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같은 '프롬프터'를 위한 헌사...연극 '소프루'[이 공연Pick]
[서울=뉴시스]연극 '소프루' 공연 사진. 실제 현역 프롬프터로 일하고 있는 크리스티나 비달. (사진=국립극장/Filipe Ferreira 제공) 2022.06.3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17~19일 열린 연극 '소프루'는 실제 포르투갈의 도나 마리아 2세 국립극장에서 40년 넘게 프롬프터로 일해온 크리스티나 비달이 올라 그 삶의 진정성을 고스란히 전했다.
포르투갈어로 '숨', '호흡'을 뜻하는 '소프루(Sopro)'는 대사나 동작을 잊은 배우에게 이를 일러주는 프롬프터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한다. 대사를 잊어버려 그 순간 멈출 위기에 놓인 배우에게 숨을 불어넣는다.
평범하지만 위대한 삶과 예술을 예찬하는 이 작품은 프롬프터에 대한 헌사인 동시에 무대를 함께 만들어가는 모든 이에 대한 헌정이다.
[서울=뉴시스]연극 '소프루' 공연 사진. 프롬프터 역과 예술감독 역 뒤로 현역 프롬프터로 활동 중인 크리스티나 비달이 서있다. (사진=국립극장/Christophe Raynaud de Lage 제공) 2022.06.3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속삭이는 대사에 따라 배우들은 프롬프터가 되고, 예술감독이 된다. 프롬프터는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자는 예술감독 이야기에 한사코 사양한다. 새하얀 팔을 내밀며 자신은 무대 뒤 그림자와 같은 존재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관객에게 자신이 박수를 받는 순간, 무대 위 배우가 빛나지 못한 것이며 자신의 일은 실패라고 말한다.
설득을 거쳐 이 연극이 만들어지기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풀어내면서, 프롬프터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무대에 겨우 손가락 끝만 맞닿은 채 프롬프터 박스에서 처음 연극을 본 다섯 살 꼬마 비달. 실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색된 허구의 이야기가 섞여있다. 20살이 넘어 프롬프터가 된 순간, 배우들의 뒷모습밖에 보지 못하는 삶, 오랜 시간 함께 일한 예술감독과의 추억 등이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진다.
[서울=뉴시스]연극 '소프루' 공연 사진. (사진=국립극장/Christophe Raynaud de Lage 제공) 2022.06.3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무대에 선다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냐는 물음엔 마음속에 오랫동안 품었던 짐을 털어놓는다. 배우의 연기에 몰입한 나머지 대사를 알려줘야 하는 임무를 잊어버렸던 순간. 단 7행뿐이었다. 비달은 그 문장들을 소리내 읽는다. 그의 목소리가 이곳에서 처음 밖으로 드러난 순간이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장면이다. 퇴장하는 그의 등 뒤로 텅 빈 무대엔 찡한 먹먹함이 감돌았다.
한국에선 현재 찾아볼 수 없는 프롬프터는 전 세계적으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다. 시대가 변하면, 사라지는 것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존재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 프롬프터를 무대 위로 끄집어낸 이 극은, 프롬프터만의 이야기가 아닌 잊혀가는 존재들을 돌아보게 한다.
[서울=뉴시스]연극 '소프루' 공연 사진. (사진=국립극장/Filipe Ferreira 제공) 2022.06.3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희생도 따랐지만 이 직업을 사랑해요. 극장에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랑 없이 일할 수 없어요. 특히 연극은 모두의 애정이 필요하고, 그래서 44년을 일할 수 있었죠. 이 연극은 잊혀져가는 것,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에요. 극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오마주죠. 사회도 마찬가지죠.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그림자 속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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