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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5·18, 헌법 전문에 왜 넣어야 하나

등록 2017.05.17 20:10:49수정 2017.06.08 14: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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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경 사회부장

김호경 사회부장

【서울=뉴시스】김호경 사회부장 =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후보 때 "5.18 민주화운동 정신을 헌법 전문(前文)에 기록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는데, 사실 그 같은 방안은 이미 30년 전에 정치권에서 구체적으로 시도된 적이 있다. 1987년 민정당 노태우 대표의 6·29선언 직후 여야 핵심 인사들로 구성된 8인 정치회담에서 헌법 개정안을 협상할 당시 현 민주당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는 통일민주당의 개헌 시안에 다음과 같은 헌법 전문 개정안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의 독립정신 위에 건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제1공화국을 재건하였으며 4·19의거와 5·18광주의거로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하여서는 단호히 거부하는 국민의 권리를 극명히 하였고…."

그러나 8인 정치회담 협상에서 민정당 측은 "역사적 평가나 가치가 확립되지 않은 일부의 주장을 전 국민적 합의가 담긴 전문에 넣는 것은 곤란하다"고 극력 반대해 결국 '5·18광주의거' 삽입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개헌 논의가 수시로 불거질 때도 이 부분은 거의 재론되지 않았고, 국민들은 그런 시도가 있었는지조차 대부분 모르거나 망각한 채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이 문제가 불쑥 공약으로 제기됨으로써 수면 위로 급부상한 셈이 됐다. 그런데 결론만 제시돼 있고 이렇다 할 앞뒤 보완 설명이 없는 탓인지 이 공약이 특별히 조명을 받거나 국민적 관심을 끌지는 못한 것 같다. KBS 이사이기도 한 조우석 미디어펜 주필이 칼럼을 통해 "호남표 구걸에 목매는 그가 드디어 자살골을 넣은 셈인데, 희한하게도 누구도 이걸 정면에서 문제 삼지 않고 있다"라며 "문재인 같은 위인이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겠다는 위험천만한 공약을 내세운다. 이런 공약이야말로 국가정체성을 흔드는 시한폭탄"이라고 규정하는 등 보수·수구층에서 일부 반발이 없지는 않았으나 쟁점으로 공론화한 정도는 아니었다.

문 대통령이 당선된 뒤에도 마찬가지다. 바로 내일이 5·18 민주화운동 37주년이지만 언론이나 SNS 등에서 이슈가 되는 것은 주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에 집중돼 있고 헌법 전문 수록 문제는 상대적으로 그늘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사안의 의미와 무게감을 따지자면 헌법 전문 수록 문제가 좀 더 중요하리라고 본다.

헌법 전문(前文)은 국가의 기본 원리와 추구하는 가치, 건국이념 등을 담고 있어 '헌법의 얼굴'이라고도 표현된다. 이를 통해 그 국가의 정신을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가령 미국은 '우리들 합중국 국민은 보다 완벽한 연맹을 형성하고, 정의를 확립하고, 국내의 평화를 보장하고, 국민복지를 증진하고, (중략) 우리들과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유의 축복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 아메리카합중국 헌법을 제정한다'라고 돼있다. 프랑스는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 헌법은 제정 당시의 전문이 거의 그대로 이어져 왔는데, 지금까지 개헌 과제를 놓고 정치권과 학계에서 다각도의 논의가 이뤄져 왔지만 전문을 둘러싼 쟁점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다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이라는 대목이 다민족·다문화 시대에 걸맞지 않아 국내 수많은 외국인 체류자 및 결혼이주자 등을 포괄할 수 있는 좀 더 포용적인 표현으로 바꾸자는 견해, 또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대목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4·19의거이념인 '자유·민주·정의'를 명시하는 것이 헌법정신으로 승화시키는 데 바람직하다는 지적 정도가 존재해왔다. 이제 문 대통령이 화두를 던진 것을 계기로 향후 개헌 논의 때 전문을 놓고 가장 검토가 필요한 부분은 '5·18민주화운동 정신' 삽입 문제가 됐다.

왜 '5·18민주화운동 정신'이 한 나라의 최상위법이자 기본법이며 모든 법질서의 정점에 위치한 헌법에까지 굳이 명기돼야 할까. 30년 전 민정당 측은 "역사적 평가나 가치가 확립되지 않은 일부의 주장"이라고 치부했으나 이후 지난한 과정을 거치면서 5·18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적·법률적 평가와 정의는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그럼에도 일부 보수층에서는 이를 '좌파정권 10년의 소산' 정도로 치부하며 여전히 5·18의 성격을 의심스러워하고 폄훼하곤 한다. 이들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5·18의 의의를 뭐라고 언급했든 그건 전혀 의미가 없고 오히려 의혹과 반발만 일으킬 것이다.

그렇다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임기 내내 맹비난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경우는 어떨까. 친박(친박근혜) 그룹의 좌장인 서청원 의원이나, 한때 "이 김무성, 박근혜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외쳤던 김무성 의원 등 상당수 신한국·한나라·새누리당 출신 의원들의 정치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YS에게 5·18은 무엇이었을까. 결론적으로 YS에게 5·18은 '심화(心火)가 솟아올라 견딜 수 없는' 사건이었고, '한순간 한순간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으며 "이 민족의 가슴에 영원한 멍울이 될 수밖에 없는 한(恨)"이었다.

"그날 밤부터 '광주 사태'가 단편적으로 전해졌다. 권력에 눈먼 정치군인들의 야만적인 학살극이 시작된 것이었다. 1980년 5월20일 아침 8시경 M16 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착검까지 한 무장 헌병 중대병력이 내 집 주변을 에워쌌다. 그중 20여 명은 대문을 밀고 들어와 10여 평 남짓한 비좁은 마당이 꽉 차게 늘어섰다.

연금이 시작될 즈음, 나는 광주에서 걸려 온 당원들의 떨리는 전화 목소리를 통해서 충격적인 학살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심화(心火)가 솟아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계엄군의 검열로 누더기가 된 신문이나 TV를 통해서는 일반 국민들이 '광주사태'의 진상을 알 도리가 없었지만, 광주의 소식을 이미 전해 들은 나로서는 '광주'가 보도되는 한순간 한순간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정권욕에 사로잡힌 전두환 일당은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돌림으로써 역사에 남아서는 안 될 참극을 연출하고 있었다.

광주사태 3주년을 맞은 1983년 5월18일 나는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국민 여러분! 나의 단식은 5·17군사쿠데타에 의하여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파괴·부정당함은 물론, 민주화를 요구하던 수백수천 명의 민주시민이 광주에서 무참히 살상당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데 대한 자책과 참회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며, 비극적인 광주사태로 목숨을 잃은 영혼과 거기서 희생된 민주시민들과 그 가족이 겪고 있는 고통에 동참하는 기회이며, 동시에 반민주적인 독재권력의 강화와 인권유린 및 정치적인 탄압에 대한 항의와 규탄의 표시입니다.'"
('김영삼 회고록' 중 발췌)

군사정권기를 지나 YS의 이른바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래 대한민국에서 5·18에 대한 역사적·법적 규정은 공식적으로 정리가 다 끝났다. 1995년 12월에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과 '헌정질서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고, 5·18특별법에 의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의 죄목으로 역사적 심판을 받았다. 1997년 4월에는 5·18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으며, 같은 해 5월18일에는 정부가 주관하는 첫 5·18기념식이 거행됐다. 2001년 12월에는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는데, 이 법은 '예우의 기본 이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에 이바지한 5·18민주화운동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의 귀감으로서 항구적으로 존중되고, 그 희생과 공헌의 정도에 상응하여 민주유공자와 그 유족 또는 가족의 영예로운 생활이 유지·보장되도록 실질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2002년 7월엔 희생자 묘역이 국립5·18민주묘지로 승격됐다. 급기야 2011년 5월에는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서석구, 지만원 씨 등 일부 인사가 5·18이 북한군의 학살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네스코 본부에 반대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유네스코는 국내외 검증 절차를 거쳐 '북한군 개입설'이나 '폭동설' 등은 허위라고 결론짓고 심사위원 14명 만장일치로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유네스코는 5·18 민주화 운동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를 이루는데 기여했으며, 나아가 냉전 체제를 깨트리는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반역사적 왜곡이 자주, 심상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5·18을 여전히 '북한군 또는 북한 측 사주를 받은 빨갱이들의 폭동'으로 폄훼하고 일간베스트 같은 극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희생자들의 주검 사진을 두고 "햇살 봐라. 날씨 죽이네. 홍어 좀 밖에 널어라" "5월18일 주말을 맞아 광주 수산시장을 찾은 많은 주민들이 진열돼 있는 홍어를 꼼꼼히 살피고 있다" "아이고 우리 아들 택배 왔다, 착불이요" 등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패륜적인 글들이 버젓이 게시돼 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북한 특수군이라는 주장을 퍼뜨려온 대표적 인물인 지만원 씨는 약 한 달 전에도 한 보수 매체에 '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역사는 5.18 역사입니다!'라는 제목에 '5·18의 실체는 북한특수군 600명과 이 작전에 이용된 사회불만세력'이라는 부제가 달린 글을 발표했다. 지씨는 최근까지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해오고 있다.

이런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지기수다. 광주시와 5·18기념재단 등이 2013년 5월 이후 3년여간 각종 인터넷 사이트와 개인 블로그, SNS 등에 게재된 5·18 비하 발언이나 가짜뉴스 등을 수집한 결과 신고된 건수가 4000여건에 달했다. 이처럼 5·18과 그 희생자들을 모독하는 적나라한 선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면서 10대 청소년들과 20대 청년층에게까지 잘못된 인식이 독버섯처럼 확산돼 왔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5·18기념재단이 올해 초 현대리서치에 의뢰해 성인(만 19세 이상) 1000명, 청소년(중·고등학생) 1140명을 상대로 '5·18 인식 조사'를 실시했더니, '5·18이 북한과 연결됐다'는 질문에 성인 11.9%, 청소년 8.4%가 '동의한다'고 답했다는 충격적인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성인 13.3%, 청소년 12%는 5·18이 불순 세력이 주도한 폭력사태라는 데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5·18에 대해 성인 13.2%, 청소년 27%는 아예 '잘 모른다'고 답했다. 5·18 특별법은 성인 절반가량(51.7%)이 모른다고 답했고, 청소년은 무려 72.5%가 모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5·1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사실은 절반가량(성인 53.6%, 청소년 56.5%)이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전두환 전 대통령마저 최근 회고록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이거나) 또는 성직자가 아니다"라고 극언을 하는가 하면 자신을 "5·18의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 됐다"고 표현하는 등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며 역사 왜곡에 적극 가담하는 실정이다.

이 같은 퇴행적 사태가 왜 이다지도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일까.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언론이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해 국민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엄청난 비극이 전개되고 있었는데도 당시 모든 언론은 침묵을 지켰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엄사령부의 폭압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해 많은 취재진을 광주에 급파했음에도 사태 사흘째인 5월20일까지 단 한 줄의 기사나 사진도 보도할 수 없었고, 대신 계엄사령부 측의 대국민 담화문이나 경고문을 게재하며 '폭도'와 '불온세력에 의해 조종되는 폭동'이라는 단어를 나열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계엄사의 강요가 없었는데도 일부 언론인과 매체는 능동적으로 신군부의 의도에 영합하는 기사나 칼럼을 실었다.

이처럼 진실 보도의 실종 사태가 적어도 5공화국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탓에 폭도, 빨갱이, 북한군 운운하는 5·18에 관한 날조된 가짜뉴스들이 지금까지 유통되며 많은 국민들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이 사관(史官) 역할을 방기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후유증의 사례라고 할 만하다. 물론 당시 직업윤리와 사명감을 갖고 있던 언론인들이 느꼈던 자괴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무기력을 지탄하기 전에 지옥도의 한복판을 목격하고 다니면서도 기사는 쓸 수 없었던 기자들 심정도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필자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당시 한 기자의 일화를 다소 길게 인용해본다.

"여기저기 곳곳에 붙은 벽보에 기재된 희생자들의 인적사항을 취재하던 기자는 두 사람의 20대 젊은이로부터 봉변을 당했다. 옛날 경찰국장 관사의 벽에 붙은 사망자의 명단과 신원미상의 인상착의와 특징을 열심히 적고 있을 때였다. 지나치던 두 청년이 갑자기 내 취재수첩을 툭 쳤다. 수첩은 저만큼 길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허리를 구부려 수첩을 줍고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말했다. '뭐 하는 사람이오?' 아주 불쾌한 언사였다. '동아일보 기잔데, 왜 그래?' 나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문에 나지도 않는데 뭐 하러 적어요. 또 적는다 해도 검열 받는답시고 모두 저쪽에 알려 주게 되는데 적을 필요 없어요'

나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당혹했다. 또 이때처럼 기자로서의 수모와 자괴와 환멸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당장 기자라는 직업을 집어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들의 말이 옳은데 어쩌랴. 날마다 아무리 열심히 취재해도 기사 한 줄 나지 않아 아침저녁으로 '동아일보 기자가 뭐 하는 거냐' '집을 폭파해버리겠다'는 항의와 협박전화를 받고 있는 터였다. 또한 기사를 열심히 써도 검열을 받아야 하므로 결국 모든 정보를 계엄사 쪽에 제공해 주게 되는 셈이니 그들의 말은 모두 옳았다. 그러나 나는 이때 기사도 기사려니와 뒷날 정확한 사실을 공개하기 위해 제대로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열심히 취재하고 있었다.

'자네들 학생이야?' 내가 바로 경어를 쓰지 않고 반말로 내려하자 그들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네들 말도 맞는 말이야. 그런데 자네들(학생수습위를 지칭) 지금 이러한 상황을 상세히 적고 있는 사람이 있어?' '없는데요.' 그때서야 공손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사를 쓰는 기자이기도 하지만 지금 당장 광주 소식이 제대로 알려지고 있지 않으니 언젠가는 오늘의 모든 것을 정확하게 공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적고 있어. 만약 자네들이 잘 적고 있다면 나는 이 메모가 필요 없네.' '아니에요. 잘 적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그들은 뒤통수를 긁으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김영택 著, '5월18일, 광주-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에서 발췌)

당시 언론이 현장 상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바람에 국민들이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 했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도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그릇된 토양이 만들어진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지만, 5·18에 대해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 사법부, 학계를 비롯한 민간 부문 등에서 공식적이고 보편적으로 내린 결론은 분명하다. 5·18은 북한군이 주동한 폭동이나 내란이 아니라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다수 시민들이 목숨을 던졌던 처절한 집단적 희생이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는 그 민주주의다.

5·18 민주화운동은 불법 쿠데타 세력인 전두환 신군부의 독재와 국가 폭력에 맞서 민중이 사회적·정치적 주체로서 저항권을 행사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수호하고 민주적·법치주의적 국가질서를 회복하려 한 '시민혁명'이자 '주권혁명'이었다. 아울러 헌법의 이념적 지표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하고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어서 국민 기본권 측면에서도 의의가 크다. 나아가 5·18 운동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자 민주화의 기폭제로 작용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헌법 전문에 열거된 3·1운동과 4·19민주이념에 비교해 결코 그 의미와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이 같은 사정들을 종합할 때 5·18 민주화 운동의 헌법 전문 명문화는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5·18의 실체와 의미를 훼손하는 다양한 왜곡들이 지속적으로 확대·확산되며 소모적인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는 사태를 막고, 숭고한 민주화 운동으로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국민들 인식 속에 명확하게 자리 잡기 위해서는 헌법 정신으로 승화되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하겠다. 게다가 대선 과정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도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겠다는 문재인 후보의 공약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으며 개헌시 협의해 보겠다"고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실이 있다. 언젠가 본격화할 국회에서의 개헌 협상 때 여야 합의를 통해 타결을 볼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

필자는 2년 여전 국회 측에 개헌 관련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할 때 5·18정신을 전문에 포함시키는 다음과 같은 개정 예시 안을 제시한 적이 있다. 문구 자체가 어렵거나 복잡한 것은 아니다. 다만 결단의 문제일 뿐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과 국가권력의 부당한 폭력에 저항한 5·18민중항쟁정신(또는 5·18민주화운동정신)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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