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 수호 나선 임태희, 학생 인권과 균형추 맞출까[초점]
'진보교육의 산실' 경기도서 첫 보수교육감으로 대대적인 손질
학생인권조례 전면 개정 추진…교사 족쇄 상위 법안 개정 요구
'주호민 사건' 특수교사 복직, '의정부 초임교사 사망' 진상조사
[수원=뉴시스] 16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경기도교육청 남부신청사 2층 컨퍼런스룸에서 임태희 경기도교육감이 기자회견을 열고 교권 보호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경기도교육청 제공) 2023.08.16. [email protected]
2010년 경기도에서 처음 제정된 '학생인권조례'는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학생 권익과 인권을 신장시키는 발판이 됐다. 이로 인해 학교 안에서 체벌과 두발 검사, 야간자율학습 등 부조리한 폭력들이 사라졌다.
그런데 거꾸로 교사들은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에도 아동청소년 보호를 위한 법안들까지 생겨나면서 학부모 민원과 학교 폭력, 학교 관리자들의 책임 떠밀기 등으로 점점 교단에서 설 자리를 잃어갔다.
◇13년 만의 학생인권조례 전면 개정, 실현되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사들은 과거처럼 제왕적 권위로 군림하는 '교권'이 아닌 교육자로서 실질적으로 교육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달라고 목소리를 냈다.
국회의원 3선에 대통령실 실장과 고용노동부 장관 출신으로, 지난 6·1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임태희 경기도교육감은 후보자 시절부터 이러한 교사들의 의견에 공감하고 재임과 동시에 학생 인권과 교권 사이의 기울어진 균형추를 맞추는 작업에 돌입했다.
임 교육감은 취임 1년 만인 지난달 21일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전면 개정을 발표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는 현재의 '민주주의 교실' 문화를 불러오는 데 근간이 된 것으로, '무상급식', '9시 등교', '혁신학교'와 함께 진보교육감표 대표 정책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이른바 '진보교육의 산실'로 불리는 경기도에서 첫 집권한 보수교육감이 이를 대대적인 손질을 예고한 것이다. 새로 개정할 조례에서는 다른 학생과 교직원 인권을 침해하는 학생에 대해 법령과 학칙에 따른 책임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계획이다.
[서울=뉴시스] 최동준 기자 = 전국의 교사들이 22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에 대한 추도식 및 교사 생존권을 위한 집회를 열었다. 사회자가 울먹이며 교사 생존권 보장 구호를 선창하자 한 교사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3.07.22. [email protected]
이 과정에서 학교는 학생 포상, 조언, 상담, 주의, 훈육 등의 방법을 쓸 수 있다. 만약 교육활동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경우 가정 혹은 전문기관으로 분리도 가능하다. 임 교육감은 "학생 개인의 권리 보호 중심에서 모든 학생의 학습권과 교원의 교육활동 보호에 대한 책임성을 강화한다"고 개정 취지를 밝혔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는 2010년 10월 김상곤 전 교육감 재임 때 처음 공포됐다. 이 조례는 학생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반드시 보장해야 하는 최소한의 권리를 규정했다.
이 조례에서는 학생 인권의 범위를 크게 10가지 개념으로 요약했다. 구체적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 ▲사생활 비밀과 자유 및 정보에 관한 권리 ▲권리침해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폭력 및 위험으로부터의 자유 ▲양심·종교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 등이다.
이러한 조례는 학교 안에 남아있던 군대식 문화를 없애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담당하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학생 체벌이 당연하던 교실 문화가 사라졌고, 획일적인 두발 제한을 비롯해 밤늦게까지 학생들을 교실에 강제로 붙잡아놨던 야간자율학습이 전부 폐지됐다.
하지만 학생인권조례 시행 이후 '울산 아동학대 살해 사건' 등 사회적 이목을 끄는 학부모나 교육시설에 의한 학대사건이 국민들의 뇌리에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졌고, 국회에서도 아동·청소년까지 제도권에서 보호할 수 있는 법안을 잇따라 발의하거나 개정이 이뤄졌다.
◇'직위해제 풀고 진상조사 지시'...경기교육청, 교권침해 선제적 대응
문제는 해당 법안들로 인해 교사들이 무리한 아동학대 신고를 당하거나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제약하는 족쇄가 됐다는 점이다. 지난달 22일부터 주말마다 '서이초 사건'으로 숨진 교사를 애도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에서 열리고 있는 추모집회에 참석 중인 교사들도 이를 지적하며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교총에 지난해 접수된 교권침해 상담처리 건수는 520건으로, 2016년(572건) 이후 6년 만에 가장 많았다. 교권침해 상담 건수는 2017년 508건, 2018년 501건, 2019년 513건 등 매년 500여건을 기록했다.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2020년 420건, 2021년 437건으로 감소했지만, 다시 유행 이전 수준으로 상담이 늘어난 셈이다.
[서울=뉴시스] 황준선 기자 = 24일 오전 교사가 교내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앞으로 시민이 지나고 있다. 교육부와 서울시교육청은 합동조사단을 꾸려 24일부터 오는 27일까지 교사 사망 사안에 대해 조사를 벌인다. 2023.07.24. [email protected]
하지만 교사를 보호해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미비하다. 전교조는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민형배 의원이 17개 시·도교육청으로부터 제출받은 '교육활동침해 교원 소송비 및 치료비 등 지원 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18~2021년 치유센터에서 교권을 침해당한 교사에게 소송비를 지원한 경우가 총 31건에 그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국민적 관심을 모았던 일명 '주호민 사건'은 교권 침해사례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교육청의 달라진 기류를 단적으로 보여준 첫 선례로서 의미를 지닌다.
학생 인권과 교권 사이의 균형을 약속한 임 교육감이 학생인권조례 전면 개정 발표에 이어 웹툰작가인 주씨 측의 아동학대 혐의 고소로 직위해제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특수교사를 다시 학교로 복직시겼다. 현직 교육감이 학생과 학부모가 아닌 교사의 편에서 본격 대응에 나선 것이다.
임 교육감은 해당 특수교사를 선처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도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는 탄원서에서 "특수교육 현장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특수교육은 지속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에서 수많은 일들이 교육적 해결을 넘어 법적 해결에 의존하게 된다면 그 피해는 특수교육을 받아야 할 다른 장애학생과 학부모에게 결국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선처를 호소했다.
이뿐만 아니다. 임 교육감은 의정부시 한 초등학교에서 초임교사 2명이 6개월 간격으로 사망한 사건과 관련해 진상 규명을 위한 즉각적인 조사를 지시하는 등 선제적 조치를 단행했다.
도교육청은 이번 사안과 관련해 본청 감사관실, 생활인성과를 비롯해 의정부교육지원청과 합동 진상조사반을 꾸려 조사에 착수했다. 도교육청은 필요한 경우 수사기관과도 협조해 철저한 조사를 진행할 방침이다. 만일 이 과정에서 악성민원 등 교권 침해사례가 드러나면 관련 조치를 취할 계획이다.
◇교사 족쇄 채운 법안들, 이번에 국회 문턱 넘을까
임 교육감은 교사들의 생존권 사수를 위한 외침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도록 상위법 개정과 고시 정비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지난 8일 열린 제92회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임시총회에서 교권회복 입법화 지원을 위한 '여·야·정·시도교육감 4자 협의회' 구성을 제안했다. 이는 곧 현실화됐다. 교육부가 국회 교육위원회와 협의를 통해 4자 협의체를 꾸렸다.
[서울=뉴시스] 김선웅 기자 = 초중고 교사들이 12일 서울 종로구 종각 일대에서 집회를 열고 안전한 교육환경을 위한 법 개정, 민원창구 일원화 및 악성 민원인 방지 방안 마련, 교사 생활지도권 보장, 정서행동 위기학생 지원책 마련 등을 촉구하고 있다. 2023.08.12. [email protected]
임 교육감은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여·야·정·시도교육감 4자 협의체’ 첫 회의에서 "교권 보호를 위한 입법은 근본적으로 교육의 본질을 바로 세우는 계기"라며 "법률 개정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 교육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출발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당한 교육활동 보호를 위해 초중등교육법과 아동학대처벌법, 교원지위법, 특정범죄가중처벌법, 학교폭력예방법 등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교사의 교육활동을 단순히 가르치는 행위로 국한하지 않고 국가 공무수행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교육활동을 침해하는 원인제공자에게 공무집행방해나 무고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임 교육감은 학생인권조례 전면 개정 의사를 밝힌 지 4주 만인 지난 16일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종합대책'을 추가 발표했다. 이를 통해 단계별 민원대응시스템을 마련해 상담체계 정비와 함께 녹음·녹화시설을 갖춘 상담실을 구축하기로 했다. 교사의 개인 휴대전화번호도 비공개한다. 도교육청은 이에 필요한 예산을 추경을 통해 올해 중으로 확보할 계획이다.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교권보호 대책 추진에 일선 교사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특히 임 교육감을 향해 교육 경력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상황에서 교사들의 염원이었던 교권 보호정책 추진을 현직 교육감으로서 가시적 움직임으로 이끌어낸 데 놀랍다는 반응이다.
[수원=뉴시스] 임태희 경기도교육감이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교권회복 및 보호 입법화 지원을 위한 '여·야·정·시도교육감 4자 협의체’ 첫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경기도교육청 제공) 2023.08.21.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도내에서 7년차에 접어드는 한 중등교사는 "그동안 교육감이 후보자 시절부터 공약으로 내세웠던 교권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들이 하나둘씩 마련되고 있는 것 같다"며 "지금 발표되고 있는 정책들이 단순히 구호로 끝나지 않고 학교현장에서 잘 정착될 수 있을 때까지 교육청 관심이 지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보수교육감 체제로 전환되면서 진보교육감 흔적 지우기 또는 체벌과 규제가 난무하는 과거로의 회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임 교육감은 이 같은 비판에 대해 학생과 선생님의 권리는 한쪽의 약화가 다른 한쪽의 강화를 이끄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는 의견이다. 그는 "학생들은 존중받고, 선생님은 존경받아야 교육 현장을 바꿔나갈 수 있다"며 "학생·학부모·교사 교육공동체 서로 간의 믿음과 지지가 회복되고, 행복한 학교 교육을 만들어 가기 위해 끝까지 많은 관심과 협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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