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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복지]환갑 앞둔 다니엘 블레이크와 컴퓨터 난독증, 그리고 질병수당

등록 2019.12.21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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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속 다니엘

질병수당 신청하려니 "인터넷으로 확인하라"

한국 60대 1인가구 인터넷 이용률 53% 불과

24시간 복지상담콜센터 있지만 바쁠 땐 '대기'

교육만으론 부족…서울시 '시니어 지역 상담가'

[서울=뉴시스]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중 한 장면. (사진=BBC Films 누리집 갈무리)

[서울=뉴시스]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중 한 장면. (사진=BBC Films 누리집 갈무리)

[서울=뉴시스] 임재희 기자 = "난 연필 시대 사람이오."

"난독증 대상 특별 상담 번호는 있어요."

"몇번이오? 난 컴퓨터 난독증인데."

"인터넷에 나와요."

심장질환 탓에 더 일하기 힘들어진 59세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는 질병수당을 신청해 보지만 거절당한다.

다니엘이 이의 신청을 위해 찾아간 일자리플러스센터에서 항고 방법을 묻자 직원은 신청서 제출을 요구한다. 신청서를 달랬더니 인터넷에 있다고 한다. 인터넷을 쓸 줄 모른다는 다니엘에게 전화 도우미를 추천하지만 다니엘은 이미 전화로 상담받느라 1시간48분을 기다렸다. 급기야 다니엘은 폭발하고 만다. "차라리 집을 한 채 지으라고 하쇼!"

디지털 시대 속 '연필 시대'를 살고 있는 다니엘에게 직원이 권한 게 난독증 대상 특별 상담이다. 컴퓨터를 쓸 줄 모르는 다니엘을 직원은 당연하다는 듯 난독증 환자로 대우한 것이다. 게다가 상담을 받고 싶어도 인터넷에서 번호를 확인해야 한다. 돌고 돌아 인터넷이다.

최근 개봉한 '미안해요, 리키'의 감독 켄 로치가 2016년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다니엘은 어떤 사람인가.

예전 직장 동료들이 복직 여부를 묻는 걸 보면 직업적 능력은 의심하지 않아도 좋겠다.

일자리플러스센터에서 만난 싱글맘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가 물이 새는 변기 때문에 곤란해 하자 변기를 고쳐주고 전기 배선까지 손봐주겠다고 한다. 아이들 전학 시키느라 전기세 낼 돈이 없다는 케이티의 집에 몰래 돈을 놓고 오는 센스도 갖췄다.

완벽한 그에게 없는 딱 한가지는 '인터넷을 쓸 줄 아는 능력'이다.

그렇다고 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다니엘이 아니다.

영화 중반부 다니엘은 짧은 여정을 떠난다. '인터넷을 찾아서'. 집에 컴퓨터가 없는 다니엘은 도서관으로 간다. 젊은이들로 가득 찬 자리가 빌 때까지 한참을 기다린 뒤 겨우 컴퓨터 앞에 앉았지만 산 넘어 산이다. 도서관 직원의 도움을 받아 홈페이지까지 들어갔지만 거기까지다.

"혼자서도 하시겠죠?"라며 직원이 떠난 뒤 다니엘은 마우스 커서로 페이지를 내리는 데 애를 먹는다. 옆자리 학생에게 클릭하는 법을 배웠더니 이번에는 오류 메시지가 뜬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데엔 또 다른 학생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여기까지다. 클릭 배우느라 도서관 컴퓨터 이용시간을 다 써버린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다니엘은 일자리플러스센터에서 자신을 도와줬던 앤(케이트 루터)을 떠올린다. 예상대로 앤은 다니엘을 친절하게 도와주지만 앤의 상사가 앤을 불러 세운다. "잘못된 선례가 남는다"며 인터넷 업무를 도와줘선 안 된다고 가로막았다.
 
또 돌고 돌아 다니엘이 도착한 곳은 옆집 청년 차이나(케마 시카즈웨)의 집이다. 차이나는 중국 광저우 친구와 인터넷 화상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고 운동화도 한켤레씩 몰래 들여와 팔면서 다니엘의 주소도 이용하는 이웃집 친구다.

그토록 험난했던 다니엘의 인터넷 사용기는 차이나의 집에서 끝난다. 차이나는 중국인 친구와 영국 프리미어리그 팀 응원가를 부르고 남은 시간에 눈 깜짝할 사이 신청 작업을 해결했다. 프린트도 해줬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친 뒤 다니엘은 일자리플러스센터 직원으로부터 "분명 (기각된 질병 수당 신청 항고에서) 승소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승소 소식을 듣기 직전 멈추고 만다.
[서울=뉴시스]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중 한 장면. (사진=BBC Films 누리집 갈무리)

[서울=뉴시스]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중 한 장면. (사진=BBC Films 누리집 갈무리)

이런 다니엘의 사정을 IT(정보통신) 강국 한국에 적용해 보자.

인터넷으로 대국민 복지포털 '복지로'에 들어가면 정부가 제공하는 복지제도가 생애주기와 가구상황별로 뜬다. 인터넷을 쓸 줄 아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아동수당이나 보육료, 양육수당 외에 다니엘 또래들을 위한 기초연금도 안내하고 있고 노인일자리사업에 어떤 일들이 있는지도 볼 수 있다. 원한다면 신청도 할 수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인터넷을 할 줄 아는 노인들에게만 적용되는 얘기다. 심지어 한국에선 공인인증서란 것도 발목을 잡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의 '2018 인터넷 이용 실태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 1인 가구의 인터넷 이용률은 52.3%였다. 한국에서도 노인 2명 중 1명은 다니엘과 비슷한 상황이란 얘기다.

오늘 한국에서 다니엘을 만났다면 알려줄 수 있는 건 안타깝게도 일자리플러스센터 직원과 마찬가지로 전화 상담이다. 129번만 누르면 보건복지상담센터 콜센터로 연결된다. 보건과 복지 업무를 보건복지부 1개 부처가 다 맡는 우리나라 특성상 보건의료 정책부터 사회복지, 인구아동, 노인장애인, 위기대응까지 한꺼번에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다니엘과 비슷한 어려움은 발생할 수 있다. 171명의 상담 직원들이 4교대로 긴급복지지원 등 위급한 상황의 경우 365일 24시간 대기하고 있지만 주요 정책이 발표되거나 관심을 끌 때면 상담 전화가 폭주한다.

이에 대한노인회와 지방자치단체에선 지역별로 컴퓨터는 물론 스마트폰 등 IT 기기가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을 위해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사용법은 물론 노인층을 노린 보이스피싱 대응법도 소개한다. 그러나 교육만으로 영화 속 다니엘이 하루 아침에 차이나가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사각지대를 줄여보기 위해 서울시에서는 올해 8월부터 '시니어 지역 상담가' 사업을 시작했다. 장년층 대상 보람일자리 사업 중 하나로 50~67세 서울시민 52명이 시범사업에 참여했다.

이들은 동주민센터나 노인복지관은 물론, 시장이나 공원 등 노인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가 각종 복지 제도와 혜택 등을 직접 설명한다. 여기에 미처 듣지 못한 지역 내 행사나 정보 등도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다.

서울시 관계자는 "어르신들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사용률이 예전보다 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복지나 지역 정보를 모르시는 분들이 많다"며 "지역 밀착형 사업을 통해 미처 채우지 못한 사각지대를 해소하고자 한다"고 사업 배경을 설명했다.

심장이 아파 일을 할 수 없어 구직수당이라도 받으려는 다니엘에게 정부는 "성실함을 증명하라"며 이력서 특강 수업이나 듣게 한다. 특강 강사는 한술 더 떠 스마트폰으로 자기소개 동영상을 만들어 보라고 말한다. 마치 목수 다니엘이 변기 누수를 고치고 전기배선을 손본 것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이쯤 되니 헷갈리기 시작한다. 진짜 난독증은 누구인가. "배변 장애가 생길 정도로 통제력을 상실한 적 있느냐"는 따위 질문으로 다니엘을 질병수당에서 탈락시키고 절차를 이유로 다니엘을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내쫓는 공무원들은, 아니 그 절차를 만든 정부야말로 다니엘의 삶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오독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다니엘이 나(I)를 실직자 중 하나가 아닌 다니엘 블레이크(Daniel Blake)로 봐달라고 소리치던 때로부터 불과 3년도 채 지나지 않은 요즘 한국에선 상담 업무를 인공지능(AI)이 대신한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방대한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얼마나 정확하게 AI가 나에 대해 알아맞힐지 궁금하면서도 내심 인간이 인간의 사정을 읽어내는 일을 포기하면 결국 더 많은 다니엘이 생겨나지 않을까 우려가 앞서는 게 사실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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