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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반환 25주년 "모든 것이 달라졌다"-NYT

등록 2022.07.01 11:38:25수정 2022.07.01 13:4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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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 요약

중국 출신 국수상점 주인은 계속 일하지만
청년들 중국인보다 홍콩인 정체성 커져
'50년 체제 보장' 중국정부 약속 깨지며
정치적 자유 크게 위축…경기침체 심화
광동 일부 중국 도시 홍콩보다 잘 살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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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AP/뉴시스] 홍콩 주권 반환 25주년을 앞두고 24일 홍콩 도심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와 홍콩특별행정구 깃발들이 걸려있다. 2022.06.30


[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미 뉴욕타임스(NYT)는 30일(현지시간) 반환 25주년을 맞는 홍콩의 변화를 추적하는 기사를 실었다. 제목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재탄생의 길"이다.

1997년 7월1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던 날 많은 비가 쏟아져 홍콩 퀸즈로드와 주변지역이 침수됐다. 이를 두고 공산당 통치의 불길한 전조라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홍콩을 점령한 서방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소하는 정화의식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퀸즈로드에서 가족과 함께 홍콩 반환 이전부터 국수를 만들어 팔아온 토워는 지금도 국수를 팔고 있다. 그는 홍콩이 반환되던 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너무 바빴다. 겁을 낼 생각조차 못했다"고.

홍콩 반환 25년 동안 일어난 변화에 대해 홍콩 최대 번화가 퀸즈로드의 주민들은 대부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이 크게 달라졌다.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국제화물집산지로서 홍콩의 역할이 위축되고 홍콩의 교도소는 젊은 정치범들로 가득할 정도로 자유가 탄압되고 있다.

토워는 20살 때 중국 남부에서 탈출해 퀸즈로드에 정착했다. 영국이 아편전쟁 끝에 차지한 홍콩에 처음 개설한 간선도로다. 빅토리아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 도로는 식민지 권력의 탐욕을 상징했다. 은행, 증권거래소, 학교, 교회 등 제국의 기관들이 도로가에 들어서고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퀸즈로드의 모습이 변했다. 도로는 기념비로 남아 있지만 이곳의 주민들은 홍콩의 운명에 아무런 영향력도 없었다.

1997년 중국 정부는 홍콩에 50년 동안 자치권을 부여하고 지구상 가장 번영한 대도시는 물론 국제 금융 중심으로서 자유를 보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퀸즈로드에는 아편전쟁에서 번 돈으로 지은 금융기관 건물들,  보석상, 유럽의 명품점과 상어지느러미, 각종 중국 약초상이 들어서 있었다. 중국에 반환된 지 몇년 동안은 여전히 흥청거렸다. 대법원 결정에 따라 퀸즈로드가 퀸즈웨이로 바뀌었지만 그 결정을 내린 판사들은 영국 법복 차림이었다. 상하이, 런던, 뭄바이 출신의 기업인들은 확고한 법에 의한 통치를 믿을 수 있었다. 중국 정부는 10년 이상 '일국양제'를 강조하며 홍콩행정청의 결정을 존중했다. 홍콩 자치를 약속한 시한인 2047년은 적절한 듯했다.

지난 3년 동안 변화가 컸다. 2019년 퀸즈로드를 비롯한 홍콩의 주요 간선도로를 수백만의 시위대가 채웠다. 과거에도 시위를 통해 당국의 조치를 뒤집은 일이 여러번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면서 중국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몇 달동안 최루탄, 고무탄이 중심상가를 폐쇄했다. 2020년 투옥 활동가를 지원한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 범죄자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이 도입됐다. 2047년까지 절반밖에 안 지났지만 홍콩은 장래를 알 수 없는 연옥(煉獄)이 됐다. 홍콩의 종말 징후가 나타났다.

뉴욕, 도쿄, 런던과 경쟁하던 대도시가 하루밤새 사라질 순 없다. 그러나 50년 동안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겠다던 중국 정부의 약속이 깨졌다. 가난한 주민들은 더 가난해졌고 홍콩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토워씨는 "홍콩의 모든 것이 변했다. 우리의 운명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청왕조의 멸망, 공산당 집권, 문화혁명, 천안문 사건 등 중국에서 큰 정치적 변동이 생길 때마다 홍콩 주민들이 대거 떠났다. 그러나 반환을 앞 둔 몇 년 새 수십만명이 서방으로 이주하면서 유일하게 인구가 감소했다.

캐나다 밴쿠버로 유학해 컴퓨터과학을 공부하던 융(45)은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홍콩의 장래가 걱정돼 홍콩으로 돌아왔고 변호사가 돼 퀸즈웨이의 법원에 출석했다. 2016년 친중 정치세력의 일원으로 입법원 의원에 당선했다. 그는 정부 운영 미술관의 장식이 중국공산당을 폄하한다고 비판했고 중국 지도자에 대한 공개적 조롱은 "정신 나간 짓"이라고 꾸짖었다.

그는 "'중국은 언제나 괴물같은 존재'라는 서방언론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자유가 박탈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홍콩이 중국의 일부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친중정치인들은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시위대들이 미 중앙정보국(CIA)의 조종을 받는다고 비난한다. 종신형을 위협하는 공포스런 보안법에 따라 많은 단체와 언론사가 문을 닫았다. 50명 가까운 정치인과 민주주의 활동가들이 이 법에 따라 투옥됐다. 이들 모두 퀸즈웨이 최고법원에 출석할 예정이다. 현재는 퀸즈웨이는 물론 홍콩 어느 곳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융은 "홍콩이 여전히 매우 자유로운 도시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지난 번과 같은 시위를 일정 범위 이상 허용하면 애국심을 해친다"고 덧붙였다.

홍콩은 시위대와 홍콩의 경제적 위상 하락을 우려하는 사람들로 갈라졌다. 2019년 홍콩 최대 은행인 HSBC이 민주주의 지지를 위한 크라우드펀딩 계좌를 폐쇄해 비난을 받았다. 시위대가 퀸즈로드 HSBC 본사의 거대 사자상 장식에 빨강 페인트를 뿌렸다.

융은 "자녀들에게 나라를 불신하고 정부를 뒤집을 것이라고 가르치면 피해가 커진다. 표현의 자유보다 나라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2019년 7월1일 반환기념일에 수십만명의 홍콩 주민들이 퀸즈로드에서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보온병을 든 중산층, 런닝셔츠 차림의 연금생활자, 노란 우산을 든 대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마스크를 쓴 일부 시위대가 입법원 건물을 둘러싼 채 유리창을 깨트리고 철문을 찌그러트리고 반공산당 구호를 낙서했다. 시위대중 한 사람이던 브라이언 렁이 테이블위에 뛰어올라 마스크를 벗고 민주주의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는 얼굴을 드러낸 유일한 시위대였다.

렁(28)은 중국이민자 출신으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홍콩으로 왔다. 공영주택에서 자란 그는 가족중 유일하게 대학생이 됐다. 당시 홍콩 청년들은 이중 국적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나는 중국인이지만 영국법을 존중하고 포투투갈식 에그타르트를 좋아한다는 식이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렁은 홍콩과 중국 대표팀을 모두 응원했다. 또 청년들의 주도하는 홍콩 민간 단체들이 정부를 설득해 친정부 교육을 하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2014년의 대학생 시위와 2019년 여름의 시위가 상황을 반전시켰다. 경찰이 주도자 없는 시위대들을 힘으로 탄압했고 수천명의 청소년을 잡아갔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 홍콩은 침묵했다.

현재 청년 가운데 2% 만이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한다는 여론조사가 있다. 4분의 3 이상은 자신을 "홍콩인"으로 생각한다. 렁은 "중국이 자유주의 개혁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뒤로 우리는 중국인이라는 생각을 지웠다"고 했다. 그는 "홍콩민족주의"라는 수필집을 펴내기도 했다. "우리는 홍콩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격동을 피해 수백만명이 탈출할 당시 홍콩은 피난처는 물론 더 살기좋은 곳이었다. 수백만명의 중국인들이 이곳에서 영국 관료주의에 따라 켈빈, 피오나, 글래디스. 앨빈, 브라이언, 유니스 등 서양식 이름을 사용했다.

지금은 홍콩의 인구가 줄고 있다. 올들어 2019년 홍콩을 떠난 만큼의 홍콩 주민들이 한달 새 해외로 이주했다. 엄격한 코로나 봉쇄로 유입인구는 거의 없다. 활동가들은 교도소를 피해 망명했다. 택시 운전사, 회계사, 교수들이 해외로 이주했다.

2019년 경찰이 입법원 주변 시위대를 해산시킨 몇 시간 뒤 렁은 홍콩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홍콩을 사랑했다. 그 때문에 싸웠고 그로 인해 떠나야 했다"고 했다. 이후 그는 홍콩에 가지 못했다.

퀸즈웨이의 국수가게 주인 토워는 1978년 목숨을 걸고 중국을 탈출했다. 1년 넘게 수영연습을 하고 산을 타고 넘는 훈련을 했다. 첫 탈출 시도는 실패였다. 두번째 시도에서 7일 동안 숲속에서 밤을 보낸 끝에 강만 건너면 홍콩이었다. "불빛을 보면서 헤엄쳤다"고 했다.

토워는 퀸즈로드에서 아찔해졌다. 전복이며 은침차며 스코틀랜드 위스키며 크림 케익이며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당시 중국은 너무 가난했다. 어린 시절 배불리 먹은 적은 단 두번이었다. 처제가 고향을 방문할 때 친척들에게 줄 식용유병과 옷감이 가득 든 바구니 2개를 대나무 지게에 매달아 어깨에 메고 갔다.

지금은 홍콩 인근 광동성 지역은 전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면서 생활수준이 홍콩보다 높아진 곳도 있다. 퀸즈로드의 살인적 월세와 경기 침체로 많은 공예상들이 문을 닫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은퇴할 나이가 지나도록 밀가루 덮인 부엌신에게 기도해온 토워는 아들 토탁타이(35)에게 국수가게를 물려줄 생각이다. 홍콩에서 태어난 아들은 떠날 생각이 없다. 그러나 홍콩은 사회보장책이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휴일도 없이 일한다.

토워는 홍콩의 비좁은 아파트에 살지만 광동의 고향에 6층짜리 저택을 지었다. 중국을 떠난 적이 없는 형제들이 멋들어진 저택에서 안락하게 지낸다. 은퇴하면 그리로 갈 생각이다.

상반신과 눈썹에 밀가루가 덮인 채 일하는 토워는 "홍콩에선 일을 안하면 살 수가 없다. 홍콩에 온 건 내 운명"이라고 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yjkang1@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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