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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시민군의 그날…"40년전 전남 도청은 지옥이었다"

등록 2020.05.18 0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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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 유일한 '준군사조직'

기동타격대 출신 양기남씨 당시 증언

"가족과 광주 지킨다는 마음에 참여"

총기 소지해 극렬분자…계엄군 고문

'광주시민 생명과 재산 보호' 선서문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죄책감 느껴"

"3월부터 몸 굳고 긴장"…항쟁 흔적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한 양동남 씨가 13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양동남 씨는 80년 5월, 가톨릭센터 앞에서 리어카에 실려 있는 시신을 보고 시위에 참여했다. 화순경찰서 무기고에서 총을 가져와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기동타격대로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27일 새벽 계엄군에게 체포돼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모진 고문으로 심한 상처를 입고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돼 70여 일간 입원 치료를 받았으며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2019.05.15. chocrystal@newsis.com

[서울=뉴시스] 조수정 기자 = 양기남 5·18기동타격대동지회장. 2019.05.15.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류인선 기자 = 1980년 5월 광주. 18일로 40년이 흐름 지금도 시민들은 여전히 그 날의 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당시 기동타격대로 활동했던 이들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전쟁'의 상흔에 시달린다고 호소한다.

양기남(60) 5·18기동타격대동지회장은 최근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에서 보던 상황이 1980년 5월27일 새벽 우리에게 닥쳤다. 근데 영화처럼 용기가 나더라"고 말했다.

5·18 기동타격대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로 구성된 유일한 '준군사조직'으로 알려져있다.

시민들은 1980년 5월26일 기동타격대를 조직한다. 시민군이 계엄군의 침공 가능성을 발표한 날이다.

기동타격대는 6개조에 각 5~6명씩 됐고, 예비인력인 7조 약 20명으로 구성됐다고 한다. 당시 기동타격대장은 윤석루(당시 19세)씨, 부대장은 이재호(당시 33세)씨가 맡았다.

기동타격대를 모집한다는 방송을 들었다는 양씨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광주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시민군으로 활동했었던 양씨는 기동타격대 1조였다. 고향 선후배들과 함께 1조로 편성된 양씨는 1980년 5월26일 오후부터 27일 새벽까지 할당된 구역의 순찰을 돌았다.

양씨는 "(27일) 오전 0시에 당시 한국은행 사거리, 지금은 충금지하상사 사거리인데 순찰 당시 불빛이 있어서 보니까 계엄군이 거기까지 이미 진입을 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전남도청에 구성된 시민대책위는 순찰 나간 기동타격대를 긴급 소집했다. 하지만 2조를 비롯해 일부 기동타격대원은 전남도청으로 복귀하지 못했다고 양씨가 전했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진행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계엄군은 전남도청 안에 있던 시민들에게 실탄을 발포했다.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비롯해 광주 도심을 장악했다. 양씨는 당시 전남도청 2층 복도에서 붙잡혔다고 한다.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한 양동남 씨가 13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마친 뒤 국회 앞 천막농성장을 찾아 80년 5월 당시 가두방송을 했다가 간첩으로 몰려 옥살이를 한 전옥주(오른쪽) 씨와 악수하고 있다. 양동남 씨는 80년 5월, 가톨릭센터 앞에서 리어카에 실려 있는 시신을 보고 시위에 참여했다. 화순경찰서 무기고에서 총을 가져와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기동타격대로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27일 새벽 계엄군에게 체포돼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모진 고문으로 심한 상처를 입고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돼 70여 일간 입원 치료를 받았으며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2019.05.15. chocrystal@newsis.com

[서울=뉴시스] 조수정 기자 = 양기남 5·18기동타격대동지회장.(왼쪽) 2019.05.15. [email protected]

계엄군에게 붙잡힌 시민들은 고문 대상자가 됐다. 총기를 든 상태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극렬분자'가 된 양씨는 수일을 고문을 당했다고 전했다.

계엄군은 고문을 통해 민주화 운동을 '내란'으로 만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양씨는 "이번 내란이 시작되면 김대중으로부터 광주서장 내정 받았다"고 진술할 때까지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양씨는 기동타격대원으로 내란을 실행한 혐의를 받아 고등군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 받는다. 이후 1980년 12월29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80년 당시 20살이었던 양씨가 계엄군과 전투를 앞둔 순간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양씨는 '기동타격대 선서문'이 힘이 됐다고 밝혔다.

선서문에는 '우리는 광주시민 기동타격대로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계엄군 동태를 파악하고 저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선서문은 기동타격대 부대장이었던 이재호씨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과 시민의 안위에 대한 우려도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양씨는 5월21일 금난로에서 리어카에 실린 사체 2구를 보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양씨는 "나나 내 가족이 저렇게 될 것 같았다"고 떠올렸다.

양씨의 가족은 계엄군이 광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수차례 양씨를 찾아 전남도청에 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양씨는 "설득당할 것 같아 아버님, 형님을 피해다녔다"고 말했다.

기동타격대 소속됐던 이들은 40년이 지난 2020년에도 여전히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양씨는 "많은 동지회 회원들이 이혼을 하거나 여태까지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5월에 잡혀 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24명의 기동타격대 회원이 생존해 있다.
【서울=뉴시스】 극우논객 지만원씨가 온라인에 게시한 광주 시민군 출신 양기남씨(왼쪽)와 최룡해 북한 최고인민위원회의 상임위원장 얼굴 비교 게시물. 사진은 양씨가 촬영했다. (사진 = 양기남씨 제공)

[서울=뉴시스] 극우논객 지만원씨가 온라인에 게시한 광주 시민군 출신 양기남씨(왼쪽)와 최룡해 북한 최고인민위원회의 상임위원장 얼굴 비교 게시물. 사진은 양씨가 촬영했다. (사진 = 양기남씨 제공)

양씨는 "저희는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함께 죽기로 다짐했었다"며 "그래서 망월동에 가보면 기동타격대원 네 분이 계시는데 묘비명이 같다. '불꽃같이 살다간 ○조(조별로 상이) 기동타격대원 여기 잠들다'이다"고 전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양 회장은 "3월부터 몸이 굳고 긴장이 된다. 몸이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제대로된 직장을 얻기도 힘들었다는 것이다. 또 직장을 구하려고 하면 24시간 내내 이어지는 감시도 취직에 장애가 됐다고 한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에 대해서는 "제발 보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지만원씨를 비롯한 일부 극우 세력은 양씨를 '36번 광수(광주에 내려온 북한특수군)'로 지목했다. 그러면서 사진 속 그가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라고 주장했다.

양씨는 "왜곡된 정보가 진실보다 더 빨리 퍼지고 널리 알려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진실이 승리한다는 말을 보여주시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노동자의 역할에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5월27일 전남도청에서 붙잡힌 이들 대부분이 노동자들이었다"며 "그 날 사그라진 생명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민주화운동은 당시 최하층 노동자들의 민중항쟁이었다"며 "그 사실도 함께 기억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당시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이들, 광주에서 숨진 이들에 대한 진상 규명이 40년간 미궁에 빠졌다"며 "수많은 이들의 죽음의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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