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광복 75주년] ⑨남과 북 별도 ‘과도정부’ 추진… 분열 가시화

등록 2020.03.01 06:00:00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南은 좌우분열, 北은 일사불란

임시정부의 ‘과도정권’ 수립 구상 불발

미군정의 자문기구로 귀착 아쉬움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9. 미소공동위원회 앞두고 좌익·우익 갈려

1946년 1월 해방 후 첫 새해를 맞았지만, 국내 정국은 신탁통치 문제로 극심한 혼돈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반탁 시위와 모스크바삼상회의 지지 시위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과 이를 원조하기 위한 미소 양국 간의 공동위원회 설치를 규정한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결정에 따라 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개최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할 국내 정치 세력의 통일된 정부수립안을 마련하는 게 시급한 과제였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개회를 앞두고, 각 정당 간의 행동 통일이라는 명분을 좌우 어느 쪽도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먼저 반탁운동의 가장 전면에 나선 임시정부 측이 1월 4일 김구(金九) 주석의 성명으로 ‘당면비상대책’을 내놓았다.

그는 임시정부가 1945년 9월 충칭(重慶)에서 발표한 임시정부 당면정책 제6항에 따라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국내외 각계각층 대표를 소집해 비상정치회의를 열어 과도정권(過度政權)을 수립한 뒤에 다시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정식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탁통치를 사실상 배제하자는 안이었다.

임시정부는 비상정치회의 소집을 위하여 김원봉(金元鳳)·김성숙(金星淑)·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장건상(張建相) 등 임시정부 국무위원 5명을 대외교섭위원으로 선정하고, 좌우익 각 정당 및 각계 인사들과의 교섭을 전개하였다.

한국민주당·국민당·인민당·공산당 등 좌우 각 당 대표들 간 개별적 접촉도 빈번하게 이뤄졌다. 이를 통해 1월 7일에는 민족통일 성취에 대한 기본방침을 토의한 결과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어,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조선 문제 결정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신탁제도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에게 자주독립의 정신을 근거로(基) 하여 해결하게 함”이라는 4당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공산당이 삼상회의 결정의 전면적 지지를 고집하고, 임시정부 측의 비상정치회의 수립 제안을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됐다.

이에 임시정부 측에서는 좌파 정당을 배제하고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와 합류해 명칭을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로 바꾸고, 이승만과 김구를 영수로 추대했다.

2월 1일 마침내 임시정부 측의 주도하에 서울 명동 성당에서 201명의 대표 중 167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비상국민회의’가 발족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비상국민회의가 장래 발족할 과도정권 수립의 권한을 갖게 될 것이라고 천명하고, 이를 위한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정했다. 회의에 참석한 러취 군정장관은 비상국민회의를 “조선민족통일의 진정한 모임”이라고 평가했다.

[서울=뉴시스] 1946년 2월 14일 오전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개최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성립식에서 이승만(李承晩) 의장이 연설하고 있다. 왼쪽에 김규식(金奎植) 부의장, 오른쪽에 김구(金九) 부의장이 앉아 있다. 대표의원 28명 중 23명이 출석했고, 여운형(呂運亨), 김창숙(金昌淑), 조소앙(趙素昻) 등 5명은 결석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3.01. photo@newsis.com(*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2월 14일 오전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개최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성립식에서 이승만(李承晩) 의장이 연설하고 있다. 왼쪽에 김규식(金奎植) 부의장, 오른쪽에 김구(金九) 부의장이 앉아 있다. 대표의원 28명 중 23명이 출석했고, 여운형(呂運亨), 김창숙(金昌淑), 조소앙(趙素昻) 등 5명은 결석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3.01. [email protected](*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그러나 비상국민회의는 출범과 함께 ‘사망 선고’를 당했다. 1차로 조선공산당 산하단체가 모두 참가를 거부했고, 2차로 임시정부 측 혁신계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성주식(成周寔),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등 3명이 비상국민회의를 탈퇴했으며, 뒤이어 임시정부의 장건상도 임시정부와 결별을 고했다.

임시정부 측과 교섭이 결렬되자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정당과 지지단체들은 독자적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을 추진했다. 명실상부한 좌우통합체를 지향했지만 비상국민회의는 우익진영만의 집결체가 된 것이다.

[서울=뉴시스] 1946년 1월 23일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가 낸 호외. 임시정부 내의 ‘혁신파’인 김규식(金奎植), 김원봉(金元鳳) 등이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비상정치회의‘에서 탈퇴하자 공산당 측은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비상정치국민회의에서는 탈퇴했지만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는 참여해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1월 23일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가 낸 호외. 임시정부 내의 ‘혁신파’인 김규식(金奎植), 김원봉(金元鳳) 등이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비상정치회의‘에서 탈퇴하자 공산당 측은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비상정치국민회의에서는 탈퇴했지만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는 참여해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01.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6년 2월 14일 2월 14일 오전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개최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성립식에서 회의석 앞쪽에 김구(金九) 부의장, 이승만(李承晩) 의장, 김규식(金奎植) 부의장이 나란히 앉아 있고, 방청석에 러취 (Archer L. Lerch)군정장관과 주한 미군 사령관 존 R. 하지 중장이 앉아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3.01.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2월 14일 2월 14일 오전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개최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성립식에서 회의석 앞쪽에 김구(金九) 부의장, 이승만(李承晩) 의장, 김규식(金奎植) 부의장이 나란히 앉아 있고, 방청석에 러취 (Archer L. Lerch)군정장관과 주한 미군 사령관 존 R. 하지 중장이 앉아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3.01.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그러자 미군정은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를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으로 이름을 바꾸고, 성격도 주한 미군 사령관인 존 R.하지 중장의 자문기관으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2월 14일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김규식으로 하는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결성됐다. (당시 언론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라고 호칭)

14일 오전 9시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대표의원 28명 중 23명이 출석한 가운데 민주의원 성립식이 개최됐지만,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중도좌파 여운형(呂運亨) 인민당 위원장마저 결석함으로써 민주의원은 임시정부와 미군정 모두 불만족스러운 조직이 되어 버렸다.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헌법 초안(‘Constitution of Korea’)까지 만들고 이것을 38선 이남 지역 모든 정치 세력의 통합안으로 소련 측에 제안하려고 구상했지만, 좌우통합체 결성에 실패함으로써 이 구상은 무산됐다.

미군정청 총무처장 겸 법무부장 우드월(E.J. Woodall) 소령이 작성한 헌법안은 미국의 정치체제를 본떠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하고,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회를 통한 간접선거로 선출할 것을 제안했다.

[서울=뉴시스] 1946년 2월 14일 2월 14일 오전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개최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성립식에서 김규식(金奎植) 부의장이 ‘하지 중장에게 보내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왼쪽은 3·1운동 33인 대표였던 권동진(權東鎭)이고, 오른쪽에 이승만(李承晩) 의장과 김구(金九) 부의장이 앉아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3.01.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2월 14일 2월 14일 오전 미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개최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성립식에서 김규식(金奎植) 부의장이 ‘하지 중장에게 보내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왼쪽은 3·1운동 33인 대표였던 권동진(權東鎭)이고, 오른쪽에 이승만(李承晩) 의장과 김구(金九) 부의장이 앉아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3.01.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5일 통과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27개 ‘민주정책대강’이 담긴 전단.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5일 통과된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의 27개 ‘민주정책대강’이 담긴 전단.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01. [email protected]


한편, 좌파진영은 조선공산당(위원장 박헌영), 조선인민당(위원장 여운형), 남조선신민당(위원장 백남운) 등 3개 정당을 중심으로 김원봉 임시정부 탈퇴 인사를 포함해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다. 그리고 독자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할 목적으로 ‘조선민주공화국임시약법 시안(試案)’까지 만들었다.

[서울=뉴시스] 1946년 2월 15~16일 이틀 동안 서울 종로 중앙기독청년회 강당에서 열린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 모습.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2월 15~16일 이틀 동안 서울 종로 중앙기독청년회 강당에서 열린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 모습.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01. [email protected]


신탁통치 문제로 둘로 갈라진 정치 세력이 ‘민주의원’과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각각 결집함으로써 좌우 정치 세력의 갈등과 대결은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반면 38선 이남과 비교해 이북은 비교적 순탄하게 과도정권 수립을 위한 기구가 출범했다.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반공학생의거’가 일어났지만 ‘중앙정치’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고, 반탁 입장을 철회하지 않은 조선민주당 조만식(曺晩植)위원장은 소련 군정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돼 있었다. 38선 이북지역의 우익정치 세력을 대표하는 조선민주당의 주요 간부들은 월남을 선택했다.

[서울=뉴시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창립 경축대회’에 참석한 주요 간부들. 단상 가운데 김일성 위원장과 김두봉 부위원장의 모습이 보인다. 북한은 1946년 2월 8일 ‘북조선 각 정당·사회단체·각 행정국 및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표 확대협의회’를 개최하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창립 경축대회’에 참석한 주요 간부들. 단상 가운데 김일성 위원장과 김두봉 부위원장의 모습이 보인다. 북한은 1946년 2월 8일 ‘북조선 각 정당·사회단체·각 행정국 및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표 확대협의회’를 개최하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01.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창립 경축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지지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창립 경축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지지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01. [email protected]


1946년 2월 8일 북한은 ‘북조선 각 정당·사회단체·각 행정국 및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표 확대협의회’를 개최하고, “조선통일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라는 단서 아래 위원장 김일성(金日成), 부위원장 김두봉(金枓奉)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큰 반발 없이 조직했다.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좌우 분열에 이어 남북분열의 조짐까지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뉴시스] 1945년 2월 조선공산당평안남도위원회 명의의 평양에 뿌려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옹호 지지하자’는 제목의 전단지 사본. 1946년 2월 8일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표한 11개 조항의 강령이 담겨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0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5년 2월 조선공산당평안남도위원회 명의의 평양에 뿌려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옹호 지지하자’는 제목의 전단지 사본. 1946년 2월 8일 수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표한 11개 조항의 강령이 담겨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01. [email protected]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