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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유해 찾나…러 언론 '기독교 묘지' 최초 언급

등록 2019.05.28 15:01:11수정 2019.05.28 16:3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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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안중근 의사 관련 러 언론 24건 첫 공개

기존 추정과 다른 매장지…신뢰성 확보할 필요 있어

안중근 "조국해방 첫번째 선구자"…생생한 심문기록도

【성남=뉴시스】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28일 공개한 안중근 의사 관련 보도가 실린 '우수리스까야 아끄라이나지(紙)'. 이 신문은 1910년 4월 21일자에 '안중근은 사형 집행 후 관에 넣어져 튜렘(교도소)의 작은 예배당으로 옮겨졌다가 지역 기독교 묘지에 매장됐다. 안중근은 하얼빈에 안장되길 원하였고, 친척들은 그의 시신을 조선으로 가져가기를 원하였으나 허가를 받지는 못하였다'고 보도했다. 종전 안 의사의 매장지는 교도소 내 묘지로 알려져 있었다. 2019.05.28. (자료= 국가기록원 제공)

【성남=뉴시스】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28일 공개한 안중근 의사 관련 보도가 실린 '우수리스까야 아끄라이나지(紙)'. 이 신문은 1910년 4월 21일자에 '안중근은 사형 집행 후 관에 넣어져 튜렘(교도소)의 작은 예배당으로 옮겨졌다가 지역 기독교 묘지에 매장됐다. 안중근은 하얼빈에 안장되길 원하였고, 친척들은 그의 시신을 조선으로 가져가기를 원하였으나 허가를 받지는 못하였다'고 보도했다. 종전 안 의사의 매장지는 교도소 내 묘지로 알려져 있었다. 2019.05.28. (자료= 국가기록원 제공)

【성남=뉴시스】변해정 기자 = 조국의 독립을 꿈꿨던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유해가 중국 뤼순 감옥 인근 기독교 묘지에 매장됐다는 러시아 신문 기사가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그간 안 의사의 유력한 매장지로 뤼순 감옥 공동묘지 터가 지목됐던터라 정부 차원의 추가 확인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28일 경기 성남시 나라기록관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키 등 극동지역 일간지들이 보도한 안 의사 관련 기사 24건을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기록물은 기록원이 지난 2015년 독립 운동과 우리 동포 관련 기록물이 다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극동지역의 신문 기사를 기획 수집하던 중 발굴했다.

해당 기사는 안 의사 의거일 다음 날인 1909년 10월 27일부터 1910년 4월 21일까지 보도된 것들이다.

그간 안 의사 관련 러시아 신문 기사가 단편적으로 소개된 적은 있지만, 여러 신문의 관련 기사를 한꺼번에 모아서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사에는 안 의사에 대한 일제의 첫 심문부터 사형 집행까지의 과정과 발언 내용, 차이쟈고우에서의 의거 준비·체포 과정·하얼빈 의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인식 등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특히 안 의사의 매장지와 관련된 기사가 주목을 끈다. 바로 '우수리스까야 아끄라이나'의 1910년 4월 21일자 보도다. 

김원회 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의 번역에 따르면 이 신문은 '안중근은 사형 집행 후 관에 넣어져 튜렘(교도소)의 작은 예배당으로 옮겨졌다가 지역 기독교 묘지에 매장됐다. 안중근은 하얼빈에 안장되길 원하였고, 친척들은 그의 시신을 조선으로 가져가기를 원하였으나 허가를 받지는 못하였다'고 보도했다.

종전 안 의사의 매장지는 감옥 내 공동묘지로 알려져 있었다.

김형국 국가기록원 연구협력과장은 "기존에 매장지는 교도소 내 묘지로 알려졌었는데 안 의사가 '천주교도'라 그렇게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교도소) 근처에 기독교 묘지가 있는지는 현재까지 확인이 안 됐다. 새로운 표현에 대한 신뢰성은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 의사는 자신의 뼈를 중국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국권을 되찾으면 고국으로 옮겨달라는 말을 남겼었는데 지금까지도 유해를 발굴하지 못해 그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신문인 '달리니 보스톡'는 안 의사 의거일 이틀 뒤인 1909년 10월 28일자에 '26일 아침 9시 최전선 열병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공작은 치명적 총상을 입었다. 조선인으로 밝혀진 범인이 체포되었고, 심문에 응했으며, 자신의 조국을 위하여 공작을 살해하기 위하여 특별히 도착하였으며 공작이 조선에 있는 동안 자신의 친지들을 몇 명 사형에 처했다고 하였다. 이번 사건을 분명히 사전에 계획한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보스토치나야 자랴'는 1909년 11월 2일자와 4일자에 일본 총영사관에서 있었던 안 의사의 첫 심문을 실었다. 안 의사는 당시 법정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의 이성과 심장은 조국에서 그들(일본인)에 의해 병을 얻었다. 죽으면서 나는 기쁘다. 나는 조국 해방을 위해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썼다.

신문은 또 '이토의 죽음을 조선인(안 의사 일행)들은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다. 몇 번이나 진짜로 이토가 암살됐는지를 물었고, 연속적으로 그 사실이 확인되자 참을 수 없는 흥분 상태에 빠졌다'며 안 의사가 "일본인들에게는 그런 일이 벌어져야 한다. 그들은 우리 조국을 빼앗고 국유재산을 강탈했으며 우리 황제에게 금전적 부담을 안겨주었다"고 언급했다고 썼다.

'쁘리 아무리예'는 1909년 11월 2일자에 안 의사와 우덕순, 조도선이 차이쟈고우의 우편열차 정거장에서 하차하는 것부터 거사를 위해 안 의사가 하얼빈으로 떠날 때 서로 눈물을 흘리며 큰 절로 인사하는 모습을 르포 형식으로 게재했다.

이 신문은 나흘 뒤인 11월 6일자에는 안 의사와 우덕순, 조도선이 러시아 장교에 의해 기차역으로 옮겨진 뒤 감옥으로 이송된 1일의 상황도 상세히 보도했다. '기차에 오르는 모든 체포자들은 발에 족쇄를 차고 있었고, 안중근은 예외적으로 손과 발에 모두 족쇄를 차고 있었다. 열차 칸에는 마지막으로 안중근이 올라탔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였으며,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히 무관심을 보였다. 열차에 태운 다음 조선인들의 족쇄는 모두 풀어졌다. 조선인들 주변에 한 명씩의 일본 헌병이 서 있었다. 호송되는 조선인들은 십자로 손을 묶었고, 밧줄의 끝은 헌병들에게 넘겨졌다. 11시25분에 열차는 플랫홈을 떠났고, 체포자들을 호송하라는 전보 명령이 떨어졌다. 의심이 가는 모든 조선인들은 기차역의 정거장마다 억류하라는 명령도 떨어졌다'고 묘사했다.
  
1910년 2월 27일자에서는 전날(2월 26일) 안 의사의 법정 진술과 사형선고 당시의 상황을 소개했다. 이 신문은 '안중근에 대한 사형이 선고되었다. 선고에 앞서 그에게 할 말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안중근은 약 1시간에 걸쳐 흥분하여 말하기를 '모든 조선사람들이 이토를 혐오하고 조선 민족의 원수인 그를 나쁜 짓을 하는 무대에서 하루빨리 몰아내는 것이 자신(나)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모두가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 같았다. 암살자는 극도로 안정되어 보였다'고 기술해놨다.

신문은 또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가족에 누를 끼치지 말고, 가치있게 죽음을 맞으라는 부탁과 함께 마지막 헤어짐의 인사말을 그에게 보냈다'며 안 의사의 모친 조마리아 여사의 발언도 함께 실었다.

이소연 국가기록원장은 "안 의사 의거 110주년을 맞아 독립정신을 실천했던 안 의사의 의연한 모습을 국민에게 알리고자 공개하게 됐다"며 "안 의사와 하얼빈 의거에 대한 러시아의 인식뿐 아니라 의거 준비, 체포, 일본영사관 인계과정 등 사후 조치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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