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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⑲ '내우외환' 조선공산당 돌파구로 총파업 단행

등록 2020.05.10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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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창당이래 처음 공식 현판 내걸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도덕성 직격탄

박헌영 체포령 내려지자 월북 선택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19. 간판 내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일제강점기 때 현재 조선호텔이 있는 소공동일대는 ‘하세가와쵸(長谷川町)’라고 불렸다. 제2대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長谷川)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곳에 근택빌딩(조선호텔 앞)이 있었다.
 
1945년 11월 23일 이 빌딩에 조선공산당 본부 간판이 정식으로 내걸렸다. 1925년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이란 이름으로 비밀리에 창당된 후 숱한 검거와 탄압을 거친 뒤 20년 만에 양지로 나온 셈이다. 간판이 내걸린 시점이 중요하다. 11월 16일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朴憲永)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과 회담했다.

협의가 끝난 후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은 군정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다”는 뜻을 밝혔다며 “협력은 하되 군정이 잘못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경우에는 공산당에서는 비판할 자유를 가졌고 또한 우리의 의견을 건의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점에 하지 사령관도 찬성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이 회담이 끝난 후 1주일 만에 공개적으로 간판을 내걸고 조선공산당이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구성되자 조선공산당은 1946년 2월 좌파 정당과 사회단체의 연합조직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했다. 우파 계열이 김구(金九) 중심의 비상국민회의를 출범시키고 미군정 자문기관으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 설치되자, 이에 대응해 좌파 정치 세력의 결집을 시도한 것이다.

민전에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조선민족혁명당 등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청년총동맹, 부녀총동맹, 각종 문화단체 등이 가입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한 김원봉(金元鳳), 장건상(張建相) 등도 참여했다. 공동의장단은 여운형(呂運亨), 박헌영, 허헌(許憲), 김원봉, 백남운(白南雲) 등 다섯 명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조직역량 측면에서 민전은 우파를 압도했다.

[서울=뉴시스] 1946년 4월 11일 민주주의민족전선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대표 환영 민주주의정부수립 촉성시민대회’에 참석한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朴憲永)과 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呂運亨)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0.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6년 4월 11일 민주주의민족전선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대표 환영 민주주의정부수립 촉성시민대회’에 참석한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朴憲永)과 조선인민당 당수 여운형(呂運亨)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0. [email protected]


미군정과 우파 입장에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좌파세력을 견제, 약화시켜야만 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러한 작업이 시작됐다.

<동아일보>는 1946년 1월 16일자 1면에 조선공산당수 박헌영이 조선을 소련의 속국으로 만들기를 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1월 5일에 있었던 박헌영의 공식 기자회견을 다룬 이 기사는 미국의 방송보도 내용을 확인도 하지 않고 인용한 ‘가짜뉴스’였다.

같은 회견에 참석한 미군 기관지 기자와 국내 12개 신문과 통신사 기자 일동이 즉각 이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우익단체들은 이 기사를 박헌영을 공격하는 호재로 삼았다.

[서울=뉴시스] 1946년 1월 5일의 박헌영 기자회견에 참석한 12개 통신과 신문 기자들이 1월 18일 배포한 전단. 박헌영이 1월 5일 기자회견 당시 한반도를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으로 받아줄 것을 청원했다고 발언한 적이 없음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2020.05.10.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1월 5일의 박헌영 기자회견에 참석한 12개 통신과 신문 기자들이 1월 18일 배포한 전단. 박헌영이 1월 5일 기자회견 당시 한반도를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으로 받아줄 것을 청원했다고 발언한 적이 없음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2020.05.10.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2월 20일 ‘매국적징치각단체긴급협의회(賣國賊懲治各團體緊急協議會)’에서 제작한 조선공산당과 당수 박헌영(朴憲永)을 규탄하는 전단. ‘박헌영의 매국언사(賣國言辭)는 사실'이라는 주장이 담겼다.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2020.05.10.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2월 20일 ‘매국적징치각단체긴급협의회(賣國賊懲治各團體緊急協議會)’에서 제작한 조선공산당과 당수 박헌영(朴憲永)을 규탄하는 전단. ‘박헌영의 매국언사(賣國言辭)는 사실'이라는 주장이 담겼다.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2020.05.10.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5월 초 이번에는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 주역이자 민전 인천지부 의장이던 조봉암(曺奉岩)이 박헌영에게 보내려고 3월에 쓴 개인 편지(초안)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4개 신문에 일제히 실렸다.

이 자료는 미군 방첩대(CIC)가 제공했다. 방첩대 인천 지소는 1946년 3월 하순에 민전 인천지부를 습격하여 사무실에 있던 문건들을 압수했고, 그 과정에서 조봉암이 소지하고 있던 이 편지도 압수했다. 조봉암은 편지가 개인 서한이므로 반환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으나 방첩대 인천 지소는 이 편지를 서울에 있는 방첩대 본부로 보냈다.

그리고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 이 편지를 우익 계열의 4개 신문사에만 제공해 공개해 버렸다. 조봉암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의 운영과 활동 등에 대해 비공개적으로, 개인적으로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려고 했지만 의도치 않게 이 편지가 압수 공개되면서 결국 공산당을 탈당할 수밖에 없게 됐다.

[서울=뉴시스] 조봉암이 박헌영에게 쓴 개인 편지를 실은 <한성일보> 1946년 5월 7일자. 이 편지는 미군 방첩대(CIC)가 제공한 것이고, 이 편지가 공개됨으로써 조봉암은 조선공산당을 탈당할 수밖에 없게 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0.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조봉암이 박헌영에게 쓴 개인 편지를 실은 <한성일보> 1946년 5월 7일자. 이 편지는 미군 방첩대(CIC)가 제공한 것이고, 이 편지가 공개됨으로써 조봉암은 조선공산당을 탈당할 수밖에 없게 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0. [email protected]


비슷한 시기에 여운형의 동생이자 민전 위원으로 활동하던 여운홍(呂運弘)이 조선인민당을 탈당해 사회민주당 창당을 발표했다. 미군정은 대중적 영향력이 큰 여운형을 좌파세력과 갈라놓기 위해 민주의원에 참가시키려 했지만 이를 거부하자 여운형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쪽으로 선회했다.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인  굿펠로 대령, 버치 중위 등이 나서서 창당 자금 지원 약속 등을 제시해 여운홍의 탈당을 성공시켰다.
 
결정타는 ‘정판사 위폐사건’이었다. 5월 15일 군정청 공보과는 이 사건에 대해 발표했고, 다음날부터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발표 내용은 공산당 본부가 있는 근택빌딩 지하실의 인쇄소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 300만 원을 찍었으며, 여기에 공산당원인 인쇄소 직원 14명과 2명의 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이관술 총무·재정부장과 권오직 해방일보 사장)이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의 시작은 ‘뚝섬위폐단’이었다. 당시 경찰은 독촉국민회 뚝섬위원회 조직부장 이원재를 중심으로 하는 위폐제조단 일당을 검거했는데, 여기에 정판사 직원이 관련됐고, 이것이 정판사 압수수색으로 이어졌다.

사건이 발표되자 조선공산당은 위폐사건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이관술(李觀述)·권오직(權五稷) 양인은 전혀 관계가 없고, “이 사건과 조선공산당 간부를 관련시킨 것은 어느 모략배의 고의적 날조와 중상으로 미소공동위원회 휴회의 틈을 타서 조선공산당의 위신을 국내 국외에 긍하여 타락시키려는 계획적 행동”이라고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다음날 오전 9시 박헌영 당수는 직접 미군정청을 방문했으나 군정장관과 공보부장을 만나지는 못한 채 하급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군정장관에게 재고를 바란다는 의견서를 전달했다.

<해방일보>는 5월 17일자 사설에서 위폐 사건이 군정 당국의 무고(誣告)라고 주장하면서 공산당을 향한 중상모략의 대표적 사례로 “공산당은 조선을 소련에 예속하기를 음모한다”, “공산당은 무기를 은닉하였다” 등을 거론했다.

그러나 <해방일보>는 다음날 무기 정간을 당하고, 이후 폐간됐다. 이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들은 11월 23일 선고 공판에서 모두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이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논쟁이 되고 있다. 분명한 점은 이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이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서울=뉴시스] 일제강점기 때 세워진 근택빌딩의 모습. 해방직후 조선공산당의 본부가 이 건물에 입주했고, ‘조선정판사위폐사건’의 진원지가 된 곳이다. 현재는 근택빌딩 자리에 롯데백화점 주차빌딩이 들어서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0.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일제강점기 때 세워진 근택빌딩의 모습. 해방직후 조선공산당의 본부가 이 건물에 입주했고, ‘조선정판사위폐사건’의 진원지가 된 곳이다. 현재는 근택빌딩 자리에 롯데백화점 주차빌딩이 들어서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10.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6년 7월 29일 조선민주청년동맹 회원들이 ‘조선정판사위폐사건’ 1회 공판이 열린 서울재판소 담을 넘어 진입하고 있다. 이날 서울재판소 구내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해 삐라를 뿌리고,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는 등 혼란이 조성됐고, 출동한 무장경관의 발포로 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5.10.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7월 29일 조선민주청년동맹 회원들이 ‘조선정판사위폐사건’ 1회 공판이 열린 서울재판소 담을 넘어 진입하고 있다. 이날 서울재판소 구내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운집해 삐라를 뿌리고,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는 등 혼란이 조성됐고, 출동한 무장경관의 발포로 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5.10.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7월 ‘조선정판사위폐사건’ 1회 공판이 열리는 서울재판소에 나온 사건 관련자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5.10.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7월 ‘조선정판사위폐사건’ 1회 공판이 열리는 서울재판소에 나온 사건 관련자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5.10.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조선공산당으로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의 분열공작과 탄압에 맞서 이른바 ‘신전술’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조직적 힘을 과시해 미군정의 정책을 변화시키려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더구나 당시 조선공산당은 심각한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박헌영은 1945년 9월 8일 계동에서 열린 공산주의자 ‘열성자대회’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반대파들에게 공식적인 당대회 개최를 약속했다.

그런데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반대파들은 1945년 말부터 소련군과 북조선공산당에 당대회 개최를 촉구하는 서신을 보내기 시작했고, 2월에 열린 당 대표자 연석회의에서도 박헌영에게 당대회를 요구했다. 이러한 당내 갈등은 7월 박헌영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좌익 3당의 합당을 추진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박헌영은 반대파들이 계속 당대회를 요구하고, 독자적으로 9월 말에 당대회를 위한 준비대회 개최를 추진하자 반대파의 중심인물 6명을 제명 등 중징계를 내렸다. 그리고 당초 10월로 예정해 준비하던 총파업을 9월로 앞당겼다.

이에 따라 9월 23일 철도노동자들이 “가족수당 1인당 600원, 물가수당 2000원, 해고 절대반대, 임금인상 등의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총파업에 돌입했고, 이어서 25일 서울의 출판노조가 일상적·경제적 요구인 식량문제 외에 정치적 요구인 ‘민주주의 애국자에 대한 지명체포령 철회’를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전평 소속의 다른 노동자들은 9월 28일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러한 ‘9월총파업’은 이후 농민들의 전국적인 ‘추수봉기’로 이어졌고, 당내 반대파들의 추진한 ‘당대회 준비대회’도 철도파업으로 400명의 참석예정자 중 반수도 참석하지 못한 채 열렸다.

서울=뉴시스] 1946년 9월 전평 산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경찰들이 참가노동자들을 해산시키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5.10.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6년 9월 전평 산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경찰들이 참가노동자들을 해산시키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5.10.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전평의 총파업은 미군정이 9월 7일 박헌영을 비롯해 민전의 주요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 직후 시작됐다.

특히 전평은 농민들과의 연계가 가능한 10월 추수기를 목표로 파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파업이 당겨지면서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파업에 들어갔고, 그들이 의도한 ‘노동자·농민동맹에 기초한 강력한 대중투쟁’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박헌영은 체포령을 피해 월북했고, 좌익3당 합당은 파행을 거듭하다 11월에 가서야 창당작업을 마쳤다. 9월총파업과 10월 농민봉기로 빚어진 경색국면은 좌우합작운동을 견제하고, 좌익 3당 합당과정에서 반대파의 손발을 묶는 정치적 효과를 가져왔지만, 전반적으로 좌익세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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