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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개도국' 낙인을 지우기 전에 했어야 할 일들

등록 2019.10.29 07: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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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개도국' 낙인을 지우기 전에 했어야 할 일들



【서울=뉴시스】이승재 기자 = "이제는 개발도상국 낙인을 지워야 할 때입니다."

얼마 전 만난 한 정부 관계자는 격앙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직접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이마를 드러내며 거기에 찍힌 '개도국 낙인'을 봐달라고 했다. 과거 몇 십 년 동안 국제무대에서 활약해온 그이기에 '오죽했으면'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한편으로는 지금도 한 달에 몇 번씩 해외로 나가 다른 나라 정부를 상대해야 하는 사람의 표현치고는 다소 과격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개도국의 정확한 의미를 다시 알아봤다.

인터넷 위키백과를 보면 개도국은 선진국보다 산업 근대화와 경제 개발이 크게 뒤지고 있어 현재 경제 성장을 목표로 하는 나라를 뜻한다. 보통 후진국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1조6194억 달러로 전 세계 205개 나라 가운데 12위를 차지했다. 국민들의 생활수준과 좀 더 밀접한 지표인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만600달러로 192개국 중 30위에 해당한다. 지표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경제 개발이 크게 뒤처진 후진국으로 볼 수 없다.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위치와 영향력은 어떨까. 다시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면 '과거와는 분명 달라졌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당시만 해도 국제회의에서 동양인(대부분 한국과 일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며 "지금은 먼저 우리의 견해를 묻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놓고 우리나라를 '잘 사는 나라'로 분류해버렸다. 한국은 미국이 제시한 개도국으로 인정할 수 없는 4가지 기준인 ▲OECD 가입국 ▲주요 20개국(G20) 회원국 ▲세계은행 기준 고소득 국가 ▲세계 상품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 0.5% 이상에 모두 해당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나라가 개도국 혜택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불만을 제기했다.

그간 우리나라가 혜택을 받아온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WTO 체제에서는 '자기선언 방식'으로 개도국 지위를 얻거나 포기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앞으로는 충분히 문제 삼을 수 있는 사안이라는 뜻이다. 실제 이를 꼬투리 잡는 나라들도 늘어나는 추세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언젠가는 내려놨어야 할 개도국 지위였다. 우리나라의 경제력과 국제 사회에서의 위치, 미국의 압박까지 정부가 개도국 지위를 내려놓아야 할 이유는 나름대로 타당했다. 많은 전문가도 적절한 시점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래도 농업계에 대한 배려는 필요했다. WTO에서 개도국 우대(S&D)를 규정한 조항은 약 150여개에 달한다. 이를 활용해 공산품과 농산물 관세 적용에서 선진국보다 유리한 조건을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다. 앞으로는 WTO 농업 관련 협상에서 이런 것들을 상대국에 요구할 수 없다. 정부는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만약 농업계에서 우려하는 일들이 현실화되면 농산물 가격은 떨어질 것이고 농가에 피해가 갈 수밖에 없다.

정부가 농업계에 제시한 가장 현실적인 보상은 공익형 직불제이다. 정부는 내년 관련 예산으로 2조2000억원을 편성해뒀지만 이마저도 불안하다. 지난해 11월 관련 법안이 발의된 이후 구체적인 논의 단계까지 나가지 못한 탓이다.

개도국 지위 졸업에 대한 합당한 대안이라고 말하기에도 개연성이 부족하다. 이 제도의 대전제는 농업이 우리 사회에서 공익적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쌀 등이 시장에서 적정한 가격을 받지 못하면 정부가 개입해 보상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관련 예산은 세금에서 나온다. 먼저 농업의 공익적 기능에 대해 면밀한 검토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이유다. 농업계의 반발이 멈추지 않는 것도 피해가 예상되는 부분에 대한 설득과 합리적인 보완 대책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익 차원에서 이번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일부 전문가는 미국의 자동차 관세 25% 부과에 앞서 정부가 선제적인 조치를 내린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얼마 전 미국 정부 관계자를 만나 개도국 문제와 자동차 관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익히 알다시피 자동차는 우리나라를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 준 대표적인 산업이다. 반대로 농업은 선진국에 비하면 취약하다. 1차(농업)보다 2차, 3차, 4차산업에 대한 가중치가 갈수록 높아져왔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우리의 근간인 농업이 무너지면 근본을 잃게 될 수 있다는 근원적 두려움도 상존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스스로를 '뒤쳐진 나라'라고 주장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자기선언'을 한 이제는 그런 주장도 설득력을 잃게 됐다. 대신 농업이 근간임을 잊지 않는 현명한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남는 여운 하나. 모두가 다 만족할 수는 없었겠지만, 노력은 해 봤어야 하지 않을까? 서둘러 '낙인'을 지우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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