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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꿈이었던 故구자경 LG 명예회장, 교사시절 '호랑이 선생님' 별명

등록 2019.12.14 12: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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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1970년 1월 취임 당시의 구자경 LG 명예회장. 사진 LG

[서울=뉴시스] 1970년 1월 취임 당시의 구자경 LG 명예회장. 사진 LG

[서울=뉴시스] 김종민 기자 = 고(故) 구자경 명예회장은 유가(儒家)의 엄격한 가풍 속에서도 실사구시를 중시하며 번성해 온 능성 구씨 집안의 후손으로, 1925년 경남 진양군(현 진주시)에서 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 슬하의 6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발하고 호기심 많은 성격이었던 유년기의 구 명예회장은 유림에서 존경 받던 증조부 만회 구연호(晩悔 具然鎬) 공의 사랑과 외유 내강형의 선비로 유교의 전통과 신문화의 합리적 사고를 함께 지녔던 조부 춘강 구재서(春崗 具再書) 공의 가르침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형제간의 우애와 근검한 생활을 중요시 하는 가통 속에서, 특히 장남으로서 집안의 중심 역할이 가져야 할 ‘책임감’과 흐트러짐 없이 가족의 모범이 되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이렇게 구 명예회장에게 자리잡은 가치관은 경영활동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경영자로서 스스로에게 엄격함을 유지하는 한편, 항상 리더로서의 역할과 책임의식을 먼저 생각하게 했다.

실제 구 명예회장은 회장으로 취임한 뒤에도 외부 업무를 마친 후 단 10분이 남아도 꼭 회사로 돌아온 후 퇴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이를 거의 어기지 않았다. 또 몸이 좋지 않을 때 조차도 상대방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정을 바꾸지 않을 정도로 신뢰를 중요시 여겼다. 또한 지방 공장을 방문하거나 외국 출장을 갈 때도 불필요한 의전 절차를 삼가도록 했는데, 이는 회장이 먼저 모범을 보여 허례허식을 경계하는 생각에서였다.

구 명예회장은 당시 서부 경남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이었던 진주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나게 됐다. 중학교 시절에는 씨름과 같은 운동과 서예 등을 열심히 했다고 한다.

구 명예회장의 유년 시절 장래 희망은 교사였다. 지수초등학교를 다닐 때 과학을 접목한 농경법을 가르친 선생님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자연 친화적인 삶이 중요하다는 것과 교사의 길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후에 진주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희망’을 주제로 한 작문 시험에서도 주저 없이 교사로서의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44년 진주사범학교 강습과에 입학 후 1년 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진주의 한 소학교로 발령 받았다. 헌데 그 소학교의 일본인 교장은 일본에 기증할 경전투기 구입 건으로 구 명예회장의 부친이자 당시 구인상회를 운영하던 구인회 사장에게 기부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어 구 사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학교에 출근해보니 부임 인사를 받는 교장과 일본인 교사들의 표정이 모두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자리도 구석으로 배정받게 됐다. 구 명예회장은 이런 차가운 분위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느니 차라리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다음날부터 출근을 포기하고 말았다.

귀향해 한 동안 감나무와 복숭아나무를 가꾸고 있던 차에 마침 모교였던 지수초등학교 교사로 다시 발령받아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퇴근 후에는 농사일에 몰두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구 명예회장은 지수초등학교에서 2년,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에서 3년을 교직에 몸담았는데, 무엇보다 학교 규율을 세우는 것을 우선시하여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제자였던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은 당시 모습을 회상하며 “체육시간에 호루라기를 불며 구령을 붙이는데 그 모습이 하도 엄해 우리는 벌벌 떨었지요. 정말 호랑이 선생님이 오셨구나 하면서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미래에는 기술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시대가 틀림없이 올 것이라 믿고, 교육의 중점목표에 기술력 양성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시로 학생들에게 “나라가 힘이 강해지려면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 그러니 훌륭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며 기술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곤 했다.

당시 과학 과목의 교재도 마땅치 않아 일제시대의 책을 참고하여 구 명예회장이 스스로 교재를 만들어 가르치면서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산수와 과학의 학업 능력 향상을 위해 기초부터 다시 가르치고, 매주 상당한 양의 숙제를 내 주는 등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중학교 진학 반인 6학년 담임을 줄곧 맡기도 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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