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박대종 문화소통]훈민정음 해례본의 기이하게 생긴 ‘處(처)’자

등록 2020.06.17 06:00:00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박대종의 ‘문화소통’

[서울=뉴시스] <사진1>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이체자가 쓰인 3개의 ‘處(처)’자가 있다. 그 중 해례편 27장 앞면의 ‘處’는 용비어천가 권1, 7장 앞면처럼 상성 권점이 붙었다.

[서울=뉴시스] <사진1>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이체자가 쓰인 3개의 ‘處(처)’자가 있다. 그 중 해례편 27장 앞면의 ‘處’는 용비어천가 권1, 7장 앞면처럼 상성 권점이 붙었다.

[서울=뉴시스]  한문으로 설명된 해례본을 넘기다보면, 지금의 한자 자형과는 다른 기이한 글자들을 접하게 된다. 소위 ‘이체자’라는 것들인데, ‘處(처)’자 또한 그 중 하나이다.

그 글꼴을 자세히 살펴보면 ‘虍(범 호)+処(곳 처)’의 모양이 아니다. 위쪽은 ‘虍(호)’와 유사하나 내부의 ‘七’이 ‘土’로 바뀌었다. 아래는 ‘匆(총)’자 비슷한데,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내려그은 선이 ‘匆’의 외곽 ‘勹’를 넘어간다. 게다가 19장과 27장의 글꼴엔 점 하나가 더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편집자들은 이처럼 기이한 ‘處(처)’의 이체자를 대체 어디에서 취해 쓴 것일까?

해례본에 쓰인 ‘處’의 이체자는 두 종류로, <사진②>에 보이는 여러 이체자 중 ⑥과 ⑦에 해당한다. 둘의 다름은 오직 글자 중간 오른쪽 부위에 점이 있고 없고의 차이뿐이다.

점 없는 ⑥의 자형은 997년 요나라의 승려 행균(行均)이 편찬한 ‘용감수경(龍龕手鏡)’에 처음 보인다. ‘용감수경’은 고려에 전해져 1997년에 국보 제291호로 지정됐으니, 세종대왕과 집현전 8학자들 또한 그 책을 보았을 것이다. ⑥에 점이 덧붙은 ⑦의 자형은 원나라 초기 1299년 송매동(宋梅洞)이 지은 ‘교홍기(嬌紅記)’에서 비롯됐다. 훈민정음 편집진은 해례본에 쓸 글자들을 선택 시 신중을 기했다. <사진①>처럼 ‘民(민)’, ‘土(토)’, ‘中(중)’의 자형은 특이하게도 점이 덧붙은 이체자를 택했다. 신성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다른 책들과 구별시키기 위함이었는지 ‘處(처)’자 또한 그것들에 맞춰 점이 있는 ⑦의 자형을 골랐다.

‘處’의 자원을 살펴보자. <사진②>에서 보듯, ‘處(처)’에서의 ‘虍(←虎호)’는 비유적으로 쓰인 것이다. 즉, ‘處’는 호랑이(虍)와 같은 재해를 피해,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夂: 뒤질 치) 피난처=자리(几: 안석 궤)를 붙잡거나(丮: 잡을 극←‘금문2’의 자형에 보임) 밟고(止: 발 지) 눌러앉아있는 모습에서, ‘머물러 살다, 처하다, 곳’ 등을 뜻한다.

‘處’의 이체자 ①의 자형은 초나라 재상 ‘손숙오(孫叔敖)’ 비문의 예서체에서 비롯됐다. ‘虍(호)’가 ‘雨(비 우)’자로 바뀌어 있고, 하부는 ‘夂(뒤져올 치)’자가 두 번 쓰였다. 발의 방향은 앞이나 위를 향해야 전진을 의미하는데, ‘夂(치)’는 아래쪽을 향하고 있어 뒤져오거나 뒷걸음치는 모양을 나타낸다. 따라서 ‘雨’가 들어간 ①의 자형은 비(雨)를 피해 부리나케 뒷걸음질하여(夂夂) 피난처나 처소에 눌러앉아 있는 모습에서 ‘머무르다, 처소’ 등을 뜻한다.

[서울=뉴시스] <사진2> ‘處(처)’의 여러 이체자 중, 훈민정음 해례본에 쓰인 것은 위 ⑥과 ⑦의 자형임.

[서울=뉴시스] <사진2> ‘處(처)’의 여러 이체자 중, 훈민정음 해례본에 쓰인 것은 위 ⑥과 ⑦의 자형임.

<사진②> ①의 자형에서 아래쪽 두 개의 ‘夂(치)’가 ②에서는 한데 결합하여 ‘匆(총)’자 비슷하게 변했고, ③에선 위쪽 ‘雨(우)’ 속의 ‘水(수)’가 ‘土’자처럼 변했다. 그 변한 자형이 다시 ‘虍’와 결합하여 재차 변한 것이 바로 ⑥과 ⑦의 자형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선 ‘處’자가 총 3회 쓰였다. 해례편 19장 뒷면과 23장 뒷면에서는 거성으로써 일반적 의미의 ‘곳 처’로 쓰였다. 고로, 종성을 설명하는 19장의 “唯有欲聲所當處, 中聲成音亦可通”은 “오직 ‘ㅇ(欲)’ 소리가 있어야 마땅한 ‘곳=자리’에는 (ㅇ을 생략하고) ‘초성+중성’만으로도 음을 이뤄 통할 수 있다”, 23장의 “欲書終聲在何處”는 “종성을 쓰고자 하면 어느 곳에 쓸까?”로 해석된다.

한편, 정인지 서문 중 해례편 27장에 쓰인 다음 문장 중의 ‘處’는 일반적 의미가 아닌 상성의 ‘머무를 처’자여서 읽을 때 주의하라고 상성 권점이 붙어 있다. “要皆各隨所‘°處’而安, 不可强之使同也(모두 각각 머무르고 있는 지역에 따라 편안하게 할 것이지, 강제로 모두 다 같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가 된다.(해석: 박대종)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