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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격동의 현대사와 함께한 어느 영화인의 젊은 날

등록 2022.01.15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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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인 전 한국영상자료원장 회고기

‘한국 뉴웨이브 영화와 작은 역사’ 출간

[서울=뉴시스] 한국 뉴웨이브 영화와 작은 역사 (사진=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 2022.01.0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한국 뉴웨이브 영화와 작은 역사 (사진=한상언영화연구소 제공) 2022.01.07.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지난 연말에 새로운 책을 한권 만들었다. '한국 뉴웨이브 영화와 작은 역사'라는 이름의 책이다. 2020년에 소설 '멜랑콜리 연남동'과 사진집 '평양, 1960'을 만들었고 2021년에 신간 한권을 세상에 내 놓았으니 한해에 겨우 한두 권정도 출간하는 게으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개인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게으른' 출판을 겸하는 이유는 아마도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어 내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인의 원고를 넘겨받아 교정을 보고, 디자이너를 고용해 책의 틀을 잡고 표지를 만들어서 인쇄소로 보내기까지 긴장의 시간을 보낸다. 책이 세상에 나올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며칠을 기다린 후 막 만들어진 책이 손에 들어왔을 때의 뿌듯함은 책 만들기가 주는 일종의 성취감이다.

영화 서적, 특히 한국영화사와 관련한 서적은 독자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출간을 기피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은 중요해 보이지 않지만 뒷날 어느 연구자라도 흥미롭게 활용할 자료를 출판하는 일은 누군가가 꼭 해야 할 의미 있는 일이다.

언젠가 1920년대 후반 카프(KAPF) 영화부에서 활약했던 소설가 김송(김형용)의 회고기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짜릿할 정도로 흥분되어 어느 틈에 글 속으로 빠져 들어가듯 집중해 읽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 시대를 살았던 영화인들의 사소해 보이는 기록에서 의외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의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어느 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한국영화사를 강의하며 한 학기 동안 이필우, 이경손, 윤봉춘, 이규환, 김송 등 일제강점기 영화인들이 남긴 회고기를 함께 읽은 적이 있다. 회고기 읽기 수업을 진행한 이유는 내가 가진 이러한 문제의식을 학생들과 공유해보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다들 관심이 다를 테니 내 의도가 얼마나 들어맞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름 의미 있는 수업이었다고 자평한다.

이번에 낸 책은 1980년대를 관통했던 한 영화인의 회고기로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유신 말기를 시작으로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개인의 체험을 담담하게 풀어낸 글이다. 필자는 한국영상자료원장을 역임한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사가인 이효인이다. 그는 유신말기에 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가담했고,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한 10·26에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게 되는 12·12사태를 지나 서울의 봄과 5·18로 이어지는 1980년의 격동의 순간을 학생운동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 초반의 출구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번민과 울분에 쌓여 몸부림을 쳤던 그는 군대를 제대한 후 영화를 통한 사회변혁 운동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1980년대 한국독립영화운동의 중요한 기지 역할을 담당했던 서울영화집단과 그 후신인 서울영상집단에서 활약 후 직접 민족영화연구소를 창립해 민족영화운동을 주도했다. 그의 글은 학생운동시절과 영화운동시절을 거쳐 세계사적인 변화와 더불어 영화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1990년대 초반 마무리 지어진다.

이 책을 읽다보면 개인의 역사가 어떻게 우리 격동의 현대사와 조우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게 된다. 영화인 개인의 작은 역사가 영화사의 중요한 사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믿음을 이 책을 통해서 재확인하게 된다.

막 나온 책을 펴서 읽으며 학생운동과 영화운동의 자리에서 반짝거리는 광채를 발하는 한 청춘을 바라보게 된다. 누구나 인생의 전성기가 있다. 이효인 개인에게 전성기는 신문과 잡지에 필명을 드높이던 시절일수도, 아니면 영상자료원장으로 행정을 맡았던 시절일수도,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지금일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잠재력을 내포한 20대의 청춘기야말로 어느 시절보다 반짝거리는 인생의 황금기가 아닌가 한다.

이효인이 보낸 피 끓는 젊음을 통해 우리 모두의 찬란한 20대를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20대는 마치 하루하루가 '햇볕 쏟아지는 날들'은 아니었을까?

▲한상언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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