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광복 75주년] ㉔ "분단은 막자" 마지막 시도로 남북협상

등록 2020.06.14 06:00:00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김구가 남북협상 제안하고 뒤늦게 북한이 수용

15명이 참가한 남북지도자협회서 공동성명 발표

단독정부 수립 못막았지만 남북대화 기반으로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24. 남북연석회의와 ‘4김(金) 회담’

1948년 2월 10일 김구(金九) 한국독립당 위원장은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성명을 발표했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김구는 “우리의 자주 독립적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 집단의 사리사욕에 탐하여 국가 민족의 백년대계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라며 38선 이남만의 단독선거에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고, 분단을 막기 위해 이북 지도부와 협상해 보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조금은 갑작스러운 정책 전환이었다. 김구는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자 이에 반대하며 반탁운동을 이어갔다. 미국이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넘겨 ‘유엔(UN) 감시하에 한반도 전 지역에서 총선거를 시행하여 단일정부를 세우는 방안’을 시도할 때도 이를 지지했다. 북한이 유엔 감시하에 총선을 거부할 경우에는 남한만의 단정 수립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12월 장덕수(張德秀) 암살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건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게 되면서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 김구는 끝내 자신을 증인으로 채택한 미군정,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는 도움을 거절한 이승만과 결별하고, 김규식(金奎植) 등 중간파 세력의 결집체인 민족자주연맹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하기 시작했다.

1948년 1월 총선거 문제 논의를 위해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하자 그는 ‘'미·소 양군 철군→남북요인회담→총선에 의한 정부 수립’의 3단계 방안을 제시했다. 이어 2월 4일에는 북쪽의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2월 10일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절절한 성명을 발표해 다시 한번 남북협상을 제의했다.

즉답하지 않던 북한은 3월 말이 돼서야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남한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사회단체가 참가하는 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수정 제안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제안한 ‘남북요인회담’을 수락한 것인지 자신의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것인지가 불분명한 제안이었다.

국내의 여론이 찬반양론으로 갈라진 가운데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 측의 진의를 알아보기 위하여, 4월 8일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사촌 동생 안경근(安敬根)과 민족자주연맹 비서처 총무 권태양(權泰陽)을 평양에 파견했다.

이들은 ①진정한 민주 정부를 건립하며 어떠한 독재체제도 거부, ②사유재산제를 승인하며 독점적 자본주의를 거부, ③ 전국적인 보선을 실시하며 통일된 중앙정부를 건립, ④어떤 우방도 한국 영토 내에 군사 근거지 설치 반대, ⑤ 미소 양국은 즉각 담판을 개시하여 점령군의 철퇴 시간과 조건 토의 등 남북회담을 위한 5가지 선결 조건을 제시했다. 북한이 이를 수용한다고 알려왔지만 미군정의 반대로 김구와 김규식은 마지막까지 북행(北行)을 망설였다.

4월 14일 저명한 문화인 108명의 연서로 남북요인회담 지지 성명이 발표되면서 김규식도 북행을 최종 결심하게 됐고, 이에 따라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가 예정보다 늦은 4월 19일부터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리게 됐다.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19일 남북 협상을 위해 38선을 넘기 전 경기도 여현 38도선 표지판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김구(金九) 선생 일행. 왼쪽부터 비서 선우진(鮮于鎭), 독립운동가 정이형(鄭伊衡) 민족자주연맹 정치위원, 김구, 아들 김신(金信), 유중렬 <조선통신> 기자. 사진은 <조선통신> 이지수(李志水) 사진기자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19일 남북 협상을 위해 38선을 넘기 전 경기도 여현 38도선 표지판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김구(金九) 선생 일행. 왼쪽부터 비서 선우진(鮮于鎭), 독립운동가 정이형(鄭伊衡) 민족자주연맹 정치위원, 김구, 아들 김신(金信), 유중렬 <조선통신> 기자. 사진은 <조선통신> 이지수(李志水) 사진기자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19일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열린 평양 모란봉극장에 입장하는 대표자들과 개회 연설하는 김두봉((金枓奉)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19일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열린 평양 모란봉극장에 입장하는 대표자들과 개회 연설하는 김두봉((金枓奉)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email protected]


19일 오후 1시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첫날 회의는 대표자 545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두봉·허헌(許憲) 등 여러 명이 축하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끝났다.

21일 열린 두 번째 회의에서는 북조선 정세에 관한 김일성(金日成) 북조선인민위원장의 보고에 이어, 백남운(白南雲) 근로인민당 위원장과 박헌영(朴憲永) 남조선노동당 위원장의 ‘남조선정치정세보고’가 진행된 후 토론이 있었다.

김구 일행은 4월 19일 오후 3시경 자동차로 서울을 떠나 6시 20분경 38선 경계선인 여현(礪峴)에 도착해 기념촬영을 한 후 평양으로 향했다.

그 순간을 <조선통신> 유중열 기자는 “혁명가 김구 씨는 기어코 38선을 넘었다. 때는 6시 45분. 너웃너웃 저물어가는 황혼 속에 한 발 넘어서면 멀리 바라다보이는 곳이여. 역 정거장 녹슨 철로 위에 오지도 않는 기차를 기다리는 시그널의 붉은 등불이 눈물 속에 아롱거린다”라고 기록했다.

김규식도 이틀 뒤인 21일 오전 11시 50분 38선을 넘었다. 이들은 남북연석회의 제3일째 회의에 뒤늦게 참석했고, 김구·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홍명희(洪命憙) 등 4명이 주석단으로 선출됐다.

이날 김구는 간단한 인사말을 통해 “조국이 없으면 국가가 없으며 국가가 없으면 어느 정당이나 사상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공동투쟁 목표는 단선을 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남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어느 곳임을 막론하고 그것을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회의는 반드시 성공하여야 한다. 국제관계에서도 미묘한 데가 있으나 우리가 모범적으로 통일 단결하여 세계에 이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22일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3일째 오후 회의에 참석한 김구(金九) 한국독립당 위원장이 연설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22일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3일째 오후 회의에 참석한 김구(金九) 한국독립당 위원장이 연설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22일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3일째 회의에 참석한 김구(金九) 한국독립당 위원장이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장, 홍명희(洪命憙) 민주독립당 대표와 나란히 단상에 앉아 있다. 사진은 북한이 흑색 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변환해 공개한 것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22일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3일째 회의에 참석한 김구(金九) 한국독립당 위원장이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장, 홍명희(洪命憙) 민주독립당 대표와 나란히 단상에 앉아 있다. 사진은 북한이 흑색 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변환해 공개한 것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22일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3일째 회의에 참석한 김구(金九) 한국독립당 위원장이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장, 홍명희(洪命憙) 민주독립당 대표와 나란히 단상에 앉아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22일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3일째 회의에 참석한 김구(金九) 한국독립당 위원장이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장, 홍명희(洪命憙) 민주독립당 대표와 나란히 단상에 앉아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email protected]


남북연석회의는 23일의 넷째 날 회의에서 ‘삼천만 동포에게 호소하는 격문’을 채택한 후 16개 정당 대표와 40개 단체대표가 서명했고, 26일 폐막일에는 ‘단선단정반대전국투쟁위원회’ 결성을 결의했다.

폐막 전날인 25일에는 오전 11시부터 평양 광장에서 30여 만 명의 군중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연석회의 축하 대행진과 시민대회가 열렸고, 오후 4시부터 북조선인민위원회의실에서 축하 공연과 초대연 등이 진행됐다.

그러나 김구, 김규식 등은 셋째 날 회의 참석 이후 남북지도자협의회 개최를 요구하며 회의에 불참했다. 김구와 김규식 등 남측 지도자들이 요구한 남북지도자협의회는 26일 남북연석회의가 끝난 이후부터 30일까지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金朋濬)·이극로(李克魯)·엄항섭(嚴恒燮)·김일성(金日成)·김두봉(金枓奉)·허헌(許憲)·박헌영·최용건(崔鏞健)·주영하(朱寧河)·백남운 등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이와 별도로 26일 저녁 7시부터는 약 4시간에 걸쳐 남쪽의 김구, 김규식, 북쪽의 김일성, 김두봉(金枓奉)이 참석한 4김(金) 회담이 열렸다. 이 협의회와 회담에서는 남북통일에 대한 남북지도자의 공동성명, 남북통일을 위한 공동대책기관의 수립, 남북통일운동을 위한 조직문제 등이 논의됐다.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2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개최 축하 시민대회 모습.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2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개최 축하 시민대회 모습.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2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축하 시민대회에서 곡괭이를 들고 행진하는 노동자들 모습.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25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축하 시민대회에서 곡괭이를 들고 행진하는 노동자들 모습.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25일 오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개최 축하 공연을 마치고 주요 간부들과 조선인민군협주단원들이 북조선인민회의 청사 후원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1열 왼쪽 세 번째 부터 허헌 남조선노동당 위원장, 김원봉 조선인민공화당 위원장, 이극로 민족자주연맹 정치위원, 김두봉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박헌영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등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가운데 군복 입은 사람이 정율성 조선인민군협주단장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25일 오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개최 축하 공연을 마치고 주요 간부들과 조선인민군협주단원들이 북조선인민회의 청사 후원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1열 왼쪽 세 번째 부터 허헌 남조선노동당 위원장, 김원봉 조선인민공화당 위원장, 이극로 민족자주연맹 정치위원, 김두봉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박헌영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등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가운데 군복 입은 사람이 정율성 조선인민군협주단장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email protected]


남북지도자협의회는 4월 30일 한반도에서 미소 양군의 철수, 남북한 간 내전 방지, 전국 총선거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 남한만의 단독 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의 내용이 담긴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종료됐다.

김구·김규식 등 60여 명의 남측 참가 인사들은 5월 1일에 열린 노동절 행사를 참관한 후 5일 오후 38선을 넘어 돌아왔다. 홍명희 민주독립당 위원장 등 일부 남측인사들은 이 때 돌아오지 않고 북측에 남았다.

서울에 돌아온 후 김구는 “모든 것이 첫 숟가락에 배부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한 두 번이라도 내왕하면 우리의 목적은 달성하리라는 자신을 가지고 있다”고 소감을 밝혔고, 김규식은 “공동성명에도 있는 바와 같이 생각했던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30일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에서 채택된 문건에 서명하는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장. 사진은 북한이 흑색 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변환해 공개한 것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30일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에서 채택된 문건에 서명하는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장. 사진은 북한이 흑색 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변환해 공개한 것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25일 오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개최 축하 공연을 마치고 주요 간부들과 조선인민군협주단원들이 북조선인민회의 청사 후원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1열 왼쪽 세 번째 부터 허헌 남조선노동당 위원장, 김원봉 조선인민공화당 위원장, 이극로 민족자주연맹 정치위원, 김두봉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박헌영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등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가운데 군복 입은 사람이 정율성 조선인민군협주단장이다. 사진은 북한이 흑색 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변환해 공개한 것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8년 4월 25일 오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개최 축하 공연을 마치고 주요 간부들과 조선인민군협주단원들이 북조선인민회의 청사 후원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1열 왼쪽 세 번째 부터 허헌 남조선노동당 위원장, 김원봉 조선인민공화당 위원장, 이극로 민족자주연맹 정치위원, 김두봉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박헌영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등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가운데 군복 입은 사람이 정율성 조선인민군협주단장이다.  사진은 북한이 흑색 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변환해 공개한 것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한 남측 인사들은 1948년 5월 1일 평양에서 열린 노동절 행사에 참석해 4시간 동안 노동자, 농민, 인민군의 행진 모습을 지켜봤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한 남측 인사들은 1948년 5월 1일 평양에서 열린 노동절 행사에 참석해 4시간 동안 노동자, 농민, 인민군의 행진 모습을 지켜봤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14. [email protected]


그러나 5일 뒤인 5월 10일 남한에서는 총선거가 실시됐고, 7월 27일 제헌헌법 제정, 8월 15일 정부 수립 등의 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48년의 남북협상은 분단 정부 수립을 막지 못했지만 이후 7·4 남북공동성명(1972), 남북기본합의서(1991),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남북대화의 역사적 기반이 됐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