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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3년] ⑥이승만·김일성 남과 북 해방정국 주역으로

등록 2020.02.09 06:00:00수정 2020.02.24 10: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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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평양 ‘민중대회’에 깜짝 등장

이승만, 하지 사령관 환대받으며 귀국

소련군과 미군 지원으로 정국 주도권 선점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6. 이승만과 김일성의 귀국

해방이 된 지 두 달가량 지난 1945년 10월 중순, 평양과 서울에서는 향후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정치행사가 각각 열렸다. 형식적으로는 조선의 해방을 축하하고 연합국을 환영하는 자리였지만 내용상으로는 해외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김일성(金日成)과 이승만(李承晩)의 ‘국내 정치무대 등장’을 알리는 행사였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김일성이었다. 해방 후에 한 달여가 지난 9월 19일 소련 화물선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항에 도착했다. 1925년 만주로 떠난 지 20년만의 귀환이었다. 소련군 원산시 경무사령관 V. 쿠츠모프 대좌와 일부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환영을 나왔다.

21일 그는 스탈린이 선물한 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초기 김일성은 평양 주둔 소련군 경무사령부 부사령관(고문에 해당) 직함과 ‘김영환’이란 가명으로 비공개 활동을 이어갔다.

김일성은 귀국 2달 전쯤 소련군 극동사령관 바실리예프스키 원수를 비롯해 극동군의 주요 사령관들과 동행해 모스크바를 방문할 정도로 소련 극동군의 주요 장성들과 친분이 돈독했다.

그는 우선 김용범, 박정애 등 평양지역의 공산주의들을 접촉한 후 9월 30일경 저녁을 함께하며 조만식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이날 그는 조만식 선생에게 숭실학교 출신의 선친 이야기를 꺼내며 곧 있을 ‘민중대회’의 준비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조만식은 몇 차례 더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이 제안을 승낙했다. 두 사람은 신탁통치 문제로 결국 갈라서고 말았지만, 그전까지는 협조 관계를 유지했다. 63세의 민족주의자 조만식과 33세의 빨치산 대장 김일성의 첫 만남 장면은 배석했던 소련군 장교가 촬영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다. 현재 남아 있는 귀국 후 김일성의 첫 사진이다.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20일 서울 중앙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주최 연합국환영대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왼쪽)과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20일 서울 중앙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주최 연합국환영대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왼쪽)과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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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1930년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다 1940년 10월 소련으로 넘어간 동북항일연군 대원들. 앞줄 왼쪽부터 김철호, 황순희, 김정숙, 이영숙 등의 여성 대원이 보이고, 김일성(파란원)은 맨 뒤 중앙에 앉아 있다. 황순희는 조선혁명박물관장으로 활동하다 최근 사망했다. 중국에서는 이 사진을 1941년 소련(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보로실로프에 있던 동북항일연군의 남야영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한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30년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다 1940년 10월 소련으로 넘어간 동북항일연군 대원들. 앞줄 왼쪽부터 김철호, 황순희, 김정숙, 이영숙 등의 여성 대원이 보이고, 김일성(파란원)은 맨 뒤 중앙에 앉아 있다. 황순희는 조선혁명박물관장으로 활동하다 최근 사망했다. 중국에서는 이 사진을 1941년 소련(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보로실로프에 있던 동북항일연군의 남야영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한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김일성과 조만식의 첫 만남. 소련군 제25군 정치담당관 메끄레르 중좌(가운데)의 주선으로 1945년 9월 30일경 조만식(왼쪽)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과 김일성(오른쪽 양복) 당시 평양주둔 소련군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이 사진은 배석했던 소련군 장교가 찍은 것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김일성과 조만식의 첫 만남. 소련군 제25군 정치담당관 메끄레르 중좌(가운데)의 주선으로 1945년 9월 30일경 조만식(왼쪽)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과 김일성(오른쪽 양복) 당시 평양주둔 소련군 경무사령부 부사령관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 이 사진은 배석했던 소련군 장교가 찍은 것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email protected]


그리고 2주일 후인 10월 14일 해방을 축하하고 ‘김일성 장군’을 환영하는 대규모 민중대회가 모란봉 아래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대회는 원래 10시에 시작하기로 예정돼 있었으나 수많은 인파로 실제 11시가 넘어서 시작됐다. 전날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책임자로 선출된 김용범이 사회를 맡았고, 주석단에는 치스차코프 소련 제25군 사령관, 레베데프 정치담당 사령관, 로마넨코 민정 담당 사령관 등 소련군 장성들과 환영대회 준비위원장인 조만식, 그리고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급 인사들이 자리 잡았다.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14일 모란봉 아래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 주석단에 서 있는 김일성. 왼쪽은 통역으로 활동한 강(姜)미하일 소좌이고, 맨 오른쪽이 레베데프 정치사령관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14일 모란봉 아래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 주석단에 서 있는 김일성. 왼쪽은 통역으로 활동한 강(姜)미하일 소좌이고, 맨 오른쪽이 레베데프 정치사령관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email protected]


조만식의 환영사가 끝난 후 등단한 김일성은 ‘모든 힘을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란 주제로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 사업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하여야 하며,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사랑하는 전 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민주주의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해 나가자”라고 강조했다.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서 원고를 보며 연설하는 김일성.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서 원고를 보며 연설하는 김일성.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email protected]


이날 행사를 취재하던 리대영 사진가는 근접 촬영으로는 운집한 군중(10만 안팎으로 추정)을 담을 수 없다고 판단해 운동장 외곽에 있는 나무에 올라가 행사장 전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 ‘공로’로 그는 북한에서 최고지도자를 전담하는 첫 ‘1호 사진가’의 영예를 얻었다. 후에 그는 ‘인민기자’란 칭호를 받고 로동신문 사진부장으로 활동하다 1992년 사망해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그의 아들과 김일성종합대학을 함께 다닌 북한의 고위 인사가 들려준 이야기다.

1946년 북한에서는 ‘8·15해방 1주년 기념 북조선 민주주의 건설 사진첩'과 '북조선의 가을’이란 두 권의 사진첩이 발간됐다. 전자에는 주로 해방 후 1년간의 정치행사 사진들이, 후자에는 사회, 경제 건설상 사진들이 수록돼 있다. 리대영 사진가가 촬영한 사진이거나 그의 손길이 닿아 있는 결과물이라고 추정된다.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 전경. 김일성이 단상에서 연설하고 있고, 주위에 소련군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경호대가 서 있다. 이 사진은 8·15해방 1주년을 맞아 발간된 ‘북조선 민주주의 건설 사진첩’에 실려 있으며, 리대영 사진가가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 전경. 김일성이 단상에서 연설하고 있고, 주위에 소련군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경호대가 서 있다. 이 사진은 8·15해방 1주년을 맞아 발간된 ‘북조선 민주주의 건설 사진첩’에 실려 있으며, 리대영 사진가가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6년 발간된 ‘북조선의 가을’ 사진첩 표지. 사진 설명이 러시아로 작성돼 있어 해방 1년간 소련의 지원과 북한의 발전상을 담아 모스크바의 고위 간부들과 평양 주둔 주요 장성들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발간된 ‘북조선의 가을’ 사진첩 표지. 사진 설명이 러시아로 작성돼 있어 해방 1년간 소련의 지원과 북한의 발전상을 담아 모스크바의 고위 간부들과 평양 주둔 주요 장성들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email protected]


10월 14일 열린 ‘평양 민중대회’는 김일성이 대중 정치지도자로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자리였다. 이날 환영대회에서는 약간의 소란도 있었다.

전설적 영웅’으로 알려진 ‘김일성 장군’이 나이가 많은 노인일 것으로 생각한 일부 사람들이 사이에서 김일성이 너무 젊어 가짜가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이런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들과 함께 강동군 만경대 고향 집을 방문한다. 귀국 후 첫 고향 방문이었다.

이후 그의 정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고, 그해 12월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북조선공산당의 책임자(책임 비서)에 선출됐다.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를 마치고 고향 집을 방문한 김일성이 일가친척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김일성 앞으로 망건을 쓴 조부 김보현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를 마치고 고향 집을 방문한 김일성이 일가친척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김일성 앞으로 망건을 쓴 조부 김보현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를 마치고 고향 집을 방문한 김일성이 동행한 메크레르 소련 25군 정치담당관(오른쪽), 통역관 강(姜)미하일 소좌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를 마치고 고향 집을 방문한 김일성이 동행한 메크레르 소련 25군 정치담당관(오른쪽), 통역관 강(姜)미하일 소좌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를 마치고 고향 집을 방문한 김일성이 일가친척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3번째, 4번째가 작은아버지인 김형록 부부이고, 그 옆으로 할머니 이보익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환영대회를 마치고 고향 집을 방문한  김일성이 일가친척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에서 3번째, 4번째가 작은아버지인 김형록 부부이고, 그 옆으로 할머니 이보익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email protected]


김일성 공개 등장 이틀 후인 10월 16일 오후 5시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이승만이 태평양지구 미 육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전용기 ‘바탄(Bataan)’호를 타고 김포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1912년 4월 미국으로 떠난 지 33년 만이었다. 맥아더 사령관이 바탄호를 보내 외국인을 태운 것은 단 두 차례였는데, 탑승자는 모두 이승만이었다.

귀국 직전 그는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 사령관, 존 하지 주한 미군 사령관과 만나 한반도 정세를 논의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하지 사령관에게 이승만을 조선의 ‘영웅’으로 환영하라고 권고했다.

다음날부터 그의 환국을 알리는 전단과 신문 호외(號外)가 서울 시내에 뿌려졌다.

[서울=뉴시스] 이승만 박사의 환국 알리는 1945년 10월 17일 자 '신조선보' 호외.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이승만 박사의 환국 알리는 1945년 10월 17일 자 '신조선보' 호외.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email protected]


귀국 다음 날인 194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이승만은 주한 미군 사령관의 안내로 군정 제1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하지는 이승만을 앞세운 채 수행하듯 뒤따라 들어갔고, 이승만을 기자회견장 중앙테이블에 앉히고, 자신은 왼쪽 자리에 앉았다.

하지 중장의 대접은 극진했다. 그는 자신이 숙소로 쓰고 있던 조선호텔의 침실, 개별 식당, 회의실 등을 갖춘 스위트룸을 제공했고, 자신의 부관 스미스 중위를 임시 전속 부관으로 임명했다. 이승만이 외출할 때는 순종이 쓰던 리무진을 내주기까지 했다.

저녁 8시 30분에는 서울 중앙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는데, 당시 그의 연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다.

뉴욕타임스 특파원 리처드 존스턴은 이승만이 하지의 귀빈으로 도착했으며, 오자마자 격렬한 반소·반공 태도를 취했다고 보도했다(1945년 10월 17일 일자).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20일 중앙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주최 연합국환영대회에서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 아놀드 군정장관에게 증정할 꽃다발 들고 나온 수송국민학교 5학년 양정희(楊貞熙)와 정인경(鄭仁卿) 학생이 하지 중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돈 오브라이언 flickr) 2020.02.09.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20일 중앙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주최 연합국환영대회에서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 아놀드 군정장관에게 증정할 꽃다발 들고 나온 수송국민학교 5학년 양정희(楊貞熙)와 정인경(鄭仁卿) 학생이 하지 중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돈 오브라이언 flickr) 2020.02.09.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20일 중앙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주최 연합국환영대회에서 참석한 주요 인사들. 연단 앞줄(책상) 왼쪽부터 아놀드 군정장관, 하지 사령관, 이승만 박사, 33인 대표였던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이 앉아 있다. (사진=돈 오브라이언 flickr) 2020.02.09.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20일 중앙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주최 연합국환영대회에서 참석한 주요 인사들. 연단 앞줄(책상) 왼쪽부터 아놀드 군정장관, 하지 사령관, 이승만 박사, 33인 대표였던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이 앉아 있다. (사진=돈 오브라이언 flickr) 2020.02.09.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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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20일 서울 중앙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주최 연합국환영대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사진=돈 오브라이언 flickr) 2020.02.09.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10월 20일 서울 중앙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주최 연합국환영대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사진=돈 오브라이언 flickr) 2020.02.09.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email protected]


귀국 나흘 후인 10월 20일, 중앙청 앞에서는 ‘서울시민 주최 연합군 환영대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대회 주석단에는 하지 사령관 아놀드 군정장관을 비롯해 3·1운동 당시 33인 대표였던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이 자리 잡았다. 오세창의 사회로 조병옥의 환영사(趙炳玉)가 끝난후 하지 사령관이 등단해 인사말을 했다.

“나는 여러분의 환영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나는 조선의 자주독립이 하루 속히 이루어지도록 염원한다. 또 우리도 전심전력을 기울여 노력하겠다. 이 위대한 사업을 달성하려면 조선의 남녀노소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인사말 말미에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일생을 바쳐 해외에서 싸운 분이 계시다. 그분이 지금 우리 앞에 계시다”라며 이승만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 성대한 환영회도 위대한 조선의 지도자를 맞이하기에는 부족하다. 그 분은 압제자에게 쫓기어 조국을 떠났었지만, 그 분의 세력은 크다. 개인의 야심이라고는 전혀 없다. 살아서 여기 와 계시다. 여러분은 그 분이 이 자리에서 동포에게 ‘헬로’하고 외쳐 주기를 희망한다.”

이어 요란한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이승만이 등단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란 취지의 연설을 반복했다.
 
사흘 뒤인 22일 오후 2시, 이승만은 조선호텔에서 좌·우파 각 정당 인사 200여 명과 회동을 하고 각 당, 각 파 통일을 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 결성을 결의했다. 회장으로 이승만이 추대됐다. 조선공산당 등 좌파 대표들은 이승만에게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는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서울=뉴시스] 1945년 11월 2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대강당에서 열린 ‘독립촉성중앙협의회’ 2차 회의에서 이승만 회장이 연설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11월 2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대강당에서 열린 ‘독립촉성중앙협의회’ 2차 회의에서 이승만 회장이 연설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2.09. [email protected]


10월 31일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박헌영 대표와 만나 3시간 동안 ‘중대 회담’을 가졌다. 이승만은 조선공산당의 ‘독촉중협’ 참가를 요청했고, 이에 맞서 박헌영은 “통일을 하자면 결단코 덮어 놓고는 하지 못한다”라며 친일파 제외를 원칙으로 내세웠다. 민족통일전선 결성이라는 총론에는 합의했지만, 각론에서는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11월 2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대강당에서 제2차 독촉중협회의가 72개 정당·사회단체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이 모임에는 박헌영, 여운형 등 좌파 측 인사도 참석했다. 그러나 중앙집행위원회 인선을 두고 난항을 겪다 이승만에게 일임하는 것으로 결의하고 회의는 종료됐다.

그러자 다음날 조선공산당은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모인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진실한 의미의 통일전선과는 퍽 멀리 떨어져 있다”는 내용의 비판 성명을 냈다.

이에 맞서 이승만은 11월 7일 방송 연설을 통해 “고국에 돌아와 보니 인민공화국이 조직되어 있고 나를 주석으로 선정하였다 하니 나를 이만치 생각해준 것은 감사하나 나는 그것을 정식으로나 비공식으로나 수락치 않았다”라며 공식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취임을 거부했다.

두 달 전 미군 진주를 앞두고 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자신을 주석에 선출한 좌익정치 세력에게 확실히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좌파의 반발이 있었지만 ‘독촉중협’ 결성을 통해 이승만은 최고지도자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11월 선구회(先驅會)라는 중도파 단체가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이승만은 차기 대통령 후보를 묻는 문항에서 44%로 압도적 득표를 했다.

김일성과 이승만은 각각 소련 극동군과 태평양지구 미군의 확고한 지원을 받으며 귀국했고, 남과 북의 초기 정국 주도권을 선점한 후 3년 후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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