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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법원의 수직·서열·관료화…그 자체가 적폐다

등록 2019.01.25 17:4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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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법원의 수직·서열·관료화…그 자체가 적폐다

【서울=뉴시스】이혜원 기자 = 언론사는 상하관계가 엄격하다. 조직 문화가 그렇다. 절차와 과정을 중요시한다. 늘상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는다. 이 과정이 틀어지면 난리가 난다. 그 탓에 지겨울 정도로 보고를 하고 선배 지시를 기다리곤 한다.

그런데, 지시를 받는 입장에서 볼 때 위에서 내려온 '하명'은 상당히 모호한 경우가 많다. 때론 중의적이다. 가령 대충 하나 써서 내라는 말은 '기사를 빨리 써서 가져오라'는 뜻일 수 있다. 시간 날 때 전화 달라는 문자메시지는 '지금 당장 나에게 전화하라'는 의미로, 여유 있을 때 한번 알아보라는 건 '최대한 빨리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말로 읽힐 수 있다. 다시 한번 검토해 보라는 말은 '네 주장은 틀렸으니 고치라'는 의미가 크다.

물론 상사의 의도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순수하게 '일이 많으니 완급조절을 하라'거나 '급한 일 아니니 여유 생기면 통화하자'는 뜻일 수 있다.

하지만 진의가 무엇이었든 부하 입장에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상사의 말을 해석해서 참뜻을 헤아린 뒤 실행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사회에선 그래야 '사회생활 잘한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문화는 상하관계가 뚜렷한 기업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각자 독립된 지위를 갖는 법관들도 상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한다. 부장판사와 배석판사 2명으로 구성된 합의부에서도 이름은 '합의'지만, 사실상 부장판사 의견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는 젊은 판사들이 있다.

지난 24일 구속된 양승태(71·사법연수원 2기) 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 등에서 함께 일한 후배 법관들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조사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서 후배들에게 배신당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후배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거나, 그들이 알아서 한 일이라고 반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 전 대법원장이 했을 과거 발언의 참뜻은 알 수 없다. 순수하게 '한번 알아보라'고 한 말일 수 있다. 하지만 후배들은 다르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한번 알아보라고 했다고 대충 조사해 약식으로 처리할 순 없는 일이다. 부당한 지시에 왜 순응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반대의견을 낼 수 없는 문화가 후배들을 억누르고 있던 것 아닌지 모를 일이다.

양 전 대법원장 구속으로 사법부 신뢰는 유례없이 요동치고 있다. 구속영장 발부가 곧 유죄를 의미하진 않는다. 구속된 뒤 재판을 통해 무죄로 풀려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번 사건이 치명적인 건 유무죄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사법부에 대한 신뢰, 나아가 법관 독립이라는 헌법 가치가 훼손됐기 때문이다.

'사법농단' 의혹의 시작은 법관 블랙리스트였다. 미운털 판사를 솎아 내기 위해 행정권을 남용했고, 법관 독립을 침해한 결과를 낳았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에게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지만 실상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법 신뢰 회복은 법관 독립에서 출발해야 한다. 법관 관계를 수직적이고 서열화 해선 안된다는 뜻이다. 법원조직의 관료화는 그 자체가 적폐다. 사법 민주화를 어떻게 현실로 만들지는 법원 개혁을 추진하는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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