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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김성녀 "'여성 파우스트', 더 생각할 것도 없었죠"

등록 2021.02.10 08: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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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데뷔 45주년…'마당놀이 여왕'·실험 창극 산파

국립극단 연극 '파우스트 엔딩' 주역

오는 26일부터 3월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서울=뉴시스] 김성녀, 연극 '파우스트 엔딩'. 2021.02.10. (사진 = 국립극단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김성녀, 연극 '파우스트 엔딩'. 2021.02.10.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여자 파우스트' 얘기를 듣는 순간, 더 생각할 거 없이 덮어놓고 하겠다고 했어요. 전 늘 도전의 역사였는데, 이번에도 새로운 도전이라 설렜죠."

배우 김성녀(71)가 국립극단 연극 '파우스트 엔딩'에서 '여성 파우스트'로 나선다. 과거 연극 '메피스토'(연출 서재형·2014)에서, 파우스트에 맞서는 유혹의 상징 '메피스토펠레스'에 전미도가 캐스팅된 적은 있다.

하지만 괴테가 60년 동안 공들여 1831년 탈고한 이 작품의 노(老)학자 파우스트 역은 주로 중후한 중장년 남성 배우의 전유물이었다. 국립극단이 1997년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선보인 '파우스트'에서도 고(故) 장민호가 타이틀롤을 맡았다. 이 역을 여성 배우가 연기한 건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4일 서계동 국립극단에서 만난 김성녀는 "진중하고 무거운 걸 떠나서, 이 작품은 어떤 울림을 갖고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창작도 맡은 조광화 연출은 "여성 파우스트를 떠올렸는데, 김성녀 선생님만 생각이 났다. 성별을 구별 짓지 않고 한명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싶었는데 연륜과 감각이 김 선생님과 딱 맞았다"고 털어놓았다.

'마당놀이의 여왕'으로 불린 김성녀는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교수, 국립창극단 예술감독(2012~2019) 등을 통해 대중에게 주로 국악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1976년 극단 민예의 '한네의 승천'으로 데뷔, 올해 데뷔 45주년을 맞은 연극계 거목이다.

다양한 역을 해왔고, 연기 스펙트럼이 넓다. 1인32역을 맡는 모노극 '벽속의 요정'이 대표작이다. 마당놀이 '홍길동전'의 홍길동, 연극 '햄릿'의 호방한 '호레이쇼' 등 남성 캐릭터도 이미 연기해왔다.

[서울=뉴시스] 김성녀, 연극 '파우스트 엔딩'. 2021.02.10. (사진 = 국립극단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김성녀, 연극 '파우스트 엔딩'. 2021.02.10.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칠레 출신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작품으로, 1992년 극단 미추(김성녀의 남편인 손진책 연출이 대표다)가 국내에 소개한 연극 '죽음과 소녀'도 그녀의 대표작이다. 진실을 요구하는 '파울리나' 역의 김성녀는 수많은 관객의 뇌리 속에 깊게 박혔다. 

차범석의 연극 '산불'을 뮤지컬로 옮긴 '댄싱 섀도우'에 마을 촌장으로 캐스팅된 것도 '죽음과 소녀' 덕이었다. 도르프만은 '죽음과 소녀'의 김성녀를 인상 깊게 봤고, '댄싱 섀도우'의 극작을 맡으면서 그녀를 적극 추천했다. 조광화 연출이 이번에 '파우스트' 역에 김성녀를 떠올린 것도 '죽음과 소녀'를 봤기 때문이었다.
 
김성녀는 '파우스트' 역에 대해 "여성도 아닌 남성도 아닌 중성의 개념과 동작들을 연구 중"이라면서 "무겁고 진지하면서 재밌는 '젊은 파우스트'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다만 '여성 파우스트'가 되면서, 원작에서 파우스트가 사랑에 빠지는 아름답고 젊고 여성 '그레첸'과의 관계 설정은 큰 고민이었다. 결국 그레첸은 원래 설정대로 뒀다. 대신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관계는 모성과 연민 그리고 '교감'에 방점을 찍었다. 요즘 대중문화에서 화두인 '여성 연대'처럼도 읽힌다.
 
[서울=뉴시스] 연극 '파우스트 엔딩'. 2021.02.10. (사진 = 국립극단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연극 '파우스트 엔딩'. 2021.02.10.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김성녀는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는데, 거기에 대한 공감이 숙제"라면서 "소통 부재의 시대, (코로나19로 인한) 종말의 시대에 생명력에 대한 연민이 있는 사랑을 해보자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시절 '장화홍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등 다양한 실험 창극의 산파였던 김성녀는 순탄한 길을 가는 것보다 산맥을 넘는 과정이 재미있다고 했다.

사실 '파우스트 엔딩'을 올리는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작년 국립극단 70주년 기념 레퍼토리로 제작돼 작년 4월 공연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에 김성녀의 어깨 부상이 겹쳐 공연이 무산됐다.

"작년에는 맹목적인 열정만 있었어요. 늪에 빠진 느낌도 들었죠. 이번엔 완성의 길로 접어들고 있어요. 조 연출님이 3막을 다시 써왔는데, 작년 연습에서 놓쳤던 부분도 개선할 수 있었죠. 육체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배우로서 후회 없이 작업하고 있습니다. 부상 이후 체력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는데, 연습실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생명력이 느껴지더라고요. 물론 마스크를 착용한 채 연습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요. 하지만 17명의 배우가 10개월 만에 모두 모인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됐습니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종말의 기운은 바이러스가 창궐한 현재와 맞닿는 지점이 있다. 최근 인천에서 들개가 들끓는다는 뉴스도 있었는데, '파우스트 엔딩'에서도 들개 퍼펫(인형)이 등장한다.

원작에서 파우스트는 모든 학문을 섭렵하고, 욕망의 극한까지 내달린 뒤에도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원작을 110분 남짓 압축한 '파우스트 엔딩'의 결말은 다르다. 좀 더 파우스트의 책임감이 강조됐다. 그는 과감하게 지옥행을 택한다. 

[서울=뉴시스] 연극 '파우스트 엔딩'. 2021.02.10. (사진 = 국립극단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연극 '파우스트 엔딩'. 2021.02.10. (사진 = 국립극단 제공) [email protected]

김성녀는 "모든 분야에서 많은 이들이 책임을 지지 않는 시대에 우리 연극의 엔딩은 인간을 성찰하는 계기를 줄 것"이라고 예고했다. "파우스트의 치기처럼 수 보일 수 있지만, 책임을 지지 않는 행위에 대한 경종처럼도 보일 수 있다"고 부연했다.

김성녀는 연극계에 대한 책임감도 갖고 있다. 인간성을 잃게 하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전쟁에서 극장을 찾는 관객을 보며 희망을 본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는 극장은 안전하죠. 한동안 '퐁퐁당'(두 좌석 띄어앉기) 때문에 연극계에 적자가 크게 늘어났는데 퐁당(한 좌석 띄어앉기) 정도만 돼도 버틸 수는 있어요. 연극이 왜소해진 시대인데, 국립극단 같은 곳에서라도 '파우스트 엔딩'처럼 연극만의 향기가 있는 대작을 선보여야 합니다."
 
올해 박칼린 음악감독 겸 연출이 샤먼을 소재로 올리는 신작에도 출연할 예정인 김성녀는 이제 배우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그는 평생 교수, 감독 등을 겸직하며 살아왔다. 

이젠 배우로서 "재능 기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특히 젊은 연극인들과 작업하고 싶다고 했다. "개런티는 상관이 없어요. 제가 도움이 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연극인들에게 제 존재가 미력하나마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작업을 하고 싶어요. 배우는 완성체가 아니죠. 저 역시 젊은이들에게 배울 것이 많습니다."

한편 '파우스트 엔딩'은 오는 26일부터 3월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른다. 파우스트와 맞서는 메피스토는 배우 박완규가 맡았다. 이밖에 강현우, 고애리, 권은혜, 김보나, 김세환, 이원준 등 국립극단 시즌단원을 비롯한 15명의 배우가 함께한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한 칸 띄어 앉기'로 진행한다. 입장권 예매는 오는 17일 오후 2시부터 가능하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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