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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이용수 할머니 25일 회견 발언내용

등록 2020.05.25 16: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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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뉴시스]이지연 이은혜 기자 = 제가 2번째 기자회견을 합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또 잘못했다 하고 하는 것은 제가 처음 기자회견할 때 했고 한데, 너무 많이 생각지도 못하는 것이 나왔습디다.그것은 제가 생각할 때는 검찰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정신대대책협의회입니다. 정신대대책협의회는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들입니다.그런데 공장 갔다 온 할머니들을 정신대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은 공장에 갔다 온 할머니하고 위안부, 듣기 싫은 위안부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공장 갔다 온 할머니들은 공장에서 일했지만 위안부는 다 다릅니다.

우리 나이로 하면 열여섯 살, 만으로 하면 열 네 살입니다. 성을 안 바꾸면 그땐 배급을 안줬습니다.

그런데 학교도 그때 일본 학교입니다. 제가 3,4학년까지 다녔습니다. 가타카나를 알았습니다. 끌려가서도 가미가제 부대에 끌려가서도 그 장교가 가타카나로 써줘서 대화를 했습니다.
 
이 군인이 하는 말도 우리가 피해자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하죠.이 군인이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요시코.

나도 몰랐습니다. 그 이후에 끌려가서 당했던 것은 말로는 못합니다.제가 쭉 30년 동안 해 오면서 미국으로 어디로 다니면서 이 증언을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확실하고 또 바른말하고 이러니까 정신대대책에 대해 몰랐습니다.

제가 92년도 6월25일날 신고하러 갈 때 윤미향이라는 간사였습니다. 간사에게 말했습니다. 25일날 했는데 29일날 모임이 있다고 해서 갔습니다.

어느 교회였습니다. 교회에 갔었는데 그날따라 일본 어느 선생님이 정년퇴직하고 돈을 1000엔인가 줬다하면서 100만원씩 나눠줬습니다. 무슨 돈인지 몰랐습니다. 그때부터 모금이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 모금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따라다니면서 모금하는 데 보니 농구선수들이 농구를 하는데 농구선수가 돈을 들고 모금을 했는데 그 돈을 받아왔습니다.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지만 좀 부끄러웠습니다. 농구에서 이긴 돈을 끝나고 거둬 나왔습니다.

늦게 배가 고파서 맛있는 것을 사달라하니 돈 없습니다. 했습니다. 돈 거둬놓고도.그런가보다 생각했습니다. 어디가도 교회가도 돈을 주면 그걸 그런갑다하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모르고 30년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무엇입니까.정신대 대책협의회입니다.

공장갔다온 할머니도 해야 하는데 말하자면 밀가루 반죽해서 빚어놓고 속은 맛있고 귀한 것을 넣어야 안 됩니까. 그런데 그 속은 위안부입니다.

그런 그걸 해도 쭉 30년을 해 와도 저는 몰랐습니다. 그저께까지도 몰랐습니다.

어저께 저녁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것은 왜, 무엇 때문에, 정신대 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 위안부 생명을 걸어놓고 끌려가는 이 위안부를 왜 저거가 정신대 할머니와 합해서 쭉 이용해 나갔습니다.

저는 그것도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어제 생각하니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에30년을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사죄하라 배상하라 하는데일본 사람이 뭔지 알아야 사죄를 받지요.

사죄를 안 해도 된다는 말 아닙니까. 30년 동안 배상을 요구하고 학생들까지 고생시켰다.돼지저금통 털어 나온 것도 챙겼습니다.

어제 잠을 못 잤습니다.정신대 문제만 하지 저거가 무슨 권리로 위안부 피해자를 만두의 고명으로 사용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사죄를 안 한 이유를 알았습니다.사진 한 장만 법에 걸고 했는데 이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팔았습니다. 왜 팔려야 합니까. 왜 우리가 팔려야 합니까.

그 보리쌀 많이 하는데 쌀 한움큼 넣어서 엄마가, 처음에는 감춰서, 수야 이리 온나, 해서 데려가 먹이곤 했습니다.

이런 남의 집 귀한 딸 고명 딸을 밤에 끌고 가서 대만 신주 가미가제 부대를 가서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끌고 가서 전기고문과 몸을 ~해서 죽여놨습니다.

근데 군인이 보니까 방에 들어가라고 담요를 이렇게 걷는데 군인이 있는데 들어가라고 안들어간다고 하니까 그냥 머리를 질질 끌고 가서 광 안에 자물쇠 큰 게 달렸었습니다.

그걸 탁 떼더니 문을 확 열더니 밀었다. 또 일으켜서 발로, 그건 돌덩이보다 여문 군화발이었습니다.

 허리를 차서 엎어졌는데 너무너무 아파서 저 잘못한 거 없습니다, 그런데도 잘못했다고 빌며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근데도 앉혀놓고, (팔목)여기 하나 감고 여기 하나 감고. 지금도 귀에 소리 납니다. 제가 엄마라고 불렀던 게 귀에서 나는지 머리에서 나는지. 이것은 어린 나이에서부터 지금까지 지금도 납니다. 이걸 왜 그런지, 누구한테라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정신대대책협의회라면 이걸 밝혀줘야 하지 않습니까. 할머니 어디 갔다 왔나, 한번도 할머니 앉혀서 증언 받은 적이 없다. 그냥 밥먹는데도 어디 갔다 왔냐, 어디 다녀왔다 하면 책을 냈습니다.

93년부터 책을 6500원에 파는 걸 봤다. 그래도 그걸 몰랐다. 그런 그걸 챙긴 줄 모르고 다니면서, 미국으로 어디로 다니면서. 증언도 하고 정대협 박물관 짓는, 서대문형무소서 짓는다고 했습니다.

 박물관에 대표가 돼 있습니다. 대표로서 하지 마라 창피하다 했습니다. 그러면 대표소리는 안 해도 대표 대우는 해 줘야 할 거 아닙니까.

하지만 끝까지 3월30일날 제가 전화했습니다. "미향씨 이러면 안 되지 않나. 한 번 오너라고. 안 그러면 내가 기자회견 하련다" 했는데, 아주 큰 소리로 당당하게 기자회견 하라고 해서 제가 5월7일에 기자회견 했던 겁니다.

이런 등등 제가 하나하나 말을 못 드리겠습니다. 빨리 생각이 안 납니다. 이래서 제가 했다고 기자회견 했는데, 어느ㅡ날입니다. 여기 와 있을 겁니다.

소위 국회의원으로 나올 적에 도와준 건 없지만 가보고 해야 한다고 생각 했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저따위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날 저녁에 나갔다 들어오니까 들어와서 막 있는데 문을 열어돌라해서 열어주니까 윤미향씨가 싹 들어오는 겁니다.

 제가 놀라서 넘어갈 뻔했습니다. 그러면서 와서 무릎을 꿇고 무슨 말인지 용서. 뭐를 용서합니까. 뭘 가져와야 용서를 하죠. 예? 하든가 안 하든가.

뭘 용서. 용서? 보니까 엄청나더구나. 그것은 검찰에서도 할 것이고, 내가 며칠 후 기자회견 할 테니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갔는데, 나가보니까 소위 교수라는 사람도 있고, 여러 사람이 있는데 내가 말을 안 했다. 뻔뻔스레 차에 내려 휠체어 타려니까 뭐가 어떻고. 도대체 뻔뻔스럽기 짝이없다(분노). 이런 사람이 윤미향 ~했답니다. 뭣입니까.
 
그래서 윤미향에게 며칠 후 기자회갼 할테니 오라 했는데. 원수진 것도 아니고 30년을 함께했습니다. 한번 안아달라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생각에, 그래 이게 마지막이다. 하는 생각에 안아주니 저도 인간입니다.

30년을 함께했으니, 이게 마지막이라 생각하니까 너무(기침) 눈물이 왈칵 나서. 제가 울었는데.

이걸 가지고 기자님들 좀 부탁드립니다. 명백하게 좀 기자를 내 주세요. 그걸 가지고 용서했다. 이런 기사. 너무한 거다. 그게 아니다. 이건 확실하고 명백히 여러분에게도 책임이 돌아가는 일이다 하기 떄문에, 제가 이걸 명백히 하려 했는데. 혼자 생각했었다. 어떻게 이걸 그만둬야 하지마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있었는데, 이 사람은 자기 맘대로 뭐든 하고 싶으면 하고, 어떻게 30년을 함께 했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맘대로 팽개쳤습니다. 우리 국민들 세계 여러분이 그 데모(수요집회)에 나오십니다. 그분들도 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된 것입니다.

이래놓고 자기가 사리사욕 차려서 맘대로 국회의원 대표도 나갔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저한테 얘기도 없었고 자기 맘대로 하는 거니까 제가 뭘 용서를 구합니까. 이름도 성도 없는 용서? 자기 맘대로 했으니까 자기 맘대로 하든지말든지 하는 거지. 저한테 미룰 필요 없지 않습니까. 뭐 때문에 용서를 바랍니까.

그거 아니라도 여러 수십만가지 제가 다 말씀 못 드립니다. 속이고 이용하고 재주는 곰이하고 제주는 되사람이 받고. 재주 30년동안 하고 돈은 다 받아먹었습니다. 무슨 용서를 바랍니까. 해서 저는 데모(수요집회) 방식을 바꾼다는 거지 끝내자는 건 아닙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시작했고 또다시 새롭게 좀 학생들에게 교육적인 이걸 하기 위해서 제가 이걸 바꾸려 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이웃나라입니다.

이러면 이 학생들이 결국 그나라 주인 아닙니까. 하니까, 이 학생들이 알아야, 뭐 때문에 사죄 배상 한단 거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아베는 한국이 거짓말한다, 그 학생들에게 물으면 한국이 거짓말쟁이다, 하니까 그것도 몰라서 그런 거 아닙니까. 우리 학생도 일본 학생도 그걸 모르고 거짓말이라 하니까 거짓말만 하는 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겁니다. 일본 한국 학생들이 왕래하면서도 세월이 가면서도 학생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과 한국은 이웃나라입니다. 결국은 학생들이 그 나라 주인 아닙니까. 학생들이 사죄 배상에 대해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아베는 서류만 나오면 불에 지르면서 우리보고 거짓말한다고 합니다.

시간이 가도 학생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왕래하면서 친해지면서 서로 배워야 합니다. 배워야 알지요.

그래서 저로서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대구에 역사관이 있습니다. 이것도 또한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대구에 유명한 최 변호사가 대표로 있으면서 했습니다. 지금은 윤미향이를 밀고 있습니다.

“할머니, 윤미향이 욕하지 마세요. 김복동 할머니 존경받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 이름으로 받으면 그 할머니 돈입니까.미국가면서 600만원 돈을 모금했는데 전화와서 할머니는 못 오게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많습니다.30년간 그것만 이야기했는데 줄줄줄 말도 못하게 나옵디다.

할머니들 팔아서, 택도 없는 할머니들 아닙니까. 이것도 부정아닙니까. 죄를 받아야 합니다.

저는 김복동 할머니요? 그 할머니는 한쪽 눈이 실명입니다. 그 할머니를 끌고 다녔지요.미국으로 어디든 다니면서,할머니 있을 때 잘해야하는데 고생시키면서 이용해 먹고 뻔뻔하게 묘지에 가서 눈물 흘립니까.

그건 가짜의 눈물입니다. 병주고 약주고 하는 그것도 죄인데, 죄를 모르고 아직까지, 그건 다 검찰에서 밝힐 겁니다.

 하지만 정신대대책협의회에서 위안부 이용해서 한 건 도저히 용서가 안 됩니다. 이것도 또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해서, 저는 끝까지. 나이가 들다 보니 자신이 없습니다.

근데 우리 학생들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과 한국 학생들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올바른 역사를 공부해서 위안부 문제 사죄 배상하는 걸 했다. 천년이 만년이 가도 일본이 해야 한다 이걸 가르치기 위해선 남북간 친하게 지내면서도 역사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사람들이 꼭 역사에 주인이니까 일본 올바른 역사교육 시켜서 이 억울하고 누명 쓴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 해결해 줄 사람들은 학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당해야 하고 내가 부끄럽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할머니들에게 내가 해결하고 왔다 언니 동생들 내가 이렇게 해결하고 왔으니 나를 용서해 달라고 빌렵니다.

 저는 하나도 부끄럼이 없습니다. 위안부로 세계의 여성분들계 폐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세계의 여성분들 저희가 위안부이지만 여성이란 그 두 글자가 너무 미안합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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