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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⑫남북·좌우 갈려 3.1절 기념식 세곳서 열려

등록 2020.03.22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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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집회마다 좌우 세 겨루기 양상

지방서 개최된 기념식은 좌우가 함께

이북 전역에서도 3·1절 기념식 개최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12. 좌우, 남북 분열로 세 곳에서 열린 삼일절과 해방 1주년 기념식

1945년 해방과 함께 한반도에는 정치의 계절이 도래했다. 연합국을 반대하는 시위와 집회는 제한이 가해졌지만, 일제강점기 때 억눌렸던 자유와 자주적 국가건설을 위한 희망이 각종 집회를 통해 분출됐다.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의연금 모집부터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정치집회까지 성격도 다양했다.

[서울=뉴시스] 1946년 서울 거리에서 의연금 모금을 위한 집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서울 거리에서 의연금 모금을 위한 집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6년 전국노동조합전국평회의(전평) 주도로 서울운동장에서 세계노동연맹 가입 축하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전국노동조합전국평회의(전평) 주도로 서울운동장에서 세계노동연맹 가입 축하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email protected]


그중에서도 해방 후 처음 맞는 3·1절과 광복절(해방 1주년)은 각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표면적으로 해방 후 처음 열리는 3·1절 기념식은 “계급, 당파, 주의, 주장을 초월하여 전민족적인 일대 기념행사로 3천만 민족이 다 같이 맞이하자”는 취지에는 모든 정당, 사회단체들이 일치했다.

그러나 이미 한 차례 ‘찬반탁문제’로 세 대결을 벌인 정치권은 단결된 삼일절 행사 개최에 난항을 겪었다.

우파의 한국민주당과 한국국민당은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준비위원회’를, 좌파의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독립동맹(獨立同盟) 등은 ‘삼일기념전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서울운동장과 남산광장에서 각각 기념대회를 추진했다.

보다 못한 언론계가 나섰다. 2월 25일 서울 시내 13개 일간·통신 신문대표자회의가 소집됐고, 여기서 4개 항목의 통일안을 만들어 두 단체에 제안했다.

가. 3·1과 기미(己未) 두 준비회는 그대로 두고 당일 기념행사만은 같이 거행할 것
나. 두 기념준비회의 행사를 집행할 위원회를 만들어 기념식과 시가행진 순서를 적당하게 배정할 것
다. 기념 식전을 거행할 인원은 동수로 하되 대표는 개인 자격으로 할 것
라. 본회의 제안인 독립선언기념행사 통일안을 승낙지 않는 편에 대해서는 금후 기사 보도를 일체 거부함
1946년 2월 25일
자유신문, 조선통신, 중앙신문, 한성일보, 공립통신, 코리아타임스, 해방일보, 조선인민보, 서울타임스, 합동통신, 동아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그러나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는 이 통일안을 수용했지만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준비회는 “금번 신문 통신사대표회의 의도는 언론기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이 아니요,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과오를 범했다”며 거부함으로써 언론계의 중재는 실패했다.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첫 삼일절을 맞아 보신각에서 하지 주한사령관, 러치 군정장관 등 군정청의 주요 간부와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간부들이 기념식을 하고 있다. 김구 주석이 축사를 낭독 후 김규식 선생 선창으로 만세삼창이 이어졌다. (사진=백범학술원) 2020.03.22.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첫 삼일절을 맞아 보신각에서 하지 주한사령관, 러치 군정장관 등 군정청의 주요 간부와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간부들이 기념식을 하고 있다. 김구 주석이 축사를 낭독 후 김규식 선생 선창으로 만세삼창이 이어졌다. (사진=백범학술원) 2020.03.22.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첫 삼일절을 맞아 보신각에서 하지 주한사령관, 러치 군정장관 등 군정청의 주요 간부와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간부들이 기념식을 하고 있다. 김구 주석이 축사를 낭독 후 김규식 선생 선창으로 만세삼창이 이어졌다. (사진=백범학술원) 2020.03.22.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첫 삼일절을 맞아 보신각에서 하지 주한사령관, 러치 군정장관 등 군정청의 주요 간부와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간부들이 기념식을 하고 있다. 김구 주석이 축사를 낭독 후 김규식 선생 선창으로 만세삼창이 이어졌다. (사진=백범학술원) 2020.03.22.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결국 3월 1일 좌파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주최로 파고다공원에서 오전 9시에 3·1절 기념식을 개최한 후 남산공원으로 이동해 시민대회를 열었고, 우파는 민주의원 주최로 보신각 앞에서 오전 9시 40분 기념식을 연 후 서울운동장에서 기념대회를 했다.

다만 지방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은 대체로 좌우익이 함께 치렀다. 좌우익이 부산에서 함께 거행한 3·1절 기념식에는 마침 부산에 와 있던 김원봉(金元鳳)도 참석했다.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일 해방 첫 삼일절 기념식을 앞두고 좌파성향의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에서 제작한 전단.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20.03.22.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일 해방 첫 삼일절 기념식을 앞두고 좌파성향의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에서 제작한 전단.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일 해방 첫 3.1절 기념식을 앞두고 우파성향의 건국청년회에서 제작한 전단.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20.03.22.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일 해방 첫 3.1절 기념식을 앞두고 우파성향의 건국청년회에서 제작한 전단.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20.03.22.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비슷한 시각 평양에서도 소련군 주요 간부들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과 시가행진이 진행됐다. 38선 이북의 주요 도시에서도 삼일절 기념대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1주년 기념식을 가진 후 26년 만에 비로소 한반도에서 첫 3·1운동 기념식이 열렸지만 전 민족이 함께하지는 못했다.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남산과 서울운동장, 평양에서 거행된 서로 다른 3·1절 기념식은 해방공간 좌우익의 대립과 남북 분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대회에서 김일성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이 연설하고 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초상화 가운데 태극기가 게양된 것이 이색적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대회에서 김일성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이 연설하고 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초상화 가운데 태극기가 게양된 것이 이색적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일 시민들이 원산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대회를 마치고 거리 행진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일 시민들이 원산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대회를 마치고  거리 행진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일 강원도 화천군에서 군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삼일절 기념대회를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3월 1일 강원도 화천군에서 군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삼일절 기념대회를 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email protected]


삼일절 행사의 분열을 의식한 듯 8월 15일 해방 1주년에는 미군정청 앞 광장에서 ‘8·15 평화 및 해방1주년시민경축대회 기념식’이란 이름으로 한미·좌우 합동으로 미군정청 앞 광장에서 개최됐다. 이날 대회에서는 4개 항의 결의문이 채택됐다.

1) 우리는 민족자결의 원칙과 진정한 민주주의에 基한 자주독립국가의 완성을 기(期)함
2) 우리는 국론의 일치와 국제여론의 환기로써 카이로선언의 즉시 실현을 기함
3) 우리는 38선의 철폐로서 정신적 경제적 및 정치적 통일을 기함
4) 우리는 국민의 총의로써 임시정부 수립의 촉진을 기함

그러나 기념사를 하기로 예정한 좌우합작 운동의 좌·우 대표였던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 민주주의민족선전선 의장 허헌(許憲) 등은 출석하지 않음으로써 ‘좌우통합’이란 취지에 빛이 바랬다. 당시 좌우합작 운동은 좌우의 비협조로 난관에 봉착해 있었고, 좌파는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의 3당 합당 문제로 내홍에 시달리고 있었다.

[서울=뉴시스]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을 맞아 미군정청 앞 광장에서 ‘8.15세계평화 및 해방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을 맞아 미군정청 앞 광장에서 ‘8.15세계평화 및 해방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국제보도연맹에서 발간하는 '국제보도'는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을 맞아 해방기념호를 발간해 주요 행사 모습을 게재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국제보도연맹에서 발간하는 '국제보도'는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을 맞아 해방기념호를 발간해 주요 행사 모습을 게재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행사는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다만 서울과 달리 지방에서는 좌우가 함께 행사를 치른 지역이 많았다. 사진은 부산에서 해방 1주년 행사를 마치고 행진하는 모습.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행사는 전국 각지에서 열렸다. 다만 서울과 달리 지방에서는 좌우가 함께 행사를 치른 지역이 많았다. 사진은 부산에서 해방 1주년 행사를 마치고 행진하는 모습.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email protected]


좌파성향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서울운동장에서 오전 9시 독자적으로 해방 1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을 했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1) 토지개혁, 중요산업 국유화, 진보적 노동법령 등의 실시 2) 언론 집회 결사 신앙에 대한 자유 보장 요구, 3)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 촉진과 남북통일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하루바삐 수립하자 등 14개 항의 결의문이 발표됐다.

우파가 발표한 4개 항의 결의문과 좌파가 발표한 14개 항의 결의문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간극이 존재했고, 이후 정국(政局)은 심각한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한편 이북지역에서도 3·1절 기념식과 유사하게 평양을 비롯한 각지에서 해방 1주년 기념행사와 시가행진이 이뤄졌다. 이후 북한은 각 도·시별로 인민위원회 선거에 착수했다.

[서울=뉴시스] 1946년 8월 15일 평양에서 소련군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주요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해방 1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8월 15일 평양에서 소련군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주요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해방 1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식을 마친 후 평양의 여성동맹 회원들이 평양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식을 마친 후 평양의 여성동맹 회원들이 평양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3.22. [email protected]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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