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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지키면 바보?…이춘재 잡은 유전자 분석 현실 '처참'

등록 2019.10.17 1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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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체 분석업체 서비스 ‘천차만별’

국내 업체에만 DTC 항목 제약

너도나도 해외법인 통한 우회적 서비스 추진

“전 세계와 동떨어진 유전자 규정, 한국 업체만 뒤떨어진다”

【서울=뉴시스】사진: 온라인 판매처에서 판매 중인 DTC 품목(왼쪽), 해당 DTC 상품(오른쪽)

【서울=뉴시스】사진: 온라인 판매처에서 판매 중인 DTC 품목(왼쪽), 해당 DTC 상품(오른쪽)

【서울=뉴시스】송연주 기자 = #A유전체 분석 서비스 업체의 유전자 분석 키트를 온라인 판매처에서 5만원에 구입하면 위암·대장암·폐암·간암 등 암에 걸릴 위험은 없는지 분석해준다. 소비자는 A업체가 보내준 택배 기사한테 침(타액)이 담긴 키트를 다시 보내고 홈페이지에 키트 고유번호를 입력하기만 하면 된다. 약 2주면 유전자를 분석해 취약한 질병은 무엇인지 분석해준다.

#그런데 똑같이 유전체 분석을 하는 B업체의 키트를 사면, 비슷한 가격인데도 암은 커녕 피부·탈모·비타민C 등 간단한 사항의 유전적 정보밖에 못 얻는다.

업체마다 서비스하는 범위가 천차만별인 배경에는 유전체 분석 관련 모순된 규정이 있다. 허용 가능한 유전자 항목을 매우 엄격하게 정해놓고, 해외법인 설립 등 법망을 피해가는 사례에 대해선 관리되지 않는 것이다.

한국은 지난 2016년 7월부터 소비자가 의료기관을 거치지 않고 위의 사례처럼 유전체 분석업체에 직접 의뢰할 수 있는 DTC(소비자 직접 의뢰 유전자검사)를 허용하고 있다.

유전체란 유전자의 집합체를 말하는 것이고, 유전체 분석 서비스란 유전적으로 타고난 체내 위험 요인을 파악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허용 항목을 보면 매우 제한적이다. ▲체질량지수 ▲중성지방 농도 ▲콜레스테롤 ▲혈당 ▲혈압 ▲색소침착 ▲탈모 ▲모발굵기 ▲피부노화 ▲피부탄력 ▲비타민C 농도 ▲카페인대사 등 사실상 분석 동기를 유발하기 힘든 12개 항목(46개 유전자)으로만 제한하고 있다.

국내 규정상 A업체의 암 검사는 불법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A업체는 국내지사가 아닌 해외지사가 검사하는 방식으로 국내 법망에서 벗어났다. 한국인이 설립한 이 회사는 본사를 미국에, 일본·한국·싱가포르에 지사를 두면서 DTC 허용 이외 서비스 제품은 일본법인이 제조·분석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즉 A코리아(한국지사)는 DTC 허용 서비스만 제공하고 A재팬(일본법인)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가 유전자 분석을 잘 모르는 경우 상담을 제공하고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본사 및 3개 지사의 대표는 모두 동일인(한국인)이다.

또 보험사·의료기관·건강기능식품사 등에만 제품을 판매(B TO B)하고 소비자에 직접 판매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지만, 사실상 인터넷 판매처에서 어렵지 않게 구매할 수 있다. 회사는 이들 온라인 판매처를 주기적으로 적발해 내용증명을 보내는 등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A업체 우후죽순…“한국 업체만 유전자 뒤떨어지고 있다”

A업체뿐 아니다. 해외 법인 설립 등으로 DTC 허용 항목 이외 제품을 판매하려는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이는 유전체 검사 관련 규정이 국내 업체에만 제약이 있다는 맹점을 파고든 것이다. 유전자 검사 관련 법령인 ‘생명 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는 해외법인 조항이 없다.

눈여겨볼 점은 경쟁 업체들이 A사를 탓하기보단 국내 현실을 탓한다는 점이다. 착실하게 법을 지키고 있는 기업조차도 편법이든 뭐든 가능하기만 하면 DTC 허용 이외 항목을 서비스하고 싶다고 아우성이다.

경찰이 33년 만에 이춘재를 화성연쇄살인사건 유력 용의자로 특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춘재의 유전자 분석 정보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경찰이 과거 수감자의 유전자 분석에 나섰고, 그 결과를 데이터로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전체 분석업체 관계자는 “유전자는 데이터의 싸움이고 시간과의 싸움”이라며 “가까운 중국만 보더라도 수많은 빅데이터를 쌓고 있다. 이미 한국 업체는 경쟁에 뒤떨어지고 있다. 미국, 일본, 중국 규제가 완화되며 자유롭게 검사하는 동안 한국 업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고 토로했다.

유전체 업체가 빅데이터를 쌓을 수 있는 방법은 연구용으로 제휴하거나 의료기관을 거치지 않고 소비자가 직접 업체에 의뢰하는 DTC 제품을 판매해 유전체 정보를 얻는 것뿐이다. 하지만 지난 2년간 국내 기업이 판매한 매출은 10억원 안팎이다. 서비스 항목이 12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미국인들의 조상을 찾아주는 `인터넷 족보 사이트` 앤시스트리닷컴과 글로벌 유전체 분석 기업 23andMe는 각 700만명과 500만명의 유전자 데이터를 확보했다.

업체 관계자는 “유전자 분석은 평생 한 번하면 되는 것”이라며 “해외법인이 일반 소비자의 유전자 분석을 다 하고나면 국내 업체는 분석할 기회마저 사라지게 된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편법을 통해서라도 데이터를 쌓고 싶어하는 게 모든 유전체 업체의 마음”이라며 “법을 지키면 바보가 되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DTC 시장 개방에 대한 수차례 논의에도 작년 12월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서 다시 한번 항목 확대를 저지했다. 유전자검사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지 않아 정확성이 떨어지는 상태에서 자칫 과잉진단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의료계의 의견을 많이 반영한 것이다.

그나마 DTC 항목을 12개에서 57개로 늘리기 위한 인증제 시범사업을 진행 중이지만 이마저 시작 단계서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복지부는 우선 관리를 강화해 해외법인을 통한 우회적 판매 등을 막겠다는 방침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DTC 허용 이외 항목의 서비스는 불가능 것”이라며 “현재 생명윤리법상 해외법인 관련 조항은 없지만, 해외 법인과 한국법인의 지배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국내 지사 혹은 대행업체가 수행하는 부분이 어떤 영역인지에 따라 유권해석 할 여지는 있다. 법률 검토 결과에 따라 조만간 행정처분, 수사의뢰 등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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