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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만에 다시 불거진 영화 도용·표절 논란…'흔들리는 마음'과 '본명선언'

등록 2020.05.26 20:15:04수정 2020.05.26 20:5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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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문제 불거졌지만 유야무야...감독 관련협 공식 사과

26일 독립영화 감독들 '흔들리는 마음' 시사회 열고 토론회

"개인간 사과 넘어 한국 다큐계 발전위한 성찰 계기 삼아야"

[서울=뉴시스]양영희 감독의 '흔들리는 마음'(위)과 홍형숙 감독의 '본명선언' 스틸(사진=양영희 제공)2020.05.26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양영희 감독의 '흔들리는 마음'(위)과 홍형숙 감독의 '본명선언' 스틸(사진=양영희 제공)2020.05.26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남정현 기자 = 한국의 A 감독은 재일한국인 2세 B 감독의 NHK 방송 다큐멘터리(1996) 상영분의 필름을 확보한다. 재일한국인 2세의 다큐 중 9분40초의 영상을 '그대로 가져다' 본인의 다큐멘터리 영화(1998)에 사용한다. 사용된 약 10분의 분량은 총 길이가 30분인 B 감독 다큐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두 영화는 내용과 흐름, 주제의식도 거의 같다.

재일한국인 청소년들이 자신의 한국 이름인 본명을 밝히지 못하는 환경, 그 속에서 이들은 일본 이름(가명)을 쓰고 살아간다. 재일한국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만 할 만큼 심각한 차별 속에서 자신의 본명(정체성)을 밝히는 일은 성소수자들의 '커밍아웃'만큼 힘들다. 두 다큐는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밝하는 과정, 그 어려움, 이와 관련해 태어나면서부터 가져왔던 깊은 고민을 담아냈다.

A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해 열린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인 운파상을 수상한다. 당시 미국에 있던 B 감독은 자신의 영상의 9분여가 사용된 것을 확인하고 '본명선언'이 자신의 영상을 무단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 국적' 소유자로 한국에 입국이 불가능했던 B 감독은 자신의 작품의 복사본을 우편으로 몇몇 신문사와 잡지사 영화담당자들에게 보냈다. 중앙일보의 이영기 기자는 '부산영화제 최우수 다큐수상작 도용 논란'이라는 제목으로 1998년 10월 19일 보도한다. 3일 뒤에는 "부산영화제 한국다큐멘터리 최우수상 '본명선언' 표절"이라는 제목으로 후속보도를 한다. 

이에 A 감독은 이를 부인하며 합의된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A 감독의 다큐 '본명선언'을 제작한 서울영상집단, 부산국제영화제, 한국독립영화협회를 포함해 한국영화계도 이 문제가 "표절은 절대 될 수 없고, 도용도 아닌 '인용'"이라며 B 감독이 억지 주장을 한다며 A 감독의 편에 섰다.

당시 부산국제영화제는 "9분40초 분량은 문맥상의 기능이 '배경의 맥락'에 그치기 떄문에 표절의 대상이 될 수 없다…개인적인 상호 의사소통의 문제라 개인적인 차원에서 풀어져야 할 문제"라고 입장을 밝혔다.

영화계 관계자들은 "문제를 제기하는 측의 선정적인 태도가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운동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성급한 도용이나 표절시비가 이제 서서히 떠오르고 있는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운동에 찬물을 끼얹이 않을까 우려스럽다", "다큐멘터리에서 10분 정도의 자료 필름을 삽입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므로 이 작품에 대해 도용이나 표절을 이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등의 반응을 내놓았다.
 
결국 B 감독은 한국 독립영화계의 물을 흐리는 가해자, A 감독은 어느새 피해자라는 프레임이 짜졌다. 이후 이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났다.

후에 B 감독은 세계 3대영화제인 베를린영화제에서 '디어 평양'(2006)이라는 작품으로 최우수 아시아 작품상을 수상한다. 2012년작 '가족의 나라'는 전 세계 18개 영화제에 초청됐고, 그해 일본 최고의 영화와 일본영화기자협회 선정 최우수 작품상을 영광을 안았다.

A 감독은 서울영상집단 대표,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 중앙대학교 겸임교수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서 강의하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영향력있는 다큐멘터리 감독 중의 한 명으로 성장했다.

A는 '본명선언'을 연출한 홍형숙 감독, B는 '흔들리는 마음'을 연출한 양영희 감독이다.

그로부터 22년이 흐른 뒤인 2020년 1월 양 감독은 홍형숙 감독이 연출한 영화 '경계도시2' 측이 스태프 인건비를 유용했다는 기사를 보고, 20년 넘게 용기를 내 다시 목소리를 냈다.

양 감독은 지난 1월 17일 씨네 21일에 기고문을 보내왔다.

기고문에서 양 감독은 "상식적으로 본인 작품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영상을, 편집의 변형 없이 그대로 다른 창작자가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연출자가 있나? 그것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한국의 평론가, 기자, 심사위원의 주장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고 저는 지금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런 자각도 없이 '이 사안이 뭐가 문제냐'라고 물으신다면, 이것은 창작자의 윤리의식에 대한 심각한 불감증이라고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양 감독은 비교시사회를 열고 홍 감독이 시사회에 참석, 그의 입장을 밝혀줄 것을 요청했다. 비교시사회는 열렸지만 홍 감독은 시사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기고문이 나가고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오르자, 당시 홍 감독이 대표로 있던 서울영상집단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공식 사죄문을 발표했다. 낭희섭 독립영화협의회 대표 역시 협의회의 대표로서 당시 영화계의 태도에 침묵하고 동조했던 사실을 사과했다. 

【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제10회 DMZ 국제다큐영화제 기자회견에 참석한 홍형숙 집행위원장(오른쪽) 사진은 뉴시스DB. 2018.08.07. dahora83@newsis.com

【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제10회 DMZ 국제다큐영화제 기자회견에 참석한 홍형숙 집행위원장(오른쪽) 사진은 뉴시스DB. 2018.08.07. [email protected]


이런 상황속에서 26일 오후 독립영화 감독들이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집에서 영화 '흔들리는 마음' 시사회를 개최했다. 시사 후에는 한국 독립다큐멘터리계의 표절 문제와 창작 윤리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다.

이 사건이 단순히 개인 간의 사과와 인정을 넘어 한국 독립영화계가 발전을 위한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필요에서다.

원태웅 감독, 박경태 감독, 김동령 감독, 장윤미 감독, 명소희 감독은 각각 ▲1998년부터 현재까지 언론을 통해서 본 두 영화의 표절·도용 논란 ▲표절과 도용의 관계 ▲다큐멘터리 창작윤리와 저작권의 관계-반복되는 저작권 침해사례를 중심으로 ▲공동체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당시 한국독립영화 공동체의 대응과 현재 등의 주제로 발제했다.

박경태 감독은 "저도 과거에 양 감독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방송국에서 제가 촬영한 것을 쓰겠다고 해서 줬다. 당시의 분위기는 이럴 경우 줘야만 하는 분위기였다. 배경 정도 쓸 줄 알았는데 내 영상을 많이 가져다 썼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저는 도용이라고는 생각했는데, 표절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본명선언'과 '흔들리는 마음'도 도용이라고 말하지만 표절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도용과 표절에 대한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해당 사건을 "가해자가 피해자가 바뀌는 전형적인 권력 게임의 모습을 보였는데, 한국독립영화 역사에서 치부 1순위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서울=뉴시스]남정현 기자=26일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집에서 영화 '흔들리는 마음' 시사회가 열렸다. 시사 후에는 한국 독립다큐멘터리계의 표절 문제와 창작 윤리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다. 발제자로 나선 김동령 감독이 발언하고 있다. 2020.05.26 nam_jh@newsis.com

[서울=뉴시스]남정현 기자=26일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집에서 영화 '흔들리는 마음' 시사회가 열렸다. 시사 후에는 한국 독립다큐멘터리계의 표절 문제와 창작 윤리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다. 발제자로 나선 김동령 감독이 발언하고 있다. 2020.05.26 [email protected] 


김동령 감독은 "22년 만에 양 감독에 의해 재점화된 이 사건은 저작권 문제 뿐만 아니라 독립영화역사에서 다큐멘터리의 제작 관행, 윤리, 그리고 그것이 미학에 끼친 영향까지 다양한 질문거리를 던진다"고 했다.

올해 1월 양 감독의 기고문을 통해 이 사건을 알게 된 장윤미 감독은 "독립다큐 씬이라고 불리는 이 공동체 안에서 해당 문제를 제대로 직면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이 문제가 22년 동안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원인이라고 짚었다.

구체적으로 "공동체가 나서서 개인 간의 문제로 축소한 점, 심지어 문제제기를 선정적이거나 음모론을 만들어 버린 점, 결국 피해사실을 주장하는 자를 가해자로 인식하게끔 호도한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서울=뉴시스][서울=뉴시스]남정현 기자=26일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집에서 영화 '흔들리는 마음' 시사회가 열렸다. 시사 후에는 한국 독립다큐멘터리계의 표절 문제와 창작 윤리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다. 발제자로 나선 박경태 감독이 발언하고 있다. 2020.05.26 nam_jh@newsis.com

[서울=뉴시스][서울=뉴시스]남정현 기자=26일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집에서 영화 '흔들리는 마음' 시사회가 열렸다. 시사 후에는 한국 독립다큐멘터리계의 표절 문제와 창작 윤리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다. 발제자로 나선 박경태 감독이 발언하고 있다. 2020.05.26 [email protected]


장 감독은 "이 논란에 관해 가장 조용한 곳이 한국독립다큐 씬이다. 외부로부터가 아닌 우리 내부에서 시작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명소희 감독은 "한국다큐멘터리 영화 비평과 담론 내에서 윤리적 쟁점에 대한 선행 연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며 "다른 창작자의 가치 판단이 개입된 촬영 소스를 마치 자신의 관점과 시선인 것처럼 창작물을 만들어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은 정당한가"라고 물었다.

이어 "소수의 목소리(재일한국인)를 듣는다'는 명목 아래 다른 창작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이렇게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가 과연 윤리적이라 할 수 있는가"라고 '본명선언'을 비판했다.

[서울=뉴시스]남정현 기자=26일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집에서 영화 '흔들리는 마음' 시사회가 열렸다. 시사 후에는 한국 독립다큐멘터리계의 표절 문제와 창작 윤리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다. 발제자로 나선 원태웅 감독이 발언하고 있다. 2020.05.26 nam_jh@newsis.com

[서울=뉴시스]남정현 기자=26일 서울 종로구 예술가의집에서 영화 '흔들리는 마음' 시사회가 열렸다. 시사 후에는 한국 독립다큐멘터리계의 표절 문제와 창작 윤리에 관한 토론이 이어졌다. 발제자로 나선 원태웅 감독이 발언하고 있다. 2020.05.26 [email protected]


홍 감독은 22년 만에 문제가 다시 불거지자 입장문을 통해 ▲빠듯한 제작 일정 탓에 양영희 감독과 진행 내용을 충분히 공유하지 못한 점 ▲양 감독의 '흔들리는 마음'의 원본 촬영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출처를 명시하지 않은 점 ▲양 감독의 크레딧을 '8mm 취재'로 표기한 점을 사과했다.

하지만 "제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심함이 부족했던 건 인정하지만, 양영희 감독에게 '흔들리는 마음' 영상을 사용하겠다는 의사를 수차례 알렸고, 양 감독 또한 '본명선언' 작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었기에 '흔들리는 마음' 영상을 사용한 건 충분히 협의한 것이고, 무단 도용한 게 결코 아니다"고 22년 전의 입장을 유지했다.

과거에 양 감독에게 말했던 "재일한국인의 고통과 고민을 그려낸 '본명선언'에 대해 모욕하는 양영희는 자신이 재일교포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또한 한국 독립영화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에 가담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에 다소 누그러진 태도지만 문제가 되는 도용·표절 입장에는 차이가 없다.

양 감독은 여전히 홍 감독과 함께 비교상영회를 열기를 희망하고 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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