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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플로이드, 문재인, 그리고 김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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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0-06-09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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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김태규 기자 = "I can't breathe(숨을 쉴 수 없다)."

미국의 한 흑인 청년이 죽기 전 남긴 한 마디가 전 세계에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8분47초.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에 이르는 시간 동안 반복적으로 남긴 말은 "숨을 쉴 수 없다"며 살려달라는 애원이었다. 완강한 태도의 백인 경찰관은 비무장한 그의 목을 짓눌렀다. 플로이드의 사망으로 촉발된 인종차별 항의 시위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이어지고 있다.

사망 당시의 영상을 보면서 문득 지난해 2월 '하노이 노딜' 상황이 오버랩 됐다. 당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필요한 제재 항목만 먼저 해제 해달라"며 북측의 요구 사항을 전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의 말이 떠올랐다. 미국 중심의 대북 제재에 숨을 쉴 수 없으니 살 수 있도록 숨통을 틔워달라는 것이었다.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서 전 세계가 공분하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당사자의 위법성 여부를 떠나 그를 처벌하기 위해, 또는 시위를 막기 위해 행사된 국가 폭력의 정당성을 묻고 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가 21초 간 침묵 끝에 "미국의 상황을 두려움과 실망 속에 지켜보고 있다"며 일침을 가한 것도 국가 폭력성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마침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3주년 특별연설에서 제시한 '인간안보(Human Security)'라는 화두가 국제사회에서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 관심이다. 인간안보는 국가 주도 폭력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있는 국가안보의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하는 연대와 협력의 국제질서를 선도해 나가겠다"며 "성공적 방역에 기초한 인간안보를 중심에 놓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국제협력을 선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인간안보 개념을 제시한 데에는 코로나19의 성공적 방역을 계기로 확인된 연대와 협력이라는 가치를 국제사회를 이끄는 리더십의 바탕으로 삼겠다는 복안이 깔려있다. 재난, 질병, 환경 문제 등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안전 위협의 모든 요인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군사안보의 개념에서 벗어난 인간안보로의 개념 확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인간안보는 1994년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간한 '인간개발보고서'에서 처음 제안한 안보개념이다. 보고서에서 규정한 안보는 지속적인 기아, 질병, 범죄, 억압으로부터의 안전이며, 사람들의 일상을 갑작스럽게 파괴하는 모든 위협으로부터의 보호하는 것을 통칭했다. 국가는 안보 제공자가 아닌 오히려 자국민의 안보를 위협하는 주체라는 문제 인식이 깔려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안보의 개념은 9·11 테러 이후 국제사회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사장되는 듯했던 인간안보는 코로나19 팬데믹 발생 이후로 다시 주목받았다.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는 국제사회의 연대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문 대통령이 '서랍 속' 인간안보 개념을 꺼내든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문 대통령이 꺼내든 인간안보의 학술적 개념과 남북관계 돌파구를 위한 수단으로써의 개념이 서로 상충하는 데 있다. 문 대통령의 인간안보 개념 속에는 코로나19 방역 협력을 매개로 한 남북관계 돌파구 의지가 녹아 있다. 문 대통령은 취임 3주년 특별연설에서 "남과 북도 인간안보에 협력해 하나의 생명공동체가 되고 평화공동체로 나아가길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최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의 세 번째 담화가 문 대통령에게는 더욱 뼈아프게 다가올 수 있다. 정부가 '개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탈북자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방치할 경우 4·27 판문점 선언과 9·19 남북군사합의 모두 파기할 수 있다는 경고였기 때문이다.

남북 보건 협력을 염두에 두고 제안한 인간안보 관점에서는 대북전단 살포 행위를 국가 공권력을 동원해 막거나,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자국민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개념적으로 수용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4·27 판문점 선언 2조 1항에서 합의한 전단살포 등 모든 적대행위를 중지한다는 조항을 눈 감을 수만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듯한 모습이다.

통일부 차원에서 실효성 있는 제도 개선 방안 마련을 검토하고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방식과 형태에 관해선 말을 아끼고 있는 것도 이러한 난감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9·19 평양공동선언 2조 4항(남북 보건·의료분야 협력 강화)을 근거로 제시된 '인간안보'가 앞선 남북 정상간 합의인 4·27 판문점 선언 이행(전단 살포 금지)에 걸림돌이 되는 모순을 안고 있다는 점도 고민거리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이 인간안보를 꺼내든 것은 스스로 지난 1년을 '잃어버린 세월'에 비유했던 것처럼 멈춰선 남북관계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다급한 인식 속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 김여정 제1부부장이 담화를 통해 "최악의 사태", "북남 군사합의 파기", "단단히 각오" 등 원색적 비난을 늘어놓은 것도 그 이면에는 "숨 좀 쉴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함의 다른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영변 폐기와 제재 완화' 카드로 북미 비핵화 협상 중재에 나섰다가 실패한 문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으며, 도발의 명분을 쌓는 경고성 메시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이를 두고 "대화를 하자는 긍정적 신호"라는 청와대의 아전인수 격 낙관적 평가는 인간안보가 안고 있는 개념적 모순보다 더 큰 문제로 다가온다. 자력갱생과 정면돌파를 선언한 북한이 자신들은 무기력한 플로이드와 다르다는 점을 조만간 '실력 행사'로 보여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kyustar@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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