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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살건강 백세간다]수 초간 멍해지는 '소아 압상스 뇌전증', 두려워하지 마세요

등록 2021.04.05 13:48:01수정 2021.04.15 16:5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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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살건강 백세간다]수 초간 멍해지는 '소아 압상스 뇌전증',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대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최한솜 교수(전문진료분야: 뇌전증, 발달지연)
 
눈빛이 초롱초롱한 아이는 작년부터 자주 멍해졌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이가 언젠가부터 노래하다가 갑자기 멈추고, 최근에는 말을 하던 중 수 초 동안 조용해졌다가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고 떠든다고 했다. 발달은 또래들과 비슷한지 묻자 어머니는 “또래보다 빠른 편이에요” 한다. 어머니의 말속에는 단어 하나하나마다 아이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의자에 앉은 아이는 낯선 방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에 대해 오가는 대화를 듣는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이 수 초간 멍해질 때 '소아 압상스 뇌전증'이 의심된다. 뇌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대뇌에는 수많은 신경 세포가 있다. 세포 하나하나가 전기 신호를 보내어 파란 하늘을 보고, 엄마 목소리를 듣고 대답하고, 가만히 생각을 하고, 즐거운 날을 기억하게 한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전기 신호가 연달아 발생하는 경우, 아이는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는다. 뇌에서 전기 신호의 이상이 있는 증상, ‘뇌전증’이다.

잠깐 멍해지는 증상은 이전에는 소(小)발작으로 불리었으며, 국제적으로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작은 병(病)(petit mal) 발작'으로 불렸다. 요즘은 의식이 일시적으로 ‘없어지는’ 양상에 집중하여, ‘없다’는 뜻의 단어인 압상스(absence) 발작으로 일컫는다. 이에 따라 소아에서 흔한 압상스 뇌전증의 진단이 만들어졌다.

◇2년 간 약 복용, 인지발달 큰 영향 없어

뇌전증으로 진단될 경우 여러 검사를 하고, 2년 이상 매일 약을 먹어야 한다. 아이들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순간에 대해 불안해한다. 그러나 소아 압상스 뇌전증은 잘 치료되는 편이며 인지발달에도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가족들이 보기에는 한없이 높아 보이는 오르막길이지만 힘을 내면 누구든 넘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이와 가족이 치료를 향해 나아가도록 다독이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
 
정밀 진단을 통해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 신호를 확인하기로 했다. 뇌파 검사는 1시간 정도 진행된다. 약 스무 개의 동전 크기보다 작은 전극을 아이의 머리 위에 붙이고, 뇌의 여러 부위에서 전기 신호가 잘 나오는지, 안 나와야 할 신호가 나오는지 본다. 검사 자체가 아이에게 아픔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아이는 침대에서 푹 자면 된다. 살펴본 결과, 아이의 뇌파에서는 1초에 3번, 온 대뇌에서 비정상적인 전기 신호가 한꺼번에 나오고 있었다.

다음 진료에는 온 가족이 함께 왔다. 모두 검사 결과에 대해 조마조마하는 눈빛이었다. “뇌전증 소견을 보인다”고 말했다. 이 진단을 내리면 많은 보호자는 불안해한다. 환자인 아이에게 이해시키기는 더 어렵다. 비록 치료가 가능하다고 해도 뇌전증을 진단받은 어린이를 둔 부모들은 당장은 평정심을 잃기 쉽다. 보호자들이 이러한 불안을 느끼는 데에는 사회적 편견도 영향을 주었다. 100년 전만 해도 뇌전증의 원인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치료약이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막연한 공포를 느끼고서, 심지어 전염성이 있다느니 하는 잘못된 소문을 믿으며 환자들을 피했다. 

현대 사회에서 뇌전증은 생각보다 흔한 병이다. 어린이 150명 중 한 명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뇌전증으로 진단되는데 이는 한두 학년에 한 명 정도이다. 대부분 사람이 생애 언젠가 겪을 수많은 병중의 하나로서 이 아이들은 뇌전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뇌전증은 나을 수 있나요?”라고 초조하게 물었다. 뇌전증은 많은 경우 조절할 수 있다. 뇌전증 환자들의 반은 약 한 가지를 꾸준히 먹으면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소아 압상스 뇌전증은 약을 꾸준히 챙겨 먹기만 하면 대부분 성공적으로 약을 끊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의 격려와 응원

이를 위해서는 보호자와 아이가 이인삼각(二人三脚)을 하듯 서로 도와야 한다. 치료약을 매일 2년간 하루도 빼지 않고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부모님께 어려운 부분은, 약을 챙길 때마다 이 약을 먹는 원인에 대해 떠올리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혹시 당신이 가진 유전자 때문에, 아니면 임신 중에 어떤 문제 때문에, 아니면 어떤 영양제를 먹여서 아이가 뇌전증 진단을 받게 되었나, 하는 자책감이 들 수 있다.

뇌전증은 부모의 잘못으로 생기는 병이 아니다. 환자의 60%는 원인을 모르며, 원인을 알더라도 예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뇌전증을 일으키는 유전자 돌연변이를 직접 치료하는 영화 같은 이야기는 전 세계의 최첨단 연구 과제 중 하나이며, 이마저 극히 일부 유전자로 제한되어 있다. 즉, 현재의 의학 기술로 뇌전증의 원인을 없애기는 아직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뇌전증을 진단받은 어린이에게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용기와 따뜻한 격려이다. 부모님의 지지는 아이가 수년간 뇌전증을 조절함에 있어서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

어머니는 초조한 눈빛을 보이며 “약이 독하지는 않나요?”라고 초조하게 물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뇌전증 치료약을 먹어도 원하는 삶을 꿈꿀 수 있다. 뇌전증 어린이들에게는 주로 공부하거나 집중하는 데 영향이 적은 약들을 쓴다. 많은 뇌전증 학생들이 꾸준히 약을 먹고 성실히 일상생활을 하며, 뇌전증이 없는 또래와 차이 없이 대학에 진학하고 직장에 들어가서 원하는 일을 하고 지낸다.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뇌전증을 진단받은 후에도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많은 사람이 뇌전증을 진단받은 후에도 올림픽에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하였고, 예술과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뇌전증은 더 이상 두려워할 질병은 아니다.

계절이 바뀔 무렵, 아이가 아버지 손을 잡고 진료실에 왔다. 아직은 수줍지만 진료실은 이제 보다 익숙한 공간이다. 아버지는 지난 진료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멍한 증상이 없어져서 다행이라고 한다. 내가 선택한 약에 의해 아이가 좋아지면 감사하다. 남은 동행에서, 내가 아이와 가족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뇌전증을 진단받더라도 건강하고 재미있게 지낼 수 있다. 부모님과 어린이, 의사가 함께 조절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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