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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이 세운 '나주 흥룡사(興龍寺) 터' 600년 만에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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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1-02-25 08:50:45  |  수정 2021-02-25 10:28:14
윤여정 나주부문화원장 20년 노력 결실 맺어
나주 전남운전면허시험장 뒤에서 기록과 일치한 터 확인
흥룡사 부속 유물 '석등' 확인…서성문 석등 표기는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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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뉴시스]이창우 기자=고려시대 흥룡사터가 있었던 곳으로 확인된 나주시 삼영동 일대. (사진=전남일보 제공) 2021.02.25. photo@newsis.com

[나주=뉴시스] 이창우 기자 = 고려 태조 왕건이 혜종(고려 2대왕)을 낳은 나주 오씨 장화왕후(莊和王后)를 위해 나주 영산포 산기슭에 지어준 '흥룡사(興龍寺)' 터가 600여년의 긴 잠에서 깨어났다.

600여년이란 추정 근거는 1428년 8월 세종실록에 따르면 '나주에 소장한 혜종(고려 2대왕)의 진영과 소상(흙으로 빚은 인물이나 신불상)을 개성 '유후사'로 옮겨서 각릉 곁에 묻으라'는 지침이 내려졌고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 때문이다.

혜종의 진영과 소상 이전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숭불 정책을 폈던 고려(왕실)에 반해 유교를 장려하기 위해 펼친 '숭유억불정책'에서 비롯됐다.  

25일 전남 나주시에 따르면 윤여정 나주문화원 부원장이 지난 20여년 간 노력을 기울인 결과 구전으로 만 전해져 온 흥룡사 터가 나주 삼영동 전남운전면허시험장 뒤 산길에 위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윤 부원장은 그간 흥룡사와 해당 사찰 안에 존재한 고려 2대 왕인 혜종(장화왕후의 아들)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혜종사(惠宗祠)'를 찾기 위해 각종 역사기록물을 찾아서 고증을 거듭해 왔었다.

혜종사 터를 찾아 나선 그는 우연히 나주 출신 일본인이 쓴 책에서 흥룡사 위치가 그려진 도면을 찾아낸 후 긴 여정의 끝을 맺게 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이 처음에 흥룡사를 흥륭사로 표기했다가 다시 흥룡사로 정정한 부분을 확인했고, 현재 국립나주박물관 1층 로비에 전시 중인 '서성문 석등(보물 제364호)'이 '흥룡사 석등'이었다는 점까지 함께 밝혀내는 성과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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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뉴시스]이창우 기자=조선철도여행안내 책자. 1915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출판한 자료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이 안내서에는 경부선, 마산선, 경인선, 경의선, 겸이포선, 평남선, 호남선, 군산선, 경원선, 함경선 10개 철도노선과 175곳의 역 정보를 담고 있다. 호남선 첫 면에 목포와 나주 고아주 전경사진과 나주 영산포, 구진포 터널과 영산강 사진 등 4장이 실려 있다. 호남선 각 역마다 역의 현황, 지역에 대한 설명, 승지(勝地)라고 해서 역이 소재한 지역의 관광지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 부분에 흥룡사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사진=윤여정 나주부문화원장 제공) 2021.02.25. photo@newsis.com

◇일제와 일본인 기록물에서 흥룡사 위치 확인

윤 부원장은 자료를 찾다가 1918년 조선급만주사출판부에서 발행한 '최신조선지지(地誌)'에서 '흥룡사는 영산포역 앞 작은 언덕너머에 있다'는 문구를 발견했다.

혜종사 찿기에 나선 그가 연구 방향을 흥룡사 찾기로 방향을 튼  순간이었다.

그 뒤 그는 또 한 번의 놀라운 기록물과 만난다. 일제강점기 1931년 영산포에서 태어나 영산포를 잊지 않고 지내던 일본인 좌굴신삼(左堀伸三·사호리 신조오)씨가 1992년 5월 출간한 '영산강하류역의 문화(전편)·광주항일학생사건'에서 흥룡사 터에 관한 내용을 찾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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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뉴시스]이창우 기자= 일본인 사호리 신조오씨가 쓴 영산강하류역의 문화(전편) 표지. (사진=윤여정 나주부문화원장 제공) 2021.02.25. photo@newsis.com

윤 부원장은 그간 문헌이나 일기, 시문 자료에만 나오던 흥룡사 터의 위치를 조선철도여행안내 책자에서 발견하고 비로소 정확한 흥룡사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인이 쓴 책에 담긴 도면이 가리키는 위치의 산자락을 찾아 나선 결과 전남운전면허시험장 뒤 산자락에서 도면 표시와 일치한 '흥룡사 터'를 발견하게 됐다.

윤 부원장은 "흥룡사 관련 자료 가운데 무명씨(無名氏)가 쓴 시문(時文) 중 '앙암의 동쪽'이라는 말이 나오는 데 이는 흥룡사에서 바라본 나주 영산포 가야산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시문과 일치했다"고 말했다.

◇흥룡사 유물 '석등 존재' 확인…서성문 석등 표기는 오류

현재 국립나주박물관 1층 로비에 전시 중인 '나주 서성문 석등(보물 제364호)'으로 불리는 문화재가 조선총독부 기록물에 흥룡사의 부속물로 고증·기록된 사실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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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뉴시스]이창우 기자= 조선총독부 '고적 및 유물대장'에 게재된 나주 서문 석등. 1916년(대정5) 11월17일 전남도장관이 총독부 정무총감에 보낸 문서 '전남도 고적 및 유물조사서'에는 자주군 서부면 삼층석탑과 동문의 석간, 서문의 석등(사진) 등이 첨부돼 있다. 이 석등 조사내용에 '석등이 흥룡사의 것이었다'는 유래를 담고 있다. 이 석등은 현재 국립나주박물관 1층로비 앞에 세워져 있다. (사진=윤여정 나주부문화원장 제공) 2021.02.25. photo@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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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뉴시스]이창우 기자 = 국립나주박물관은 2일 보물 제364호 나주 서성문 안 석등(羅州 西城門 石燈)이 88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향품으로 영구히 돌아와 오는 11일 오후 3시 박물관에서 점등식을 갖고 일반에 전시된다고 밝혔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석등 모습. 2017.05.02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lcw@newsis.com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서문외 석등 조사내용에 따르면 '석등은 흥룡사의 것이었다'고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서성문 안에 있던 이 석등은 조선총독부가 1929년께 경복궁에서 열리는 제1회 조선박람회를 위해 그해 9월5일 서울로 옮겼다. 그렇게 서울로 간 석등은 해방 후까지 경복궁 내에 존치해 있다가 지난 2017년 고향 땅인 국립나주박물관으로 88년 만에 귀향했다.

흥룡사 석등이 서성문 석등으로 명칭이 바뀐 이유는 고려 태조 왕건이 지은 흥룡사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로 추정되는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윤 부원장은 "흥룡사 내 혜종을 모신 사당인 '혜종사'에서 고려시대 내내 나주 주민들이 제사를 지낸 것으로 밝혀졌다"며 "하지만 1428년 8월 세종실록에 '나주에 소장한 혜종의 진영과 소상(흙으로 빚은 인물이나 신불상)을 개성 '유후사'로 옮겨서 각릉 곁에 묻으라'는 지침이 내려졌고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에서 흥룡사 석등(서성문 석등)의 존재를 확인한 만큼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흥룡사 터 일대는 나주오씨 종친회에서 매입해 관리하고 있다.

오종순 나주오씨 종친회장은 "그간 전설과 설화,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흥룡사 터가 확인됐다는 데 의미가 깊다"며 "나주의 역사가 재정립 될 수 있도록 시굴·발굴, 개발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lcw@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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