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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윈스턴 처칠의 와인

등록 2022.01.22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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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뉴시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사진은 1939년 8월23일 자료)

[AP/뉴시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사진은 1939년 8월23일 자료)

[서울=뉴시스]  2002년 영국의 국영방송 BBC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Greatest Britons)’을 시청자 투표를 통해 뽑았다. 1위에 선정된 사람은 윈스턴 처칠 전 총리였다. 셰익스피어는 5위에 뽑혔다. 하지만 생전에도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두번째 총리를 사임한 후 쉬고 있던 1957년 미국의 한 여학생이 주소에 “런던에 사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The Greatest Man In the World in London)”이라고만 쓴 편지를 보냈는데 미국과 영국의 우정국이 런던의 하이드 파크 게이트 28번지에 살던 처칠에게 정확하게 배달하였다.

처칠은 가문도 화려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가문의 후광과는 상관없이 오롯이 그 자신이 스스로 쌓은 업적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20대 초였던 1800년대 후반 현재의 남아공에서 네덜란드계 후손인 보어인과 영국이 벌인 보어전쟁에 장교신분을 가지고 종군 기자로 참전한다. 이 전쟁에서 그는 포로로 잡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영웅이 된다. 이후 그는 자유당 내각의 통상장관, 식민장관을 거쳐 제1차 세계대전중인 1915년에는 육군 군사학교 출신으로 해군장관이 된다. 하지만 같은 해 그가 지휘한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과의 갈리폴리 상륙작전에서 대패했다. 갈리폴리 전투는 역사상 단일 작전 중에서는 가장 큰 패전으로 꼽힌다. 이 전투는 그가 평생 입에 올리기를 꺼려했을 정도로 처칠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그는 이에 책임을 지고 해군장관에서 해임된다. 그 다음 해인 1916년에는 좌천된 육군 중령 계급으로 교착된 서부전선에 투입되어 악명높은 참호전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 돌아온 그는 1917년 군수상이 되었고 ‘탱크’로 명명된 신무기를 투입하여 1차 세계대전 승리의 기틀을 닦는다. 이어 전쟁이 끝난 후인 1919년에는 육군상 겸 공군상, 1921년 식민지상, 1924년에 재무상이 되고 드디어 2차대전이 발발한지 8개월 후인 1940년 5월에는 영국총리에 취임하여 전시 내각을 이끈다.

90 평생 중 장관으로만 31년을 보내면서 외무장관 대행을 잠시 맡은 것을 포함해 영국 내각에서 모든 부서의 각료를 두루 역임한 기록을 세웠다. 55년을 의회에서 보냈으며 1951년의 재선을 포함해 9년간을 영국총리로 봉사했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하지만 두번의 세계대전이 포함된 격변의 시대를 살면서 인류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히틀러와 나치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고 이에 두려움 없이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평생을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과 사물에 대한 경이로움을 가지고 살았다. 그는 누구 보다도 강인한 정치가였지만 아내에 대해서는 깊은 신뢰와 부드러운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 영화를 볼 때나 시를 읽을 때 혹은 어린 아이의 죽음 등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눈물을 흘렸던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처칠은 그가 스스로 ‘검은 개(Black dog)’라 부른 우울증과도 싸웠지만 결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위대한 리더였지만 예술과 와인과 술의 역사에서도 다른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혁혁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특히 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나 애연가들이 술이나 담배를 끊지 못할 때 제일 먼저 내세우는 ‘위대한 핑계’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 천문학적인 양의 와인과 위스키와 시가를 마시고 피웠지만 90년을 지나 2개월을 더 살았다. 그는 750ml 기준 와인 1병 반, 위스키나 브랜디 6잔을 매일 마시고, 21세 때부터 죽을 때 까지 약 25만 개비의 시가를 피웠다. 이는 70년을 치면 매일 10개비 정도에 해당한다. 그는 모든 식사에서 꼭 샴페인을 마시고 그 중간이나 앞과 뒤에도 레드 와인과 위스키, 소다수를 마셨다.      

그는 특히 프랑스 북부의 에페르네에서 생산되는 ‘폴 로저 (Pol Roger)’ 샴페인을 좋아해서 현재 가치로 매년 8000천만원 정도를 지출했다. 그는 책의 인세와 유산 등 꽤 많은 재산이 있었지만 샴페인 구입과 큰 씀씀이 때문에 1936년에만 1억원 정도의 빚을 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한 때 샴페인 구입을 자제하는 등 허리띠를 졸라 매기도 하였다. 지금은 생각하기 어렵지만 일부 와인 빚은 영국정부가 대신 갚아주었다. 그는 죽을 때 까지 총 42000병의 폴 로저 샴페인을 마셨다고 한다. 그가 이 와인을 처음 마신 때가 30대라고 하니 60년간 매년 700병으로 하루에 2병 꼴이다.

미국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을 때는 아예 직접 고른 와인 리스트를 미리 보냈다. 거기에는 매일 아침 식사전에 마실 세리 와인 한 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리는 ‘델가도 쥴레타(Delgado Zuleta)’와 ‘루스타우(Lustau)’를 선호했다. 레드 와인으로는 보르도의 ‘샤토 드 벨뷰’를 좋아했다. 스페인 리오하의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인 보데가스 빌바이나스에서 생산하는 템프라뇨 품종의 ‘비냐 포말’도 즐겨 마셨다. 그러나 이렇게 마셔도 그에게 건강문제가 거의 없었던 점은 불가사의하다. 영국의 힐스 데일 대학 등 여러 처칠 연구자들이 현재의 ‘알코올 중독’에 해당하는 의학적 기준을 적용해 보았으나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의 프랑스 진공 작전을 처음 ‘샴페인 전쟁’으로 명명한 것도 처칠이었다. 공산주의는 싫어했지만 스탈린이 보내준 러시아산 캐비어는 먹었다. 그러나 1946년 처칠이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한 그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 이후에는 스탈린이 더 이상 캐비어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동안 전 80권에 이르는 50 종류의 책을 썼고 나이 40세에 그림을 시작해서 유화만 500점을 그렸다. 작년에는 안젤리나 졸리가 소유하던 처칠의 풍경화가 우리 돈으로 약 130억원에 팔리기도 했다. 그는 50세까지 폴로 경기를 했고, 50대와 60대에도 원고료가 가장 높은 저널리스트였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953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좋은 와인이 척박한 토양에서 태어나듯 위대한 리더는 난국에서 더 빛난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우아한형제들 인사총괄 임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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