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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3년간 전장 누빈 90세 간호장교 "전쟁은 끔찍"

등록 2021.06.25 06:00:00수정 2021.06.25 09: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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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화씨 세브란스간호학교 다니다 19살에 간호장교 지원

"부산과 총성 오가는 전방서 고통받는 부상병과 함께 생활"

"수없이 죽을 고비, 구더기 들끓는 열악한 상황 잊지 못해"

"여성 참전용사 이젠 얼마 안남아…이들 헌신 잊지 말기를"

24일 오후 경기 의정부시 한 자택에서 6.25 전쟁에 참전한 여성 국가유공자 김근화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1. 06. 24. kdh@newsis.com

24일 오후 경기 의정부시 한 자택에서 6.25 전쟁에 참전한 여성 국가유공자 김근화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1. 06. 24. [email protected]


[의정부=뉴시스]김도희 기자 = “세브란스 간호학교 졸업을 앞두고 친구 6명과 국립마산결핵요양원에서 마지막 실습을 하고 있었어요. 라디오에서 전쟁이 났다고 방송이 나오더라고요. 부상자가 갑자기 쏟아지는데 ‘나라를 위해 일손을 도와야겠다’ 이 생각뿐이었어요.”

올해로 90세가 된 김근화씨는 분단의 아픔이 시작된 1950년 6월 25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지난 24일 경기 의정부시에 살고 있는 김 씨를 만났다.

김 씨는 71년 전 당시 19살 나이의 평범한 간호학교 여학생이었지만 6·25 전쟁이 터지면서 간호장교가 돼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의 급박하고 참혹했던 순간들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전쟁 발발 소식과 함께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됐다’, ‘국군이 계속 후퇴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점차 부상자가 무더기로 속출했다.

간호 인력이 부족하자 함께 실습 중이던 학생들에게도 지원 요청이 왔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부산으로 후퇴하는 상륙함(LST) 짐칸에 천을 깔고 환자를 수용했다. 살려달라는 아우성 속에서 김 씨는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부산에 도착했는데 매일 밤 총격전이 벌어졌다. 전쟁이 장기화될 것 같았다. 사상자들을 어떻게든, 무조건 도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며 “부모님께 알리지도 못한 채 친구들 6명 모두가 간호장교에 지원했다”고 회상했다.

장교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졸업을 해야 했는데, 마침 부산으로 피난 온 세브란스 간호학교 관계자를 만나 졸업증명서와 추천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권총 사격과 이론 등 2주간의 군사훈련을 받고 1950년 9월 전쟁 발생 3개월 후 그는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제1육군병원이 부산에서 대구로 이동하면서 병동 배치를 받아 환자를 살폈다.

지뢰를 밟아 다리가 절단된 환자가 수백 명 씩 밀려들어왔다.

파상풍 환자가 넘쳐났고, 장시간 치료를 못 받아 상처에 구더기가 득실거린 채 실려 오기도 했다.

의료재료가 부족해 제대로 된 치료가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6.25 전쟁에 여성 간호장교로 참전한 김근화씨가 관련 자료들을 보며 설명하고 있다. 2021. 06. 24. kdh@newsis.com

6.25 전쟁에 여성 간호장교로 참전한 김근화씨가 관련 자료들을 보며 설명하고 있다. 2021. 06. 24. [email protected]


이후 1950년 9월 28일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김 씨는 친구 1명과 함께 중부전선 근무를 지원했다.

김 씨는 “전방에서 환자를 봐야 더 빨리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환자를 더 많이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그 때는 머릿속에 온통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었다. 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하염없이 북쪽으로 올라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가 발령받은 곳은 강원도 양구 제6 이동외과병원.

작은 운동장에 먼지 뿌연 천막 13개가 전부인 곳이었다. 저녁에 잘 때면 ‘쾅’하는 포 소리에 침대가 들썩였다.

추운 겨울에는 링거 병에 뜨거운 물을 넣어 안고 잠을 청했다.

한 번은 병실에 피고름이 범벅된 이불을 세탁하러 원주 부인회에 가는 도중, 타고 있던 차가 구덩이로 떨어져 왼쪽 뺨에 큰 상처를 입었다.

71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의 얼굴에 당시 봉합수술을 했던 상처가 남아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 속에서 부상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오로지 한 명이라도 살려야한다는 마음이 절실했다.

김 씨는 그렇게 최전방에서 10개월을 근무했다.

이후 그는 부산과 여수, 서울을 오가며 6·25 전쟁 시작부터 휴전까지 3년이 넘는 시간동안 간호장교로 환자들을 돌봤다.

그는 1999년 10월 참전용사로, 2008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김 씨는 당시를 회고하며 참전한 여성 모두가 누구보다 목숨 바쳐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부상자들을 위해 여성 간호장교들은 밤낮 없이 치료에 매달렸다”며 “이들 모두가 나라를 위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참전했고,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세월이 많이 흘러 생존한 여성 국가유공자들이 거의 없다”며 “우리가 바라는 것은 큰 게 아니라, 간호장교를 비롯해 여성 국가유공자에게도 관심을 갖고 이들의 헌신을 잊지 않는 것뿐이다”고 말했다.

한편, 경기 북부지역 내 여성 국가유공자는 142명으로 그 중 군·경찰 신분으로 6·25에 참전한 인원은 51명에 이른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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