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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정재일 콘서트, '기생충' OST는 일부···살풀이 통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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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0-02-16 09:42:02  |  수정 2020-02-16 18:14:55
영화, 연극, 국악, 전시 등 최근 10년간 작업한 곡들 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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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정재일. (사진 = 블루보이 제공) 2020.02.02. realpaper7@newsis.com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이렇게 우아하고 긴장감 넘치는 '엉터리 바로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OST '짜파구리'와 '믿음의 벨트'가 스크린 속이 아닌 공연장에서 라이브로 구현될 때 몸은 긴장감과 전율로 휩싸였다.

정재일은 바흐가 들으면 '이게 뭐냐'고 했을 것이라며 걱정했지만 우아하지만 어딘가에 애조가 깃든 것 같고, 점잖게 정색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뽕짝' 같은 분위기가 숨어 있는, 즉 시치미를 떼고 짐짓 모른 척하는 영화 '기생충'의 태도와 기가 막히게 접점을 이루는 음악들이다.

그런데 15일 오후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아이마켓홀에서 열린 정재일 단독 콘서트에서 이 음악들은 영상 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지난달 26일 할리우드에서 열린 '기생충' 특별 시사회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라이브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음악만을 위한 공연에서 이 음악이 울려퍼진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체임버 오케스트라 규모의 '더 퍼스트(The 1st)'가 들려주는 쫀쫀한 선율에 정재일의 피아노 그리고 강이채의 바이올린이 더해지자 어느 실내악 공연 이상으로 품격, 우아함, 강렬함이 피어올랐다. 특히 질주하는 강이채 연주의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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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정재일. (사진 = 블루보이 제공) 2020.02.02. realpaper7@newsis.com
정재일은 '기생충' OST 작업과 관련 "곡의 빗나가는 느낌, 절뚝거리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는 연주자가 누구일까 고민하다가 강이채 씨에게 연주를 부탁했었다"면서 "곡이 어려워 녹음이 2~3일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3시간 만에 끝낸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생충' OST는 이날 2시간20분짜리 광활한 음악 여정 중 한 정거장이었다. 영화 '오버 데어'(감독 장민승)의 '오버 데어'로 출발한 이날 공연은 최근 10년간 집약됐던 정재일의 놀랍도록 다채로운 음악세계를 집전한 자리였다.

또 2010년 발매한 솔로 2집 '정재일' 이후 자신의 앨범에 실린 곡이 아닌, 다른 창작자들과 작업한 여러 장르의 곡들에서 자신의 음악적 기록을 얼마나 성실히 '바득바득' 기록해왔는지를 절감한 자리였다. 영화, 연극, 국악 그리고 전시 음악까지 한 음악가의 세계가 이렇게 광대할 수 있다니. 

봉준호 감독과 또 다른 작업물인 영화 '옥자' OST '노 익셉션(no exceptions)'은 기타와 국악기 협업으로 선보였는데 질주감이 일품이었다. 봉 감독이 감독 대신 제작한 영화 '해무'의 삽입곡 'am 7:37'은 막바지에 울려 퍼졌는데 영화의 기운을 머금은 듯, 습식 사운드가 객석을 휘감았다. 

영화 '오버 데어'의 감독이자 작가 겸 가구 디자이너 장민승과 과거 선보인 전시회 '더 모멘트' 음악 '화이트, 그레이 앤드 블랙'은 피아노의 서정성이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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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정재일(사진 = 블루보이 제공) 2020.02.16. realpaper7@newsis.com

개인적으로 가장 전율이 일었던 곡은 고(故) 김동현 연출과 작업했던 연극 '그을린 사랑'(2012) 수록곡이었다. 그리스 비극을 연상케하는 극작가 와즈디 무아와드의 압도적 사사를 떠받치는 웅숭깊은 이 음악을 이제 라이브 현장에서는 듣기 힘들 것이라 여겼는데 귓가에서 현현했던 것이다.

'데이(They)'와 본 공연 막바지에 들려준 '트루스(truths)'는 삶의 무게감을 담아낸 연극의 아릿한 여운을 8년이 지난 지금 다시 새기게 했다.

가장 최근에 작업한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삽입곡 '소 두 아이(so do I)' 역시 연극에 기대지 않고 홀로 우뚝 섰다. 

이날 또 빛났던 순간들은 정재일 본인이 자신의 음악세계를 넓혔다고 밝힌 국악을 기반으로 한 음악들을 들려줬을 때다. 앞길의 행복을 비는 '비나리'는 정재일 구성과 소리꾼 김율희의 목소리로 다시 태어나 정말 축복받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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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정재일(사진 = 블루보이 제공) 2020.02.16. realpaper7@newsis.com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중 '어제, 어제, 바로 어제', 바리공주설화 속에서 배삼식 극작가, 소리꾼 한승석 그리고 정재일의 연주가 공동으로 길어 올린 성찰이 담겼던 음반 '바리abandoned'의 '건너가는 아이들'과 '아마, 아마, 메로 아마', 고수의 북이 아닌 정재일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국립창극단 단원인 소리꾼 김준수가 들려준 판소리 적벽가 중 '자룡, 활 쏘다' 등은 선물과도 같았다.

특히 퓨전국악그룹 '푸리'의 '둘셋'이 주는 타격감은 어마어마했다. 푸리 2기 멤버인 정재일은 푸리 1기곡인 '둘셋'을 사물놀이 느닷 등 국악연주자들과 함께, 록밴드의 강렬한 음악 이상으로 소화했다. 특히 정재일의 일렉 기타, 일렉 베이스 그리고 드럼 연주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공연장 벽을 활용한 정재일의 드럼 연주의 그림자 연출은 무대 예술이 줄 수 있는 감흥의 최대치였다. 이날 최소한의 조명만 활용해 음악에 오롯이 집중하게 만드는 구성과 연출도 일품이었다. 특히 '트루스'를 연주할 때 무대를 종으로 가로질렀던 조명의 눈금들이 하나씩 없어질 때의 여운은 오래도록 짙었다.

앙코르곡은 이날 초연한 '디어리스트(dearest)'. '디어(dear)'의 최상급으로 '사랑하는' 등의 뜻을 지닌 이 곡은 정재일이 존경하는 사람을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천재 뮤지션'이라 불리는 정재일의 매력 중 하나는 인간적이라는 점이다. '벼락같은 영감'보다 '성실한 노동'으로서 음악 작업을 대하는 그는 그래서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을 아끼고 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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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정재일(사진 = 블루보이 제공) 2020.02.16. realpaper7@newsis.com
이날 공연에서도 그러한 점이 한 가득 묻어났다. 2002년부터 자신과 오케스트레이션 작업을 해온 '더퍼스트'를 이끄는 콘서트마스터 이수, 전자음악 작업을 하는 이예지 등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했다.

'바리abandoned'의 노랫말을 쓰고 '트로이의 여인들' '그을린 사랑' 대본작업을 한 배삼식 작가에게도 감사함을 표했다. 배 작가가 쓴 창작극 '3월의 눈'에 대해 극찬하기도 한 정재일은 이 작품에 출연하기도 한 배우 정영숙과 함께 '아마, 아마, 메로 아마' 무대를 꾸몄다. 정영숙에 대한 존중도 깍듯했다.

정재일은 당연히 자신의 음악을 들으러 온 팬들도 각별히 아꼈다.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앞서 콘서트 전에 만났던 정재일은 이번 공연을 "살풀이"라고 정의했다. 살풀이는 타고난 살(煞)을 풀기 위해 하는 굿을 가리킨다. '살'은 사람을 해치는 독한 기운이다.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했고 기점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콘서트를 열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날 콘서트가 모두 끝난 후 그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위태위태한 힘겨운 삶 속에서도 포악해지거나 주저앉지 않고, 제례의식처럼 작업물들을 꿋꿋이 감당해온 그의 음악들은 머리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닌 몸으로 꾹꾹 눌러 새긴 것이었다.

정재일 덕에 우중충한 삶도 살아볼 만하다는 위로와 힘을 얻는다. 삶의 불안과 불가해한 요소로 점철됐던 삶의 어둠이 다시 기지개를 켠다. 막바지, 정재일이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더 뭔가 잘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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