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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㉕ 남으로, 북으로… 분단이 낳은 이산가족

등록 2020.06.21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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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이유로 40만 명 이상 월남 선택

1948년 이전 월북은 주로 정치적 이유

아직도 풀지 못한 이산가족의 아픔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25. 월남(越南)과 월북(越北), 엇갈린 선택

1945년 해방과 함께 38선이 그어지고 미군과 소련군이 38선 남과 북에 각각 진주하면서 한반도에서는 활발한 ‘인구 이동’이 이뤄졌다.

특히 해방 전 일본, 만주로 이주했던 120만 명이 넘는 동포들이 귀국하면서 남한 인구는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헌의회 개원식 축사에서 “이북에서 넘어온 동포가 450만”이라고 발언했지만, 이 숫자는 월남자와 해외 귀국동포를 모두 합친 것이다.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그은 38선은 산과 강으로 나눠진 자연 경계선이 아닌 일직선으로 구분된 ‘인공적 경계선’이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논 사이로 38선이 지났고, 어느 날 갑자기 이웃한 형과 동생의 집이 38선으로 나뉘기도 했다. 지금의 군사분계선처럼 철책이 쳐져 있는 것도 아니고 표지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서울=뉴시스] 1947년 5월 25일 월남인 가족이 소달구지를 타고 38선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 미군 사진가는 이 사진을 찍기 전 길 위에 ‘38’이라고 쓰고 38선을 표시하는 금을 그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6.21.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7년 5월 25일 월남인 가족이 소달구지를 타고 38선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 미군 사진가는 이 사진을 찍기 전 길 위에 ‘38’이라고 쓰고 38선을 표시하는 금을 그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6.21.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해방 직후 진주한 미군이나 소련군조차도 38선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38선을 넘나드는 것이 금지되지도 않았다.

초기에는 미 군정은 “38도 이북으로 여행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요. 다만 우리 미국 군인에 대해서만 이를 금지하고 있다”며 “조선인 측에서 이리로(38선 이북으로) 여행하는 것은 우리가 금하지는 않으니까 갈 수 있으면 가도 좋을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뉴시스] 1947년 5월 38선 표지판 앞에 도착한 월남 가족을 미군 헌병이 바라보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6.21.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7년 5월 38선 표지판 앞에 도착한 월남 가족을 미군 헌병이 바라보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6.21.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7년 5월 38선을 넘은 월남인들이 미군 헌병들한테 짐 검사를 받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6.21.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7년 5월 38선을 넘은 월남인들이 미군 헌병들한테 짐 검사를 받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6.21.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7년 5월 월남인들이 개성에 설치된 수용소에 들어오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6.21.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1947년 5월 월남인들이 개성에 설치된 수용소에 들어오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6.21.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미군정청 경무부가 38선 주변의 요소요소에 경찰지서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은 1946년 6월이었고, 1974년 4월이 돼서야 미군정은 월경자를 모두 체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경무부에서는 4월 18일부터 미 주둔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명령에 의하여 38선 이북 지역으로부터 이남 지역으로 넘어오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을 막론하고 즉시 체포하여 다음과 같이 조치하기로 되었다 한다.

1. 국적 여하를 막론하고 38선 경계선을 넘어 남조선에 넘어오는 자는 즉시 체포하여 미군으로부터의 신분 조사와 방역 검사를 하기 위하여 개성, 춘천, 의정부, 강릉 등 지정 수용소에 수용할 것.
2. 경찰은 전기 수용소 설치 지점의 배후 약간 지점에 편리 상 필요한 집합소를 설치할 것.
3. 경찰은 전기 집합소에 집합된 인원을 편리 상 일정 기간별로써 상기 해당 수용소에 인도할 것.” (<서울신문> 1947년 4월 20일 자)

[서울=뉴시스] 38선을 넘은 월남인들이 거쳐야 할 미군의 통행 절차를 안내하는 사진. 이러한 통제는 1947년 4월 이후에 마련됐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6.21.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38선을 넘은 월남인들이 거쳐야 할 미군의 통행 절차를 안내하는 사진. 이러한 통제는 1947년 4월 이후에 마련됐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청) 2020.06.21. [email protected]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월경자 출입이 잦은 몇 개 지점에 해당하는 것이고, 1947년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38선이 생겨난 이래 경계의 눈을 피해가며 비밀 월경을 하는 동포는 연일 끊일 사이가 없다”며 “38선 600여 리나 되는 전선을 타고 이곳 저곳이 모두 월경 코스로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남북 물가 차이가 심해 위험을 무릅쓰고 38선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상인도 많았다. 장사하거나 월경하다가 체포되는 경우에도 경비대원들에게 돈을 쥐여주면 통과되던 시절이었다. 1946년 3월부터 1947년 초까지 남북 간 우편물 교환도 대략 2주에 1회씩 정기적으로 이뤄졌다.

이처럼 1948년 남과 북에 분단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38선은 대단히 유동적인 경계선이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오가고 할 수 있는 ‘인공선’이었다. 3년간 활발한 인구이동이 가능했던 이유다.

1948년 조선은행 조사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3년간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약 86만 명 정도로, 그중 60%는 고향이 남쪽인 경우였고, 약 39만 명 정도가 북한 출신으로 월남을 선택한 경우였다.

1949년 인구조사(센서스)에 따르면 전체 남한 인구 약 2천만 명 중 1945∼49년 사이의 월남자 수는 48만 명 정도였다. 이러한 통계로 보면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 분단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순수 월남자는 대략 4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부터 1년간은 정치적 이유로 38선을 넘는 경우가 많았다.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으로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의 초대 치안 부장을 지낸 최능진(崔能鎭)은 9월 중순 10여 명의 청년과 함께 월남했고,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결성했던 이윤영(李允榮) 부당수는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반대한 조만식 당수가 연금되자 주요 간부들과 동행해 서울에 온 후 조선민주당을 재건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수적으로는 만주 지역에 있던 해외 동포들이 북쪽 지역을 거쳐 38선을 넘거나 일제강점기 때 북쪽으로 이주했다가 귀향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서울=뉴시스] 조만식(曺晩植)이 북한지역의 대표들과 함께 1945년 11월 3일 평양에서 결성한 조선민주당 당원증.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조만식(曺晩植)이 북한지역의 대표들과 함께 1945년 11월 3일 평양에서 결성한 조선민주당 당원증.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1.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조만식(曺晩植)이 북한지역의 대표들과 함께 1945년 11월 3일 평양에서 결성한 조선민주당 당원증. 그해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이후 조만식 당수가 연금되자 이윤영(李允榮) 부당수 등 주요 간부들은 월남해 1946년 4월 서울에서 조선민주당을 재건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조만식(曺晩植)이 북한지역의 대표들과 함께 1945년 11월 3일 평양에서 결성한 조선민주당 당원증. 그해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이후 조만식 당수가 연금되자 이윤영(李允榮) 부당수 등 주요 간부들은 월남해 1946년 4월 서울에서 조선민주당을 재건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1. [email protected]


그러나 1946년 3월 북한이 토지개혁을 시행하자 이에 반발해 이북 출신 지주, 자본가의 월남이 크게 늘었다. 이들 자산가들의 월남은 1947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지역적으로 황해도와 평안남도 거주자들이 많았다.

특히 1947년에 들어서는 서민층의 생활난, 정치 사상적 탄압, 재산 몰수, 종교적 탄압, 취직, 유학 등 월남 동기가 다양해졌다.(조선은행 조사부, 1948, <조선경제연감>)

1947년 들어 이북지역은 실업자 수가 크게 늘고, 쌀값이 급등했다. 당시 신문에서는 “하루에 수천 명씩 넘어오는 이북 동포의 대부분은 소시민, 학생층이며 혹은 농민도 끼어 있다”라고 보도했다.

당시 월남자의 경우 가족 단위로 38선을 넘든가, 가족 중 한 명이 먼저 월남한 후 다른 가족을 데려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1947년 38선을 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서울에 집이라도 잡아놓고 가족을 데리러 가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함석헌(咸錫憲), 철학자 김형석(金亨錫) 등이 이 시기에 월남을 선택했다.

월남자보다 월북자의 경우에는 정치, 사상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문인 이기영(李箕永), 한효(韓曉)의 경우 해방 직후 서울에서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했지만, 임화(林和)가 주도한 조선문학동맹 측과 갈등을 빚으면서 일찌감치 평양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1946년 여름 좌파 정당의 주요 간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면서 박헌영(朴憲永)·이강국(李康國) 등이 월북하고, 테러 위협에 시달리던 근로인민당 위원장 여운형(呂運亨)은 1947년 여연구, 여원구 등 두 딸을 평양으로 보내기도 했다.

특히 1946년 7월 13일 경성대학과 8개 관공립 전문학교 및 1개 사립 전문학교를 일괄 통합하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이 발표되고, 이에 반발해 국대안반대운동이 1년 넘게 진행되면서 많은 진보적 학자들이 월북해 새로 평양에 문을 연 북조선김일성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의 상당수가 각 분야에서 “독보적 존재”였고, 학생들로부터 “수재”로 알려진 교수들이었다. 이 시기에 월북한 도상록(都相錄), 정근(丁根) 등은 이후 북한 핵물리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좌파 인사들의 월북은 1948년 평양에서 개최된 두 차례 남북연석회의와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규모로 이뤄졌다. 이때 월북한 좌파인사의 상당수가 평양에 잔류했다.

[서울=뉴시스] 1948년 8월 21일부터 6일간 해주에서 열리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선출된 대의원들이 임진강을 건너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8년 8월 21일부터 6일간 해주에서 열리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선출된 대의원들이 임진강을 건너고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1.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1948년 8월 21일부터 6일간 해주에서 열리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표로 선발된 사람들이 38선을 넘고 있다. 이들의 대다수는 이후 북한에 잔류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1.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1948년 8월 21일부터 6일간 해주에서 열리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표로 선발된 사람들이 38선을 넘고 있다. 이들의 대다수는 이후 북한에 잔류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6.21. [email protected]


3년간 38선을 넘어 북에 정착한 월북자의 수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대략 1945년부터 1953년 사이에 자의든, 타의든 북으로 간 사람이 30∼4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를 근거로 추정해보면 전쟁이 나기 전까지 월북한 사람의 수는 10만 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하고, 3년간 지속하면서 ‘인구 이동’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 기간에 남쪽으로 이주한 사람은 50만 명 이상, 북쪽으로 이주한 사람은 20만 명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통칭 ‘1천만 이산가족’은 과장된 수치지만 해방 후 8년 동안 수백만의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해방 7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들의 아픔은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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