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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생각]포스트 발전국가의 대안적 국가발전모델은?

등록 2020.03.11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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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이선화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서울=뉴시스】이선화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서울=뉴시스]  생존자 편향(survivorship bias). 성공한 기업이나 개인을 사례로 삼아 성공의 원인을 분석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인과관계 설정상의 오류를 지칭한다. 특정 결과를 만들어 낸 상황과 조건, 결과에 영향을 준 우연들에 대한 고려 없이 최종적 성과나 결과에 기반해 원인을 유추한다는 점에서 결과 오류(outcome bias)와도 맥이 닿아 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기성세대가 자신이 살아오며 겪은 한정된 경험을 일반화하여 젊은 세대들을 교도(敎導)하려 할 때 흔히 범하는 오류라 하겠다.

성공한 개인이 저지르기 쉬운 인지 편향은 성공한 국가에도 적용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7번째로 '30-50 클럽'(인구 5000만명 이상이며 1인당 소득 3만 달러 이상인 국가)에 합류하였으며 세계 최빈국가 중 공적개발원조(ODA) 수혜국에서 원조 제공국가로 전환된 유일한 성공사례로 꼽힌다.

고도성장기 성공의 배경을 두고 학계에서는 발전국가적 관점, 시장중심적 관점 등 다양한 각도에서의 설명을 제공한다. 학술적 분석을 굳이 덧붙이지 않더라도 고도성장기를 살아낸 세대들에게 그 경험은 '권위주의 정부가 일은 잘 한다'는 믿음이자 신화로 살아남아 있다.

한국에서 기술적 관료제를 정부 구성원리로 삼는 행정국가(administrative state)에 대한 과신, 다원주의적 정치과정으로 규정되는 정치국가(political state)에 대한 불신은 민주화 이후 포스트 발전국가에 대한 모색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한 세대를 관통한 농도 짙은 경험이 만들어 낸 '성공공식'에 대한 믿음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정작 정책을 둘러싼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대안적 모델이 필요할 때조차도!

성공모델에 대한 신화적 믿음 외에도 정치·경제·사회의 조직 원리가 관성을 가지며 쉽게 바뀌지 않는 현상은 제도의 경로의존성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역사적 신제도주의에 따르면 특정 제도나 발전경로가 일단 선택되어 안정적으로 정착되면 그 사회 내에서 지속되는 경향이 생겨나기 때문에 (새로운 정책환경 하에서 더 우월할 수 있는) 대안적 선택과 발전경로를 제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도의 경로의존성을 발생시키는 구체적 원인으로는 기존 제도 하에서 특권을 누리는 수혜집단의 저항, 새로운 제도 채택에 따른 학습비용,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제도 간의 상호의존성 등이 있다.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정책과 조직과 법제와 관습(통칭하여 '제도'라고 하자)이 환경변화에 대한 유연성과 범용성이 있다면 우리는 그간의 성공공식을 조금 수정하여 현재 한국 사회와 경제가 직면한 난제 풀이에 적용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이 질문에 대해 경제학자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 로빈슨의 신간 The Narrow Corridor: States, Societies and the Fate of Liberty(이하 '좁은 통로')는 이미 성장한 한국의 발전모형이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전작인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에서 저자들은 제도의 포용성과 착취성(inclusive vs. extractive)으로 국가 번영과 실패를 설명한 바 있다. 국가의 번영을 가져오는 핵심적 요소는 포용적 경제제도이지만 포용적 경제제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포용적 정치제도이다.

결국 정치와 정치제도가 경제제도를 결정하게 된다는 입장이다. 통합적 시스템에서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폴 크루그먼, 알베르토 알레지나와 에드워드 L. 글레이저 등 진보적 경제학자들이 사회적 불평등의 결정요인이나 사회복지제도의 국가별 차이를 설명하면서 취했던 관점이기도 하다.

전작이 넓은 의미의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를 통해 국가 번영의 기원을 설명하려 했다면, 후속작은 특정한 성장경로에 처해 있는 국가가 '자유'를 보장하는 '좁은 통로'로 진입하기 위한, 또는 그 '좁은 통로'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한 조건을 제시한다.

요약하자면 '좁은 통로'는 '국가의 힘'과 '사회의 힘' 사이에 정교한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로 묘사된다. 이른바 '붉은 여왕 효과'(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현상 유지를 위해 계속해서 달려야만 하는 붉은 여왕 에피소드에서 착안된 용어)는 국가와 사회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주체가 끊임없이 상대방의 속도에 맞춰 경주(race)를 해야 하는 상황을 가리킨다.

하이에크는 반드시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더라도 관리역량이 높은 행정국가의 탄생이 자유를 침해하는 '노예의 길'(The Road to Selfdom)을 예비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으나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의 이론에서는 강한 국가가 반드시 자유의 침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붉은 여왕의 뜀박질처럼 국가의 힘이 커지는 만큼 사회의 힘이 커지고 두 힘 사이의 균형이 유지된다면 '좁은 통로'의 폭은 좀 더 넓어지며 자유와 번영이 유지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지게 된다.

리바이어든은 국가의 힘과 사회의 힘이 조합되는 방식에 따라 네 가지 유형(despotic, absent, paper, shacked)으로 구분되는데 국가의 행정력과 조직력이 탄탄한 한편, 아래로부터 사회 참여를 통한 시민의 힘으로 국가의 전제적(despotic) 속성이 제어되는 상태가 '견제된 리바이어든(또는 국가)'(shackled leviathan)이다.

한국의 발전모형이라는 주제로 돌아가 보자.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은 전작에 이어 '좁은 통로'에서도 한국의 경험을 '견제된 리바이어든'의 한 가지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1950년대에 일구어진 시민사회의 역할이 사회적 억압이 심화되는 와중에도 위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조업 기반 산업화를 거치면서 노동조합의 조직화 또한 활성화 되었다. 권위주의 정부가 강화되는 한편 사회의 힘도 강화되었기 때문에 1970년대 군사정권에 대항한 대규모 시위가 촉발되었고 종국에는 1987년의 민주화가 가능하였다는 설명이다.

정리해 보자면 한국은 경제개발 초기에는 국가의 우위 하에서 국가와 사회의 역관계가 불균형을 이루는 상태로 출발하였으나 포용적 정치제도가 발전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에 힘입어 사회의 힘이 강화됨으로써 강한 국가와 강한 사회가 공존하는 좁은 통로, 즉 '견제된 리바이어든(국가)' 경로로 진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마다 리바이어든 유형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붉은 여왕 효과가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한 가지 유형에서 다른 유형으로의 이탈이 가능하다.

현재 시점으로 되돌아 와서 던져야 할 질문은 고도성장과 민주화 이후의 한국의 발전과정에서 붉은 여왕의 경주가 적절하게 작동하였나하는 것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예산의 증가, 복지제도의 강화, 노동시장에 대한 규율의 강화 등 정부의 기능이 다양화하고 사회 전반에 대한 관리역량이 높아졌다는 측면에서 보면 국가의 힘은 분명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시민사회의 다양화 및 다층위화, 지방자치의 확대, 언론 자유의 증대 등을 고려하면 사회의 힘 역시 표면적으로는 강화되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두 힘 사이에는 선순환의 관계보다는 갈등의 요소가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힘이 선순환을 이룰 때는 사회적 요구의 확대에 대응하여 국가는 권한과 행정력을 확대하고, 다시 사회는 국가에 대한 견제장치를 벼림으로써 전제주의로의 길을 차단하게 된다.

다소 추상적인 위의 답변 대신, 현재 공동체 구성원이 직면해 있는 과제와 현안에 대해 국가와 사회가 적절한 정책적 솔루션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실증적으로 보다 의미 있는 답변을 제공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는 저성장, 사회적으로는 저출산의 덫에 빠져 있으며 경제사회적 불평등과 함께 정치적 양극화도 심화되고 있다. 기능과 규모의 측면에서 국가의 힘이 약화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정책의 효과성은 현저하게 취약해졌다. 문제 해결능력이 없는 국가가 번영과 자유라는 '좁은 통로'에 안착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완전히 이탈한 것은 아니더라도 경로 이탈의 위험성은 분명히 감지된다.

이제 포스트 발전국가 시대에 한국의 대안적 발전모형이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지에 대해 잠정적인 답변을 내릴 차례이다. 한국 사회는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민주화를 달성하였으며 이는 정치제도가 착취적인 것에서 포용적으로 전환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국가의 힘과 사회의 힘은 각자의 자율적 영역에서 확대되기는 하였으나 국가와 사회를 매개하는 정치제도의 발전은 충분하지 않았다.

서두에서 제기한 고도성장 신화에 기반한 "행정국가에 대한 과신, 정치국가에 대한 불신", 심지어 권위주의적 국가운영을 효율성 원리와 등치시키는 인지적 '결과 오류'는 국가의 발전모델에서 정치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간과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정치 및 정치제도의 중요성은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을 포함하여 독보적 업적을 이루고 있는 다수의 경제학자들 또한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따라서 대안적 국가발전모델을 제시함에 있어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치제도나 거버넌스 체제를 탐색하고 고민하는 것은 비단 정치학자만이 아닌 모든 정책연구자의 몫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선화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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