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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3년] ⑤박헌영·여운형 ‘조선인민공화국’ 시도 물거품으로

등록 2020.02.02 06:00:00수정 2020.02.24 10: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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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남 주도권 장악한 좌익정치 세력

이승만·김구·김원봉 등 망라한 건준 전국대표 선출

아놀드 군정장관 '하나의 국가에 두 개의 정부' 반대

'조선인민공화국' 미군정 승인 못받아 결국 좌절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5. 해방직후 이남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좌익정치세력

해방된 8월 15일부터 미군이 진주하는 9월 초까지 국내 정국(政局)의 주도권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한 여운형(呂運亨)에게 있었다. 8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건준 지부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우익진영은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은 귀국이 늦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 진주를 앞두고 갑작스럽게 선포된 ‘조선인민공화국’이 뜨거운 감자로 등장했다.

1945년 9월 6일 오후 7시 재동 경기여고 강당에서 건준 주최로 전국대표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다. 여운형 임시의장 주재로 열린 대회에서는 새로운 정부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조직하고,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김원봉(金元鳳), 조만식(曺晩植) 등 해외와 이북에 있는 정치지도자까지 망라한 55명의 전국인민위원을 선출해 발표했다.

여운형은 참석자들에게 갑작스럽게 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곧 “진주하게 될 연합군과 절충할 인민 총의의 집결체”가 필요해, 그 집결체의 ‘준비 공작’으로 급히 전국대표자회의를 개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선출된 인민위원회는 향후 “인민 총의에 의한 대표위원이 나올 때까지의 잠정적 위원”이라고 설명했다.

명분은 미군과 협의할 ‘정부 형태의 집결체’였지만 사실상 미군이 진주한 이후에 ‘조선인민공화국’을 그대로 인정받기 위한 목적이 컸다. 더구나 ‘준비 공작’, ‘잠정적 대표위원’이란 여운형의 신중한 입장과 달리 이미 좌파진영 내부의 주도권은 박헌영(朴憲永)이 주도하는 조선공산당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서울=뉴시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주최로 1945년 9월 11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전국인민위원들이 중앙청을 향해 행진하는 모습.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주최로 1945년 9월 11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전국인민위원들이 중앙청을 향해 행진하는 모습.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2.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5년 9월 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명의로 서울 시내에 뿌려진 전단. 전날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결정된 ‘조선인민공화국’ 탄생과 인민위원 명단이 들어 있다.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2020.02.0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9월 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명의로 서울 시내에 뿌려진 전단. 전날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결정된 ‘조선인민공화국’ 탄생과 인민위원 명단이 들어 있다.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2020.02.02. [email protected]


전국인민대표자대회 다음 날 서울 시내에는 건준 명의로 ‘조선인민대중에게 격함-조선인민공화국 탄생에 제하야’란 제목의 전단이 뿌려졌다. 우익진영은 즉각 ‘한민당 발기인’ 명의로 중경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인민공화국 정부를 참칭”하는 행위를 배격하는 내용의 결의문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우파인사들은 9월 7일 해외의 중경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해 ‘인공’에 맞섰다.

그러자 좌익진영은 9월 11일 정오 동대문 경성운동장에서 건준 주최로 대규모 인공 수립을 지지하는 ‘인민대회’를 개최했다. 형식은 건준 주최였지만 사실상 조선공산당이 주도하는 해방 후 첫 대규모 집회였다.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는 9월 19일 발간된 창간호에 ‘지축을 진동하는 보무(步武)-공산당재건의 대시위행렬’이라는 제목으로 이날 시위사진을 게재하고,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이에 앞서 광주에서 숨어 지내던 박헌영은 8월 17일 밤 서울로 올라와 조선공산당 재건을 선언하고, 9월 8일 서울 계동에서 ‘열성자대회’를 개최해 공산당 내 다른 파벌을 제치고 주도권 잡았다.

[서울=뉴시스] 조선공산당 재건 사실을 뒤늦게 대대적으로 보도한 ‘해방일보’ 창간호(1945년 9월 19일). ‘해방일보’는 조선공산당의 기관지로 창간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2.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조선공산당 재건 사실을 뒤늦게 대대적으로 보도한 ‘해방일보’ 창간호(1945년 9월 19일). ‘해방일보’는 조선공산당의 기관지로 창간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email protected]


조선공산당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9월 14일 중앙인민위원회 명의로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등 ‘조선인민공화국’의 조각 명단을 일방적으로 결정 발표했다. 각 부서 책임자의 결정과 발표는 신중히 할 것을 요망한 여운형의 의견은 묵살됐다. 미국을 의식해 이승만을 주석으로 선정하고, 각 부서장에 좌우인사를 안배했지만 실제 동의하지 않은 부서장을 대신한 대리에는 모두 좌파인사로 채워졌다.

이로써 국내 정치세력은 ‘인공’을 지지하는 좌익과 중경 임시정부 지지를 표방한 우익진영으로 양분된다. 좌우합작을 모색한 건준의 시도는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실패로 끝나버렸다.

[서울=뉴시스] ‘조선인민공화국’ 조각 명단이 실린 '매일신보' 1945년 9월 15일자.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조선인민공화국’ 조각 명단이 실린 '매일신보' 1945년 9월 15일자.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2.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6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박헌영(가운데). 그는 1945년 8월 18일 일제강점기 때 해산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좌익진영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성급하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공산당 창립 21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박헌영(가운데). 그는 1945년 8월 18일 일제강점기 때 해산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좌익진영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성급하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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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명의로 나온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 표지. 이 소책자는 1945년 8월 20일경 박헌영이 공산당 재건위원회에 제출했다가 일부 수정해 공산당의 정식 노선으로 9월 20일 출간됐다. ‘8월테제’로 불린 이 문건은 해방 후 공산주의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준거가 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명의로 나온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 표지. 이 소책자는 1945년 8월 20일경 박헌영이 공산당 재건위원회에 제출했다가 일부 수정해 공산당의 정식 노선으로 9월 20일 출간됐다. ‘8월테제’로 불린 이 문건은 해방 후 공산주의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준거가 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2. [email protected]


‘인공’은 연합국과의 협조를 강조했다. 그러나 서울에 수립된 미군정은 ‘인공’ 선포에 초기부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9월 13일 미군정 정보부장은 “현재 조선 내에는 미군정부 이외에는 여하한 정부도 있을 수 없다”며 “조선인민공화국 운운은 인정할 수가 없다”는 뜻을 비공식적으로 밝혔다. 한국민주당은 즉각 이 발언을 소개하는 전단을 서울 시내에 뿌렸다. 10월 10일 마침내 아치발드 아놀드(Archibald V. Arnold) 미군정장관이 ‘인공’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에는 오직 한 정부가 있을 뿐이다. 이 정부는 맥아더 원수의 포고와 하지 중장의 정령과 아놀드 소장의 행정령에 의하여 정당히 수립된 것이다.… 자천자임한 관리라든가 경찰이든가 국민 전체를 대표하였노라는 대소의 화합이라든가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이든가 자칭 조선공화국 내각은 권위와 세력과 실재가 전연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고관대직을 참칭하는 자들이 흥행적 가치조차 의심할 만한 괴뢰극을 하는 배우라면 그 동안 즉시 그 극을 폐막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아놀드 군정장관의 성명서는 노골적이고 거칠었다. 좌파는 “일국의 대변자의 담화로서 믿기 어려운 저열한 글”이라고 비판했고, 우파 일각에서도 용어 선택에 문제가 있다는 담화를 낼 정도였다. 10월 18일 아놀드 군정장관은 여운형을 불러 “1국내에 2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으니 38도 이남 조선에 있어서는 군정청이 유일한 정부인즉 조선인민공화국정부는 해소함이 마땅하니 즉시 해소하고 정당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권고 공문’을 전달했다.

이에 대해 인공 측은 여운형을 보내 아놀드 군정장관과 세 차례, 하지 사령관과 한 차례 회담을 했지만 미군정 측의 ‘인공 부인’ 입장은 확고했다.

그러자 인공 측은 1945년 11월 20일부터 3일간 서울 천도교대강당에서 500여 명의 대표자가 참석한 가운데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했다. 대회 의장인 허헌(許憲)은 개회사에서 “군정에 대하여 전적으로 협력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군정당국은 반드시 현하 우리 조선민중 대다수의 요망을 알고 가까운 장래의 우리 민중총의가 환영할 정권수립에 협력”할 것이고, 여론을 존중해 “민중의 의사를 쫓아서 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인공이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인공 중심의 정권 수립에 협력해 달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 대회에 귀빈으로 참석한 아놀드 군정장관은 ‘군정과의 협력’만을 강조했을 뿐이다.

[서울=뉴시스] 허헌(許憲) 전국인민대표대회 의장이 1945년 11월 20일 서울 천도교대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사회를 보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2.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허헌(許憲) 전국인민대표대회 의장이 1945년 11월 20일 서울 천도교대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사회를 보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5년 11월 20일 서울 천도교대강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 참석 500여 명의 대표자들 모습.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11월 20일 서울 천도교대강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 참석 500여 명의 대표자들 모습.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2. [email protected]


결국 이 대회에서는 끝까지 ‘인공’ 사수를 결의하면서도 미군정에 대해 정당한 협력을 한다는 모호한 결정을 내리고 종료됐다.

12월 12일 하지 사령관은 공식 성명서를 내고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 대해 “매우 놀랐고 실망하였다”라며 인공을 ‘정부’로 인정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하지 사령관의 최종 입장이 나오면서 좌파진영은  ‘인공’이라는 정부의 깃발을 내리고 정당으로 활동하느냐, 인공 사수를 고수하며 미군정과 대립하느냐는 갈림길에 서게 됐고, 결국 ‘인공’을 사실상 해소했다. 초기 해방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좌파진영의 ‘인공’ 수립 시도는 허망하게 종막을 고했다.

[서울=뉴시스] 1945년 9월 6일 선포된 ‘조선인민공화국’을 최종적으로 부인하는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의 성명서. 성명서가 나온 후 좌파진영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은 사실상 해체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9월 6일 선포된 ‘조선인민공화국’을 최종적으로 부인하는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의 성명서. 성명서가 나온 후 좌파진영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은 사실상 해체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2. [email protected]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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