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리뷰]여전히 살아 있는 '록스피릿' ···연극 '록앤롤'
ⓒ국립극단
체코의 로큰롤(rock'n'roll) 마니아 '얀'은 친구 '퍼디난드' 부탁으로 '77 헌장(憲章)'에 서명한다. 직후 '우든트 잇 비 나이스(Wouldn’t It Be Nice)'가 울려 퍼진다. 미국 로큰롤 밴드 '비치보이스'가 1966년 내놓은 명반 '펫 사운즈' 첫 트랙에 실린 곡.
나이가 어린 연인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담은 서정적인 사랑 노래지만, 그 어떤 희망찬 분위기에도 어울릴 법한 곡이다. 더구나 '펫 사운즈'는 비치보이스를 여름용 '해변 밴드'에서 명실상부한 '아티스트 밴드'로 승격시킨 음반이지 않은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국립극단 신작 연극 '록앤롤'은 록 음악이 철의 장막에 둘러싸인 나라에서 어떤 구실을 하는지를 유려하게 톺아본 수작이다.
체코슬로바키아(현 체코 공화국) 출신 영국 극작가 톰 스토파드(81)의 작품으로, 2006년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상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스토파드는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 등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활동해온 스타 작가다. 네 번의 토니상과 일곱 번의 이브닝 스탠더드상을 거머쥐었다.
스토파드는 '록앤롤'에 고국의 격정적인 정치사를 담아냈다. ‘프라하의 봄’으로 통하는 민주·자유화 바람이 불던 체코의 196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가 배경이다.
체코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스토파드는 나치 점령을 피해 영국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방인인 자신의 모습을 극의 등장인물인 케임브리지 유학생 얀에게 투영했다. 퍼디난드는 실제 77헌장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등 체코 민주화를 이끈 극작가로 뒷날에 체코 초대 대통령이 되는 바츨라프 하벨(1936~2011)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체코에서 공산당 독재가 지속하던 시절, 얀은 영국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며 로큰롤 음악에 사로잡힌다. 체코로 돌아온 그의 방에는 밴드 '머더스 오브 인벤션'을 이끈 미국 괴짜 기타리스트 프랭크 자파(1940~1993) 등 록스타들의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국립극단
'록앤롤'에서 얀과 함께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은 그가 존경하는 스승 '막스'다. 마르크스 사상을 신뢰하는 영국의 공산주의자다. 얀과 막스는 체코 공산정권 비밀경찰로 인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다. 종반부 얀이 막스에게 자신의 과오를 사죄하는 순간, 그는 참았던 눈물을 한없이 쏟아낸다. 동시에 미국 하드록 밴드 '건스 앤 로지스(Guns n' Roses)'의 '돈트 크라이(Don't Cry)'가 울려 퍼진다. 음악은 주저함 없이 누군가를 위로하는 최고의 예술적 기술이다.
스토파드가 '록앤롤'을 쓴, 또 다른 계기는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핑크 플로이드' 창립 멤버 시드 배럿(1946∼2006)이다. 한때 기이할 정도로 자유롭고 신비로운 예술세계를 펼쳐온 아티스트였던 배럿은 1968년 팀을 돌연 탈퇴한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인 케임브리지셔에서 대부분 은둔하며 보냈다.
하지만 그는 핑크 플로이드의 사이키델릭함에 지대한 영감을 준 인물이다. '록앤롤'에서 배럿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다. 그가 핑크 플로이드를 나와서 만든 솔로 앨범 '매드캡 래프스(madcap laughs)'가 여러 번 등장하고 이 앨범 수록곡 '골든 헤어(Golden Hair)'와 '테라핀(Terrapin)'도 나온다. 미발표곡 등을 모아 1988년 나온 컴필레이션 앨범 '오펠(Opel)'도 종반부 중요한 소재로 사용된다.
자유롭고 천재적인 음악 재능을 지녔으나 복잡한 내면으로 사회와 불화한 그에게 록의 시대상 또는 자화상을 본 것으로 판단된다. 히피 딸 '에스메'의 똑똑한 딸이자 막스의 손녀인 '앨리스'는 아빠 '나이젤'과 새로 결혼한 칼럼니스트가 글로 배럿의 삶을 갈기갈기 찢어놓자 분노하기도 한다.
이처럼 '록앤롤'은 록 음악을 통해 체코 정치사는 물론 사람과 시대의 풍경을 그려낸다. 록음악은 단지 갈등과 불안, 이데올로기로 인한 억압을 풀어내는 해방구만은 아니다. 과거에 열정을 바쳤던 무엇,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전히 애정을 쏟아내는 무엇에 대한 헤드뱅이다. 로큰롤 음악은 말 그대로 돌이 구르는 듯 평탄한 삶에 시끌벅적 멜로디와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K팝, EDM이 부상하면서 록에 사망 선고가 내려진 시대, 누군가의 가슴 속에는 '록 스피리트'가 여전히 살아 있다.
3시간 남짓의 긴 러닝타임은 지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전개, 여기에 리듬을 부여하는 록 음악, 발맞춰 움직이는 턴테이블 무대 등으로 인해 훌쩍 지나간다.
ⓒ국립극단
2부 포문을 여는 아일랜드 록밴드 '유투(U2)'의 '아이 스틸 해븐트 파운드 왓 아임 룩킹 포(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를 비롯해 공연 내내 록 명곡들이 넘실거린다.
극의 마지막은 1990년 롤링스톤스의 첫 체코 프라하 공연이 배경. '유 갓 미 로킹(You Got Me Rocking)'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축제의 장으로 연극은 마무리된다. 참고로 롤링스톤스의 보컬 믹 재거(75)는 하벨 체코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에서 그의 역할을 맡을 것이라는 체코발 보도가 10여 년 전 나오기도 했다.
얀 역의 이종무, 막스 역의 강신일 등 배우의 호연, '알리바이 연대기' '병동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등 우리 근현대사 민낯을 그려온 김재엽의 안정적인 연출도 작품에 로킹(Rocking) 함을 더한다.
'히피의 성전(聖典)'으로 통하는 로버트 M. 피어시그의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등 작품의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상징하는 요소들이 산재한다. 우리 관객에게 낯선 정보가 많은 만큼 연극 시작 전과 인터미션에 관련 배경들을 설명해주는 자막이 계속 나온다.
록 기운은 커튼콜로도 이어진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싱얼롱, 뮤지컬 '광화문연가'의 커튼콜 떼창 만큼은 아니지만,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 주인공 '마티'처럼 기타를 잡고 폴짝 뛰어나오는 강신일의 기타 연주가 흥을 돋운다. 연극에 나온 수록곡들의 앨범 커버가 세트를 배경 삼아 영화 크레디트처럼 올라가는 것도 또 다른 볼거리다. 공연은 2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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