최종 진입'이라는 단계적 작전을 폈다.

계엄군을 앞세운 신군부는 26일까지 광주 안팎(주남마을·송암동·교도소 등)에서 11차례 이상 시민 학살을 자행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임산부에게도 총을 난사했다.

계엄군의 잔악한 학살을 목도한 항쟁 지도부는 26일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열었다. '80만 광주시민의 결의'로 군사 반란에 맞선 민주화운동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했다. 5·18 심장부인 도청에서는 '최후 항전'을 결의했다.

27일 오전 3시50분께. 도청에선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으로 불리는 재진입 작전을 확정했다. 같은 날 오전 4시 적막을 깨고 총성이 울렸다.

공수부대는 도청 뒷담을 뛰어넘어 내부로 돌격, 닥치는 대로 총을 쐈다. 도청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군은 진압 과정에 섬광수류탄 등 신무기까지 동원했다.

동이 터오기 시작한 오전 5시10분께 YMCA·YWCA·계림초등학교·전일빌딩·관광호텔 등이 계엄군의 손으로 속속 넘어갔다. 도청을 마지막으로 열흘 간에 걸친 광주시민의 항전은 끝을 맺었다. 계엄군의 조준사격, 집단발포, 진압형 난사로 금남로와 도청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그 날의 의로운 희생은 39년이 지난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등불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라고 지시한 학살 주범들은 40년째 범행을 부인하며 단 한 번도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다.
【서울=뉴시스】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곤봉과 최루탄을 동원해 시민군을 진압하는 계엄군의 모습. 정씨에 따르면 계엄군은 버스 창문을 깨고 그 안에 최루탄을 던져 넣는 수법을 썼다. **저작권자 요청으로 회원사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2019.05.18 (제공=정태원씨)

【광주=뉴시스】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곤봉과 최루탄을 동원해 시민군을 진압하는 계엄군의 모습. 정씨에 따르면 계엄군은 버스 창문을 깨고 그 안에 최루탄을 던져 넣는 수법을 썼다. **저작권자 요청으로 회원사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2019.05.18 (제공=정태원씨)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