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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 20주기②]"살려달라는 소릴 듣고도 못 구했어요. 그 생각이 참 오래가요"

등록 2015.06.28 10:15:32수정 2016.12.28 15: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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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홍찬선 기자 =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20년을 앞둔 27일 오후 서울 중구 예장동 서울소방재난본부에서 당시 구조활동에 나섰던 김명완 종합방재센터 주임이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5.06.27.  mania@newsis.com

【서울=뉴시스】김예지 기자 = 지난 1995년 6월29일 무너져 내린 삼풍백화점. 502명이 숨지고 6명이 실종됐다. 937명이 다쳤다.

 20년 전 그날, 현장에서 한달간 구조 작업에 힘썼던 소방대원들을 만났다. 지난 20년간 이들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시작으로 성수대교 붕괴부터 최근 노량진 매몰사고까지 크고 작은 재난 현장에 늘 있었다.

 "살려달라는 목소리를 듣고도 못 구한 적도 있어요. 그 생각이 참 오래가요. '그 사람을 구했어야 하는데.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했으면 살렸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지금은 일부러 그 때 생각을 안하려고 하죠."

 지난 27일 서울 중구 서울종합방재센터에서 만난 상황실 주임 김명완(50)씨는 말했다. 김씨는 사고 이후 삼풍백화점이 있던 쪽은 가본 적이 없다.  그 때 생각이 날까봐서다.

 김씨는 4년 전 소방학교에서 소방대원 교육을 담당했지만 그때도 삼풍 백화점 붕괴 당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얘기하기가 싫더라고요. 사람을 많이 구했으면 모르겠는데 너무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으니까."

 당시 김씨는 도봉소방서 구조대원이었다. '그날' 김씨는 집에 가는 버스 안에 있었다. 갑자기 버스 라디오에서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뉴스 속보가 들려왔다. 김씨는 "아, 비상이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버스에서 내려 소방서로 향했다.

 소방서에서 대원들과 함께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으로 간 김씨 막막했다. 무너져내린 건물은 시루떡처럼 차곡히 쌓인 콘크리트 덩어리로 변해있었다.

 김씨는 바로 백화점 지하 탐색 작업을 맡았다. 건물이 붕괴되면서 현장을 뒤덮은 석면 가루로 온몸이 따가웠다. 콘크리트 틈새를 찾아 기어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사람 있나요?"를 외쳤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김씨는 서점 쪽 시신 수습을 하던 중 땅에 머리를 박고 웅크린 채 엎드려 있는 여성 시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여성을 들춰내자 3~4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죽어 있었다. 외상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시신 수습이 주 작업이 돼버린 사고 발생 11일째 아침. 김씨는 시체 썩는 지독한 냄새에 코 밑에 참기름을 바르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콘크리트 상판 아래 시신이 보였다. 중장비로 상판을 들어올리려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거기 누구 있어요?" 외치는 김씨의 말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기 사람 있어요"라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11일만에 구조된 최명석(당시 20세)씨였다.

 현장에 있던 사람이 모두 몰려와 구조 작업을 시작했다. 최씨는 구조대가 현장에 뿌리는 물을 받아 먹으며 견디고 있었다. 김씨가 수습하려던 시신 바로 아래 쪽이었다. 최씨는 무너지지 않은 기둥과 콘크리트 더미가 만든 삼각형 모양의 작은 공간에서 큰 외상없이 구조됐다. 

 김씨가 최씨를 발견한 이후 중장비 작업은 중단됐다. 그 뒤 유지환(당시 18세·여)씨와 박승현(당시 19세·여)씨가 각각 13일, 17일만에 구조됐다. 중장비 작업이 계속됐다면 이들은 포크레인이 퍼내는 잔해물에 깔렸을 수도 있었다.

 김씨는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20년간 현장을 지켰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때나 지금의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에도 현장에서 답답함을 느낀다고 했다.

 "나아진 게 없어요. 딱 그때뿐이에요. 아직 멀었어요."

 김씨는 "삼풍 이후 장비가 보강되긴 했지만 강력한 컨트롤 타워가 없다"며 "서로 책임을 안 지려고 하다가 시간 놓치는 게 많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또 "사고가 날 때마다 법을 만들지만 그걸 지키는 사람이 없다"며 "안전관리사 채용하라고 해도 '벌금 내고말지'라면서 채용 안하는 것이 대표적"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중부소방서 구급대원이었던 서유원(58)씨는 지난 26일 기자와 만나 '잊고 싶지만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을 다시 꺼냈다. 그는 현재 다시 중부소방서로 돌아와 진압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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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는 "이번달이 삼풍 무너졌던 날인데 하는 생각은 했는데 벌써 20년이 됐는지는 몰랐다. 4, 5년 전밖에 안 된 거 같이 생생하다. 아직도 꿈 같지만"이라며 긴 탄식을 내뱉었다.

 서씨는 '그날' 중부소방서 구내식당에서 줄을 서서 배식을 받다가 현장으로 달려갔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고 하길래 '귀퉁이가 조금 무너진 것이겠지'라고 생각했어요. 상상도 못했죠. 펌프차 타고 서초동으로 가는데 전 건물이 무너졌다는 거에요. 말도 안된다고 계속 의심을 하면서 갔어요."

 서씨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높은 건물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앞이 안 보일 정도의 먼지만 뿌옇게 남아있었다. 인도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서씨는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폭격 맞은 것처럼.너무 흉악해서 자세히 얘기하고 싶지가 않다"며 몸서리쳤다.

 서씨는 인도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구급차로 옮긴 뒤 바로 건물 진입에 들어갔다. 허리를 굽히고 아직 무너지지 않은 틈새를 헤집고 들어가니 여기저기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객관적 사망'이 확실한 사람들이 보였다. 딱 붙어버린 콘크리트 사이에 끼어 있거나 철근에 박힌 사람들이었다.

 철근이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골반까지 관통한 20대 여성이 보였다. '살려달라'고 힘겹게 말하고 있었다. 철근을 빼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서씨는 철근을 절단해 이 여성을 구조했다. 그 뒤로 한시간여만에 15명을 구조해 나왔다. 모두 생존했다.

 서씨는 "살려달라고 하는데 못 살린 사람도 있다. 우리가 간신히 들어가긴 했는데 장비를 들고 못 들어가니까. 또 빠른 시간 내에 구조를 안 하면 살릴 수 있는 사람도 못 살리니 생존 가능성 있는 사람들을 먼저 살려야 했다"라며 " 너무나도 죄송하지만 그 분들을 위해서 시간을 쓰면 생존자들을 구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서씨는 "현장에서는 슬픔을 나눌 겨를이 없다"며 "슬프거나 기쁘거나 두렵거나 하는 감정을 느낄 새가 없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사고 발생 일주일이 지나자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코피가 날 만큼 독했다.

 "망자를 찾아서 보면 새카만 물이 막 나와요. 비닐로 싸서 옮기는데 그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잘못하면 그 물을 그대로 뒤집어 쓰기도 수없이 했죠. 놀랄 겨를도 없이 대충 씻고 또다시 작업에 투입됐어요. 골든타임은 지났지만 그래도 분명 어딘가에 생존자는 있으니까요."

 서씨는 그해 말 소방서에서 편지를 받았다. 당시 28세 삼풍백화점 직원이었던 부상자의 편지였다.

 "살려달라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보니 다리가 콘크리트에 깔려있었어서 구해줬던 분이에요. '평생 구조해준 것 잊지 않고 감사함을 간직하며 살겠다'고 편지가 왔는데 참 반가웠죠. 건강히 지낸다니 고맙고요. 다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일하는 건데 그 한 사람이 살아있다니까요."

 서씨는 사고 발생 1년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악몽에 시달려 깨기 일쑤였다. 그 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진단을 받아 2년간 약을 복용했다.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재난 현장에 출동해 인명구조를 이어갔다. 그렇게 삼풍 백화점 참사 이후 20년을 일했다. 지난해에는 화재 현장에서 떨어져 갈비뼈 4개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때도 심리 치료를 받았다.  

 "우리 애가 심리학 대학원에 다니는데 교수님이 제가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인터뷰했던 다큐멘터리를 수업시간에 틀어줬대요. 딸이 너무 놀랐다면서 치료받는 과정이 쭉 다 나오는데 그렇게까지 아빠가 힘든지는 몰랐다고 슬펐다고 하더라고요." 

 정년이 2년 남은 서씨는 "이 일은 저에게 천직이에요. 지금처럼 현장에서 일하다 퇴직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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