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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정재일 "10년만의 새 앨범 아주 사적인 기도 의미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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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1-03-04 08:34:39  |  수정 2021-03-04 08:43:19
기생충·옥자 음악감독...정규 3집 '시편' 발매
5·18 40주년 기념 작업 앨범
'둥글고 둥글게' 위해 작곡된 음악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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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정재일. 2021.03.04. (사진 = Young Chul Kim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개인적으로 지난해 너무나도 많은 일들을 겪어 와서, 아주 사적인 기도의 의미를 담고 싶기도 했습니다."

영화 '기생충'·'옥자'의 음악감독 겸 피아니스트 정재일이 최근 정규 3집 '시편(psalms)'을 발매했다. 그간 수많은 음악·음반 작업에 참여했는데, 솔로 정규 음반은 2010년 7월 정규 2집 '정재일(Jung Jae Il)' 이후 약 10년6개월 만이다.

정재일은 4일 뉴시스와 서면 인터뷰에서 작년 겪은 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나 공감할 만한 절실함이 배어 있는 앨범을 듣고 있으면, 좋은 음악은 늘 글·말보다 더 많이 말하는 법을 깨닫는다. 

작년 정재일이 5·18 민주화운동 40년에 헌정하는 음악을 위촉받은 이후에 느꼈던 것들을 녹여낸 음반이다. 당시 '내 정은 청산이오'라는 이름이 붙었던 음악은 소리꾼 정은혜의 아련하고 포근한 목소리, 작사가 박창학이 남은 이에게 부치는 편지가 어우러져 여운을 선사했다.

정재일은 이 작업의 여운을 안고 곧바로 장민승 작가의 시청각 프로젝트 '둥글고 둥글게(round and around)'의 작업을 이어나갔다. 이 작품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중심으로 그 전(1979년 부마 민주항쟁)과 그 후(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 이르기까지의 대한민국을 사진과 영상 그리고 문서의 아카이빙으로 담아냈다.

이번 음반 '시편'은 '둥글고 둥글게'를 위해 작곡된 음악들을 재구성했다. 삶이 생겨난 지점부터 함께 태어나는 고통과 상실을 노래하기 위해 고대 기독교 전통의 합창곡 형식을 생각했다.

아카펠라를 중심으로 절규하고 탄식하는 정은혜의 구음, 일렉트로닉 음향 그리고 현악 앙상블을 함께 구성했다. 정재일이 작곡·오케스트레이션·피아노·프로그래밍을 도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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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정재일. 2021.03.04. (사진 = Young Chul Kim 제공) photo@newsis.com
정재일은 "'둥글게 둥글게'를 위해 훨씬 많은 분량을 작곡했고, 아주 어려서부터 꼭 해보고 싶던 곡의 형식이기도 했다"고 밝혔다. "싱글이 아닌 앨범의 형태가 돼 줄 수 있겠다고도 생각했고요. 그렇게 제 이름을 붙여서 음반의 형태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작년에 선보인 '내 정은 청산이오'는 육자배기(전라도지방을 중심으로 한 남도잡가), 진도 씻김굿(전라남도 진도지역에서 전승되는 천도굿으로 망자의 극락왕생을 위해 행하는 무속의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다양한 구성과 형태로 활용해 작곡했다. 가수 정훈희, 작사가 박창학 씨와 협업했다.

정재일은 "어쭙잖은 서양식 작곡가의 태도로는 이 작업에 참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단호했다. 그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본으로 남도의 핵심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다. 씻김굿의 길닦음이나 사랑하는 이를 잊지못하고 그리워하는 선율의 육자백이(육자배기)가 떠올랐다.

"육자백이를 자장가와 같이 바꾸어 음악을 시작하고, '나는 그 5월을 기억하게 하는 선율과 어떤 질감 혹은 소리들을 가지고 편집자의 역할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기억함에 있어서 '내일을 위한 이야기로 음악을 맺을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생각에 박창학을 찾아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선율을 장조(major scale)로 바꿔 그 위에 새로운 노랫말을 붙였다. 아주 오랜 세월을 견뎌낸 여성과 어린 소녀의 목소리를 동시에 내는 듯한 정훈희에게 노래를 부탁했다.

정재일은 "그 작업은 저에게 기억하는 법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게 했고, 사람의 목소리의 위대함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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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정재일. 2021.03.04. (사진 = Young Chul Kim 제공) photo@newsis.com

이번 작업에서 성경의 시편이 주요 모티브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시편은 구약성서 속의 대표적인 시가서로 신앙의 모든 측면에 관한 시와 노래를 담고 있다. 특히 정재일은 "기억하소서, 제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당신께서 모든 사람을 얼마나 헛되이 창조하셨는지를"(시편 89:48)에 사로잡혔다.

정재일은 오래 전 강량원 연출이 자신에게 알려준 '슬픈 예수'라는 책을 떠올렸다. 이번 작업을 하는 동안 "왜인지 모르게 계속 펴보게 됐다"고 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장민승은 시편의 여러구절들을 들려줬고, 같이 읽어보기도 했었는데, 그 중에서도 신을 향한 인간들의 기도소리에 많이 귀 기울이게 됐습니다. 러닝타임이 100분에 육박하기에 수많은 형식의 음악적 실험을 생각해오다가 '그냥 이 기도만 사람의 목소리로만 담아보자'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모든 노랫말을 시편에서 따오게 됐습니다."

정재일은 80년대 이후 태어난 비교적 젊은 예술가다. 그럼에도 우리의 역사와 과거의 아픔을 계속 기억해오는 일을 해오고 있다. 스무살을 갓 넘긴 지난 2004년 진행한 프로젝트 '공장의 불빛'이 대표적 예다. 1970년대 후반 한국 노동운동의 정경이 담긴 1978년작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재해석한 프로젝트였다.

이번 '시편' 음반 작업에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독일 제3제국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였던 곳)에 방문했던 기억도 많이 반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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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정재일. 2021.03.04. (사진 = Young Chul Kim 제공) photo@newsis.com
정재일은 '내 정은 청산이오' 작업을 위해 장민승 작가와 여러 사적지들을 답사했다. "옛 국군광주병원, 광주교도소 등 곧 철거되고 자취도 없이 사라질 이 흔적들이 어떻게 기억돼야 하는 것인지 고민했다"고 했다. "비르케나우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황망함, 아무것도 더하지 않고 그대로, 올곶게 기억하고자 하는 모습들이 떠올랐습니다."

'천재 뮤지션'으로 통하는 정재일은 10대에 벼락 같이 등장했다. 10대·20대 때 정원영·한상원 밴드, 어벤저스 밴드 '긱스', 국악 기반의 그룹 '푸리' 등 음악성으로 유명한 팀들을 거쳤다. 이소라, 윤상, 박효신, 김동률, 아이유, 이적 등 정상급 뮤지션의 음반에 참여, 연주자와 프로 듀서로서 이름을 알렸다.

스무살이 갓 지난 2003년 자신의 첫 앨범 '눈물꽃'을 발표하면서 솔로 아티스트로서 존재감을 입증했다. 정재일이 2010년 발매한 솔로 2집 '정재일'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후 국악, 연극, 뮤지컬, 무용, 미술과 전시,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수작을 양산 중이다.

작년 정동극장과 발레리나 김주원이 뭉친 무용극 '사군자' OST도 정재일이 작업했는데 '숨은 명반'으로 통한다. 가야금 연주자 박순아와 협업도 인상적이었다.

정재일은 "협업할 때 변하지 않고 항상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무용은 안무와 무용수, 영화는 장면과 감독의 의도"라면서 "그 지점에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각 장르마다 아주 섬세한 다른 어법들이 있기는 하지만 큰 줄기에서는 매한가지"라고 전했다.

이번 음반은 세계 최대 음반사 유니버설뮤직을 통해 발매됐다. 유니버설뮤직에는 막스 리히터,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올라퍼 아르날즈, 힐두르 구드나도티르 등 현대 클래식 작곡가, 영화음악가 등이 대거 소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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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정재일. 2021.03.04. (사진 = Young Chul Kim 제공) photo@newsis.com
정재일은 앞으로 유니버설뮤직과 협업 관계를 맺게 된다. 그는 "특히 도이치 그라모폰 등 네오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만들어내시는 훌륭한 작곡가들이 속한 곳이라 기대가 된다"고 했다.

작업하는 음반마다 완성도를 보장하는 정재일에게 러브콜이 끊임없이 쏟아진다. 이정재·박해수 주연의 넷플릭스 작품 '오징어게임'(감독 황동혁)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바쁜 가운데도, 올해 30주년을 맞는 극단 학전의 작업에 꾸준히 참여해오고 있고 최근에 발매된 뮤지션 정원영의 정규 8집 '볕' 음반에도 참여했다. 꾸준히 함께 해온 이들과 계속 인연을 이어오는 것도 정재일을 믿음직스럽게 만든다.

"정원영 선생님은 부르셔서 기타 좀 치거라 하면 그냥 달려가서 연주하고 옵니다. 항상 제 삶에 음악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시고 이야기를 들어주시고요. 이번 음반에 특히 먼저 떠나신 친구를 위한 노래에 제가 참여하게 돼 또 매우 뜻깊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쉬지않고 좋은노래를 만들어내시는지 경외감도 들고요."

지난해 많은 일을 겪었다는 정재일에게도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의 폭풍까지 겹쳤다. 예술은 비극과 아픔 속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정재일은 "구원할 수 있을까요?"라고 반문했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서 예술이 절실함을 내비친 것으로 답을 갈음했다. "제게 아플 때 맞는 수액과도 같은 피나 바우슈의 작품을 보지 못해 조금 몽롱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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