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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갑'에 짓눌린 '을'에 대한 처방전···연극 '비너스 인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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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7-08-14 13:5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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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연극 '비너스 인 퍼'.  2017.08.13. (사진 = 달컴퍼니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어떤 영역에서든 을로서 권력으로부터 부당함을 느꼈다면, 이 연극은 마땅한 처방전이 될 수 있다.

 마조히즘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자허마조흐의 동명 소설(1870)을 바탕으로 한 '비너스 인 퍼'다. 극작가 데이비드 아이브스가 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한 작품으로, 권력이 갖는 힘을 에로틱한 블랙 코미디로 풀었다.

여배우 '벤다'가 뒤늦게 오디션장에 도착해 연출가 '토마스'와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오디션을 진행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멍청한 여배우들을 극도로 싫어하고, 여배우들에게 모욕감을 줌으로써 그 여배우들에 대한 자신의 권력을 주장하는 새디스틱한 연출가인 토마스, 그런 토마스가 쓴 작품을 'SM 포르노'라며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상대역할을 강요하는 당돌한 여배우 벤다.

두 사람은 역할 놀이를 통해 권력을 쥐거나 또는 빼앗긴다. SM, 즉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번갈아 느끼는 두 사람은 묘한 흥분 또는 쾌감, 그리고 긴장까지 안는다.

토마스는 이 과정에서 벤다의 당돌함에 종종 신경이 거슬리지만, 자신이 '언제나 우위에 있다'는 안정된 정서의 바탕 위에서 기꺼이 그녀의 도전을 받아준다. 자허마조흐의 피학적 성향이 배어 있는 캐릭터다.

하지만 애달파 보이던 벤다는 점차 난공불락 같은 권력에 조금씩 균열을 가져온다. 특히 그녀가 마지막에 토마스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며 권력을 전복시킬 때의 반전에서 주는 쾌감이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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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연극 '비너스 인 퍼'.  2017.08.13. (사진 = 달컴퍼니 제공) photo@newsis.com
극 중 대본 속의 '쿠솀스키와 두나예브', 그리고 신화 속 '비너스'를 절묘하게 뒤섞으며 현실과 경계를 넘나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비너스 인 퍼'의 진정한 마술은 그런데 바로 지금, 2017년 대한민국에 투영가능하다는 점이다.

시시포스의 언덕처럼 을이 끊임없이 저항의 바위를 굴려 올려도, 그것이 스스로를 다시 짓누르는 상황. '비너스 인 퍼'는 단지 페미니즘을 넘어 한국 사회의 갑과 을의 깊은 기슭을 보여주는 단면화이기도 하다.

벤다가 먹물 지성 토마스에 대해 통쾌하면서도 섹시한 전복을 만들 때, 남녀 관계를 넘어 이 세상의 갑에 대한 모든 을의 판타지로도 읽힌다.

2인극으로 배우들의 호흡도 차지다. 두 인물과 그들 간의 갈등구조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객석을 양면에 배치한 런웨이 무대로 관객들을 맞는데도 배우들은 흔들림이 없다. 토마스 역의 이도엽과 지현준의 연기도 일품이지만 사랑스럽고 섹시하지만 주체적인 벤다 역의 방진의와 이경미가 발군이다.

일부 여혐이 넘치는 최근 연극계에서 벤다는 가장 통쾌한 캐릭터다. 토마스가 삶에서 경험할 수 없는 열정을 느끼기 위해 연극을 본다고 말할 때, 벤다는 경험할 수 없는 열정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삶에 더 적극적으로 뛰어 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자주적인 여성을 방진의와 이경미는 균형 감각 있게 소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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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연극 '비너스 인 퍼'.  2017.08.13. (사진 = 달컴퍼니 제공) photo@newsis.com
 
'명동 로망스' '씨왓아이워너씨' '스프링어웨이크닝' 등의 김민정이 연출, 박용호가 프로듀서를 맡았다. 오는 27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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